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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 | 연재 [클래식뒷담화]
못다 핀 꽃, 파니와 나넬
문윤걸교수(2014-09-01 18:25:10)

아주 오랫동안 인간 사회 전역에서 여성의 참여를 배제해 온 만큼 유럽의 고전음악계에서도 여성의 참여는 오랫동안 선별적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유럽 음악사에 등장하는 작곡가나 연주자, 지휘자는 온통 남성 일색입니다. 아주 서서히 여성의 진입이 이루어졌는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작곡가와 지휘자는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허락되었지요.  


  여성이라 하여 어찌 작곡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만 대부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이는 몇 안되는데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의 4살 연상 누나 파니 멘델스존(Fanny (Cäcilie) Mendelssohn(-Bartholdy, 1805.11.14.~1847.5.14.)의 경우를 보면 왜 그랬을까 짐작이 갑니다. 파니와 펠릭스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매우 수준높은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펠릭스는 ‘19세기의 모차르트’로 불릴 만큼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누나 페니는 13살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Well-Tempered Clavier〉 전곡을 암보로 연주하는 등 동생 펠릭스를 뛰어넘을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할 재목이었습니다(동생과 함께 떠난 이탈리아 연주여행에서 파니는 바흐와 베토벤 등의 음악을 암보로 연주했는데 이를 본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가 큰 영감을 받았고 후에 바흐의 평균율을 이용해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피아노 연주실력도 동생인 펠릭스가 ‘나보다 페니가 더 뛰어나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작곡능력 또한 펠릭스보다 먼저 작품을 써내려갈 정도로 탁월했다고 합니다. 음악사가들은 한동안 잊혀졌던 바흐를 멘델스존이 새롭게 발굴해 낸 것은 바흐를 좋아해 자주 연주했던 누나 페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모로 동생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페니는 더 이상 음악가로 훈련받지 못합니다. 1820년,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 아브라함은 펠릭스와 파리로 떠나며 파니에게는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라는 편지를 남깁니다. “펠릭스에게는 음악이 직업이 될 수 있지만 너에게는 그저 장식품일 뿐이다. 너는 음악을 통해서 네 존재를 알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너의 명예는 어떻게 처신하고 분별하느냐에서 얻어야 한다. 펠릭스가 찬사를 받으면 너도 기쁘지 않더냐. 그것을 너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이도록 처신하여라. 이것이 진정한 여성성이며, 이것만이 여자를 빛나게 할 수 있다.” 즉 그는 여자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사교생활을 위한 장식에 불과한 것이며 여성은 남성 뒤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니는 펠릭스가 유럽 전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는 동안 아무도 몰래 틈틈이 작곡을 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펠릭스의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어느 날 펠릭스의 연주를 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오늘 연주한 작품 중 <이탈리안>이라는 가곡이 가장 마음에 드는 데 누구 곡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곡은 파니가 작곡한 것이어서 펠릭스는 여왕에게 “그건 제 누이의 곡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이탈리안>은 1827년 멘델스존 작곡으로 발표된 <12개의 노래>라는 작품집에 실린 곡인데 12개 가곡 중 <이탈리안> 등 3곡이 파니의 작품이었고 <이탈리안>이 이 작품집에서 가장 유명한 곡입니다). 


  1829년, 파니는 빌헬름 헨젤이란 평범한 프로이센 궁정화가와 결혼했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친지에게 편지로 남겼는데 “나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요. 남자들이란 여자들이 창조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나는 평범한 아내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며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파니는 작곡을 계속해서 4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대부분 가곡이나 피아노 소품이었는데 10년 후, 펠릭스에게 작품집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펠릭스는 작품집 출판이란 평생을 작곡가로 헌신할 사람만이 하는 일인데 파니는 여성이고 주부이므로 어울리지 않는다. 주부는 가정 일을 다한 뒤에야 청중과 음악에 대해 생각하며 작곡할 수 있는 것이라며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작품집 출판계획은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파니는 작곡을 계속했고 다시 9년이 지난 1847년, 42세가 되던 해 기어코 자신의 작품집을 출간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음악애호가들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파니는 새로운 작품에 바로 착수했는데 3개월 뒤인 1847년 5월, 피아노에 앉은 채 급성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법의학자들은 멘델스존의 가문에 유전적인 고혈압과 순환계장애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평생 서로 의지하던 누이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동생 펠릭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펠릭스는 누이를 위해 <파니를 위한 진혼곡>을 작곡하는 등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6개월 뒤에 38세의 나이로 누이를 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니 멘델스존만큼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파니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 있었는데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누나 나넬 모차르트(Marianne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입니다(나넬 모차르트가 궁금하신 분들은 2011년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나넬 모차르트>라는 영화를 찾아보세요). 모차르트에게는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이중 어른이 된 사람은 나넬과 볼프강 뿐이었습니다. 나넬은 동생 볼프강 만큼의 음악신동이었습니다(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볼프강 6살, 나넬 11살 때부터 이 남매를 데리고 뮌헨의 바바리아 성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이른바 음악신동 쇼를 다닌 거지요). 나넬은 10살에 이미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작곡에도 큰 재능을 보였지만 18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음악을 그만두게 합니다. 이유는 역시 파니 멘델스존의 경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첫 사랑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결국 5명의 자녀를 가진 돈많은 홀아비와 결혼했습니다. 


  나넬 모차르트는 단 한곡도 자신의 이름으로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곡능력이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피아니스트로서는 매우 뛰어난 연주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차르트는 ‘나와 누나만 할 수 있는..’이라는 표현을 편지에 자주 쓰고 있고, 또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악보를 누나에게 보내면서 ‘이 작품이 누나에게는 별 거 아니지만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쉽게 연주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대 대부분의 음악가들을 조롱하고 비웃던 모차르트지만 누나인 나넬의 실력은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 남매는 멘델스존 남매보다 더 사이가 좋았습니다. 모차르트를 그린 그림, 특히 어린 모차르트를 그린 그림에는 가끔 한 여자아이가 등장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나넬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오랫동안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며 늘 붙어 있었지요. 또 두 사람은 런던 연주여행에서 어린 나이에 함께 ‘네 손을 위한 소나타 C장조’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이 곡은 네손을 위한 소나타‘곡으로는 최초의 곡입니다). 이후 누나를 떠나 혼자 연주를 다니던 모차르트는 자주 누나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하고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이 편지는 1782년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로 점점 뜸해져 1788년에는 아주 끊겼습니다).   

  파니 멘델스존과 나넬 모차르트,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는 두 사람에게 음악가로서의 길 대신 교양있는 숙녀, 부잣집 귀부인으로서 길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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