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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민족 공동체의 ‘오래된 미래’를 찾아서
김경태(2014-10-06 13:31:22)



흔히들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일본 오사카 조선 고등학교(이하 오사카 조고) 럭비부의 전국대회 도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60만 번의 트라이>는 그런 스포츠가 가진 아우라에 민족적 사명감을 더한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재일교포를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전국대회 우승을 꿈꾼다. 그들의 어깨 위에 60만 동포의 자긍심이 달려 있다. 이 각본 없는 ‘민족’ 드라마는 관객을 웃기고 울리면서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민족 공동체를 소환해 그 의미를 묻는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스포츠 활동은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의식 행위에 가깝다. 그것은 럭비부원들이 시합 전날 치르는 문자 그대로의 신성한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학교 운동회에 임하는 구성원들의 적극적이고 진지한 태도 – 가족들은 운동장에서 보다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밤새 학교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작 학교 운동회에 불과하더라도 그 지향점은 늘 민족이다. 그들은 통일의 염원을 담아 ‘한반도기’를 펼치는 퍼포먼스로 운동회를 마무리 짓는다. 이처럼 스포츠 활동은 재일교포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유지해 가는데 있어 핵심을 이룬다.

그들이 민족성에 집착한다고 해서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민족 공동체 결속에 있어 단일민족이나 혈연이라는 상징성보다는 살과 살이 맞닿는 유대감이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함께 피땀 흘리며 뒹구는 단체 운동이 그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작동원리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기에 앞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가족으로서 서로의 곁을 지킨다. 이것은 국가가 강제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확장이라는 휴머니즘에 근거하는 민족 공동체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 국적인 영화감독과 럭비부원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감독은 몇 년간 오사카 조고 럭비부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면서 어느새 그들은 가족처럼 가까워져 버렸다. 그래서 감독은 촬영 대상과의 거리 유지라는 원칙을 어기고 촬영 현장에 개입하게 된다. 무릎 인대를 다친 럭비부 주장 ‘관태’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덮어 준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일탈’은 지속된다. 심지어, ‘유인’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뇌진탕 진단을 받으며 더 이상 시합을 뛸 수 없게 되자 이를 촬영하던 감독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기도 한다. 한편, 럭비부원들은 감독을 ‘누나’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축구공에 맞아 쓰러진 그녀를 염려하거나 추운 날씨에 촬영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주기도 한다. 장시간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감독 스스로가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그 공동체 역시 그녀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영화 속에 그대로 묘사된 것이다.

럭비부원들이 전국재패를 위해 순조로운 단계를 밟아가는 사이, 오사카 조고의 정부 보조금이 끊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 일본의 외교문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 논리로 재일교포 사회를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은 그들이 한민족이라는 소수자성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을 과소평가한 채 북한과의 관계로만 그들을 규정하려 든다. 오사카 조고는 자신들도 엄연한 일본사회의 구성원이라는 호소를 하며 그 불합리한 차별에 항거한다. 감독 역시 이에 동참한다.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이들 공동체는 더욱 단단하게 뭉치게 된다.

<60만 번의 트라이>는 그토록 민족 공동체를 지켜내고자 애쓰는 재일교포 사회의 일면을 고등학교 럭비부를 통해 보여주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노력에 동참하도록 이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민족 공동체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며 우리를 정서적으로 감화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진한 향수일수도 있고 퇴색해가는 가치를 지키려는 외골수적 태도에 대한 경외심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민족적 유대가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에 대한 설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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