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다이어리>: 그들은 그렇게 두 번 죽었다.
1994년, 영광 일대에서 5명을 잔인하게 연쇄 살인한 ‘지존파’ 일당이 검거된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를 경악으로 몰아넣으며 피의자 처벌 문제에서부터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까지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들을 쏟아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논픽션 다이어리>(정윤석 감독)는 그 사건을 현재로 소환해 낸다. 담당 형사들과 교도관, 교화에 참여했던 종교인들, 변호사와 마을주민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지존파를 회고하고, 반면에 당시의 방송 자료화면들은 그 시대의 날선 목소리를 생생히 전해준다.
당시 뉴스에서는 ‘악마의 대리자’라는 선정적이며 전근대적인(!) 표현까지 써내며 지존파의 내재한 ‘악마성’을 과대포장했다. 심지어 심야토론의 한 패널은 그들이 이미 절반정도는 ‘씨’에서부터 악한 기질을 타고났고 후에 환경적 요인을 받아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이처럼 언론매체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의 원인을 철저히 그들 개인의 책임으로 한정짓는 여론몰이를 했다. 빈부격차라는 자본주의의 폐해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부자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했다는 원래의 의도와 달리 정작 피해자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는 그들 언행의 불일치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처한 환경에서는 전설이나 영화 속의 멋진 ‘의적’이 되는 것조차 버거웠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대책은 충효 교육의 확대 실시였고 관련 전문가들은 이런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공권력을 더욱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즉 국민에 대한 규율과 훈육, 감시와 처벌 등 강압적인 ‘생체권력’ 제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그들의 범행 목적 중 하나가 ‘부모에 대한 효도’였으며 죽음까지 각오한 그들이기에 공권력은 안중에 없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런 해결책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물론 교도소 내에서 종교를 통한 교화, 즉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려는 시도 역시 사회 순응적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빈부격차의 해소나 복지 개선이라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근본적 대책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같은 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일어나고 책임자인 사장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7년이라는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내란죄 등의 죄목으로 전두환 및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개원을 선고하나, 그들은 구속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영화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상의 ‘가진 자들’과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신속하게 집행된 지존파 일당을 나란히 병치한다. 마치 지존파가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살인죄 이전에 가난이라는 원죄를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후반부에 이르면 영화는 사형제도의 존폐 여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사실 그것은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비록 흉악범이라고 해도 인간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휴머니즘 정신이나 과연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합법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사형제도를 다루지 않는다. 그에 앞서, 그 근간을 형성하는 배제와 복속의 메커니즘을 직시한다면 사형을 통한 범죄자의 제거가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지존파 사건을 다루는 심야토론의 진행자는 어느 대학생이 보낸 팩스를 읽는다. 그는 ‘야타족’이나 지존파는 소수에 불과하며 다수인 우리 젊은이들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며, 저들과 우리가 엄연히 다르다고 분리한다. 진행자는 웃으며 방청객들의 박수를 유도한다. 그가 전하는 희망 어린 메시지에 우리는 마냥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인터뷰에 응한 한 형사는 영광에 산다는 것이 창피하다고 말하는 주민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그 사건에 대한 가족과 이웃의 연대 책임에 대한 강조한다. 지존파는 사형 선고 이전에, 아니 범행을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우리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상징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그렇게 두 번 죽었다. 우리 모두가 그들을 악마로 규정한 채 그들의 상징적/실제적 죽음에 대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