1994.2 | [문화저널]
새로찾는 전북미술사
현실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생활 담은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이철량 한국화가, 전북대 교수(2003-09-15 14:43:01)
지난 호에서 언급한대로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유가(儒家)의 이념이 국가 경영의 중심이 되면서 특히 도덕과 윤리가 앞서게 되고 신분의 차별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일부 사대부 계층에서는 그림 그리는 일이 매우 천한 것으로 치부되어졌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의 대학자미녀 서, 서, 화에 모두 능통했던 선비화가인 강희안(姜 顔1417-1464)과 같은 사람은 「서희는 천기의 하나이므로 후세에 남기는 것은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그림을 넘겨주지 않았다. 직제학(直提學)의 벼슬을 지냈던 당대의 인물이 사회전반에 지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사회의 분위기 속에도 조선조 초기에는 세종조를 전후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시와 문장이 발달하여 서예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시(時)·문(文)을 쓰고 짓는데는 글씨가 필수라 서(書)는 그만큼 발달할 수 있었다고 본다.
화가로서 이상좌와 그의 가솔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서예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장수인으로 기록된 황여헌(黃汝獻1486-?)은 호를 유촌(游村)이라 하고 중종 4년에 문과에 등재하여 이조참의에까지 올랐다. 특히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크게 이름이 났으며 그가 지은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 싸지 이름이 났다고 한다. 또한 중종년간에 활동하여 학관(學官)을 지낸 양대복(梁大 1544-1592)은 호를 송암(松岩)또는 청계도인이라 칭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과 함께 왜적을 격파하여 싸우다 병사하였다. 남긴 저서로 청계집(淸溪集)이 있으며 그의 필법은 우아하고 절묘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다 한다.
또한 선조에서 인조년간에 활동한 최명길(崔鳴吉1586-1647)은 전주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호를 지천(池川)이라 하고 별시에 등재하여 후에 벼슬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또한 인조가 즉위하여 정사원훈일등(正社員勳一等)에 올랐고 완성부원군(完成府院君)을 제수 받았다. 문장과 학력이 고매하여 특히 성리학에 깊이 밝아 당대의 위인 이였다. 특히 중국 명대의 동기창(同期昌)체를 잘 소화하여 필법에 일가를 이루었다 하였다. 그리고 존주인을 기록된 전영(全英)은 호를 매은(賣恩)이라 하였는데 김의 가락국수로 왕능비를 썼을 만큼 필법에 뛰어났으며 인조 14년에는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가 이름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이외 당시 조선조 전반에 활동한 서가(書家)로서 유연량( 延亮1591-1663), 이경석(李景奭1595-1671), 이상필(李尙弼1603-?), 이덕익(李德益1604-?), 유념(柳念1608-1667), 이정영(李正英1616-1686), 이명은(李命殷1627-?), 류이승(柳以升1638-?), 윤이명(尹以明1629-1682), 진익채(秦益採1724-1786)등과 화가로서 이재현(李齎賢1586-?), 이세송(李世松1652-?), 양기성(梁箕星), 김희겸(金喜慊), 이성인(李聖鱗1718-1777)등이 활동하였는데 이고장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이 무렵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고 역시 화원으로서 도화서의 교수(敎授)를 지낸 한시각의 사위로 알려진 이명욱이 눈길을 끈다. 그는 유전하는 어초문답도(도판魚酢問答道)이외에 별다른 작품이 없고 그의 출생가계에 대해서나 활동내력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여기에 소개되는 어초문답도가 예사롭지 않은 뛰어난 수준의 기량을 보이고 있는 명품이며 또한 전주인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 궁금증을 갖게 한다. 그가 이와 같이 높은 수준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장인 도화서 최고수준인 교수를 지내고 있었다는 것과 청나라 화가로서 문인화에 뛰어났던 맹영광(孟永光)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얼마동안이나 사사를 받았으며 화풍의 내용도 분명치 않으나 맹영광이 그 무렵 자주 조선을 다녔고 조선화가들과 교분이 깊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명욱이 잠시 맹영광의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명욱은 이 어초문답도를 통해 추측하면 특히 앞선 선배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다양하고 분명한 화필의 묘미를 터득하였던 것 같다. 이 그림은 낚싯대를 걸쳐 메고 왼손에 낚시질한 고기를 들고 있는 어부와 도끼를 허리춤에 차고 장대를 걸쳐 맨 나무꾼이 만연에 웃음을 담고 담소하며 귀가하는 평온한 분위기를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유독 생기 있고 친근감을 주는 이유는 이명욱의 뛰어난 인물묘사도 있지만 당대의 인물들이 대개가 은유 자적하는 선비들의 판에 박은 자태였던데 비해 매우 현실적이며 현장감 넘치는 생활의 단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나타난 어부의 모습이 앞서 언급한 이숭효(李崇孝)그림으로 알려진고 있는 어부도(漁夫圖)하고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을 보면 이명욱이 어떤 경로로 이숭효의 작품을 통해 인물묘사 공부를 하였거나 아니면 당시 조선조 초기에 이러한 유형의 교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숭효와 이명욱은 적어도 1세기 정도의 시간차가 있어 후자일 가능성이 높으나 어떻든 이명욱은 이숭효의 그림을 능가하는 필세와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짜랑짜랑한 두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 표정이 세밀한 얼굴묘사, 등뒤에서 살랑살랑 불어대는 바람소리가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나부끼는 옷자락에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안면과 팔, 다리의 힘있는 근육묘사가 뛰어나고 유려한 옷자락 선이 그림에 힘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뚜렷하고 세세한 표현의 필치가 주변의 갈대 숲에서도 유감 없이 드러나고 있는데 작은 필치하나도 소홀함 없이 분명하면서도 정력적인 필세를 발휘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도 매우 극적인 구성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변중앙에서 좌변 아래로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언덕과 두 노인이 들고 있는 낚싯대와 장대가 평행으로 언덕과는 반대방향에 대각선으로 배치되고 있다. 반면에 두 인물은 수직으로 곧게 한 중앙에 그려 넣으므로 해서 어느 것과도 서로 안정된 꾸밈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편안하고 안정된 구성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갈대숲이 두 인물을 축으로 해서 거의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히 이명욱의 화면포치능력의 뛰어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초기에 비하여 인물중심의 산수화가 많이 그려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초기에는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극히 작은 인물을 배치하였으나 중기에 들어서면 인물을 크게 하고 산수를 작게 그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이불해(李不害1529-?), 윤인상(尹仁傷16C), 함윤덕(咸允德16C), 이숭효(李崇孝16C), 이경윤(李慶胤1545-?), 김명국(金明國1600-?), 윤두서(尹斗緖1668-?)등을 들 수 있는 데 이중 여기 소개되는 이명욱의 어초문답도는 대표적으로 할만하다. 특히 섬세한 묘사와 분명하고 힘있는 필치의 구사는 조선조 그림으로서 매우 이례적이라 할만하다.
어떻든 이명욱의 생존에 관한 자료가 없고 활동내력이나 여타의 작품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구체적인 파악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명욱을 이 지역과 연관시키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혹 전주에서 출생하고서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파산한 가문출신으로 한양에서 화가로 입신하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