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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 | 연재 [클래식뒷담화 ]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바그너
문윤걸(2014-10-06 13:28:50)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꼭 찾아 본다는 게 막장 드라마라고 합니다. 시청율이 높은 드라마일수록 과연 저런 일, 저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악독한 사람, 그리고 기가 막힌 일들로 가득 차 있지요. 하기야 하늘의 별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니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있을 법도 합니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크고 작은 막장 드라마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현실에서, 때로는 작품 속에서 이런 일들이 펼쳐지고 있지요. 음악계를 뒤흔든 가장 큰 막장 드라마는 독일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와 피아노의 슈퍼스타 리스트의 딸 코지마의 불륜 사건일 것입니다.

당대 음악계 최고의 스타로 바람기가 다분했던 리스트는 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중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 둘째 딸로 코지마를 얻었습니다. 리스트는 백작부인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두 딸을 데리고 새로운 연인의 집으로 옮겨 왔는데 특히 코지마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연주여행을 떠나서도 코지마를 잊지 못해 자주 코지마를 만나러 찾아오곤 했다니까요. 한번은 연주여행 중 딸이 그리워 잠깐 들렀는데 이때 함께 온 사람이 바그너였습니다. 당시 코지마는 16살이었고 바그너는 40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이 바그너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저녁식사 후 오페라 <신들의 황혼>의 대본을 낭송하는 바그너를 본 코지마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짧은 만남이 나중에 어마어마한 막장드라마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코지마는 리스트의 수제자인 한스 폰 뷜로우(후에 전업 지휘자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의 어머니 집으로 이주했고 1857년 리스트의 주선으로 코지마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사랑에 빠진 한스 폰 뷜로우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은 신혼여행 중에 바그너를 찾아갔습니다. 이때 코지마는 자신이 바그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몰래 바그너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바그너는 무지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선배이자 절친(바그너는 리스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작곡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를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눈을 떠 리스트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인 리스트의 딸이며, 동시에 나이는 어리지만 음악적 동지인 한스 폰 뷜로우의 아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사랑을 고백하고 자신을 받아 달라고 하니 그럴 법도 했지요. 바그너는 코지마를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바그너는 지휘자로서 쁘르게 성장해가는 한스 폰 뷜로우에게 자기 작품연주를 자주 부탁했고 함께 작업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동시에 코지마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리스트와 바그너, 한스 폰 뷜로우는 당시 음악사 100년전쟁에서 같은 편인 진보파로 동지적 관계였습니다). 이번에는 바그너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마침내 1863년 바그너는 코지마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고, 둘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그너는 별거 상태이긴 했지만 첫 부인과 여전히 법적 부부관계에 있었고, 코지마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이 버젓이 곁에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른바 불륜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 사건은 유럽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특히 코지마의 아버지인 리스트와 남편인 뷜로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리스트는 당장 바그너와 코지마를 찾아가 크게 화를 내며 관계를 정리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 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코지마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더라도 바그너를 떠날 수 없다고 했으며 바그너 역시 코지마를 돌려 보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리스트와 바그너-코지마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 코지마는 리스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지냈습니다(말년에 리스트는 코지마가 그리워서 여러 번 화해의 편지와 제스처를 보내지만 코지마는 매몰차게 거절하였답니다).

남편을 두고 아버지의 친구와 애정행각을 벌인 것만으로도 막장에 가까운 데 진짜 막장은 이제 부터입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불륜 관계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뷜로우와 부부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남편 뷜로우 역시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를 잘 알면서도 아무 문제없는 듯 살았구요. 심지어는 1865년 코지마가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딸 이졸데를 낳았는데 바그너의 딸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딸로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그너를 만나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고 바그너의 작품을 자주 연주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4년 뒤 1869년 코지마가 바그너의 아들 지그프리트를 낳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지그프리트가 태어나자 한스와 코지마는 마침내 이혼하였고 둘은 바그너는 57세, 코지마는 32세가 된 1870년 결혼해서 해로하였답니다(지금 두 사람은 바그너가 살던 저택 바로 뒤에 함께 묻혀있습니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불륜사건으로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심지어는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행동으로 비난받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부부관계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그너와 절친 관계에 있어 두 사람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았던 철학자 니체는 “코지마는 내가 알고 있는 여성들 중 가장 존경할만한 훌륭한 여성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코지마는 바그너의 음악여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히고 있으며 바그너가 항상 최상의 상태에서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내조를 아끼지 않은 것으로 음악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을 기리는 독일의 유명한 음악축제인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도 코지마가 크게 발전시켰고 지금도 코지마의 자손들이 축제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바그너가 얽힌 막장 사건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그너와 브람스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 바그너와 브람스는 너무나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바그너가 1863년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라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을 무렵 브람스는 바그너 곁에서 조수처럼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람스는 바그너에게 자신이 작곡한 헨델의 변주곡을 연주했고 브람스의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습니다. 브람스 또한 “앞으로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없을 것”이라고 화답했구요. 그러나 둘의 화목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브람스가 새 작품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 연주를 들은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에 갇힌 인물로 시대에 맞지 않은 바흐나 작곡해야 할 사람’이라며 막말에 가까운 혹평을 하였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브람스는 바그너를 평생 증오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바그너와 관계를 끊은 브람스는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에 나섭니다(이는 전통에 입각한 발전과 전통을 뛰어넘는 발전, 둘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었던 음악사 100년 전쟁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음악기법이나 작품에 대한 비평은 급기야 인신공격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브람스는 자신이 수집한 바그너의 비밀을 폭로했는데 그 비밀은 바그너의 여자관계였습니다. 과거 바그너가 부인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 불륜을 저지르며 연애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편지를 입수해 폭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 폭로의 시기가 마침 바그너가 리스트의 딸 코지마를 임신시킨 시기여서 바그너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이를 참고 있을 바그너가 아니었습니다. 바그너는 다시 브람스에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브람스는 여전히 철지난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밖에 할 줄 모르며 수준낮은 음악이나 하는 나부랭이일 뿐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도 이상하다며 막말 비난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후로도 바그너와 브람스는 서로를 증오하며 막말을 쏟아내 최고의 막장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코지마와의 결혼 이후 여자문제는 더 이상 없었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존심과 고집이 셌던 바그너는 당대 음악계의 트러블 메이커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성 자체를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이러한 모든 비난을 뛰어 넘는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위대한 음악이 반드시 훌륭한 인품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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