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듣는 서양음악은 이탈리아나 독일음악이 꾸준히 발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러 지역, 여러 민족들의 음악이 비빔밥처럼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서양음악의 발전사를 보면 끊임없이 중앙과 주변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느 시대나 하나의 음악적 주류 양식(대개 교황이나 위대한 왕, 귀족이 거주하던 곳의 음악)이 위세를 떨치지만 이내 새로운 음악적 양식과 표현방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음악가 그룹이 등장해 이전의 주류 음악적 양식과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주류 음악이 탄생하는 역사를 반복해 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기존의 주류음악과는 다른 음악적 양식은 주로 음악적 변방에 놓여있던 민족들이 즐기던 민속음악에서 온 것입니다. 즉 서양음악의 새로움이란 주변 민족들에게서 온 것으로 이민족들의 음악을 흡수, 융합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19세기 중엽 유럽이 근대사회의 토대를 형성하고 그 사회의 지배자가 된 신흥계급, 부르주아가 그들이 몰아낸 귀족계급의 삶을 흉내내며 서서히 타락과 위선의 길로 접어들던 낭만주의 시대에 서양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민족의 음악이라면 단연 집시음악(Music of Gypsies, Zigeunermusik)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쇼팽과 함께 불세출의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형식을 파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답게 집시멜로디와 연주방식에 흠뻑 빠졌습니다. 무려 8년간(1839~1847)의 작업하여 19곡의 피아노 독주곡 <헝가리언 랩소디(헝가리 광시곡)>를 작곡했는데 작품 머리에 ‘고집스럽고 심오한 집시 스타일로 연주할 것’이라는 지시어를 기록해 놓을 정도였습니다. 천박한 음악으로 무시하고 모멸하던 집시음악을 클래식음악으로 흡수한 것입니다. 리스트는 이 작품을 너무나 좋아해 6곡을 골라 관현악곡으로 다시 편곡해서 내놓았습니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호하던 리스트와 달리 베토벤의 정신과 양식을 고전 그대로 계승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보수적인 브람스조차도 집시음악을 자신의 음악 속으로 받아들입니다. 21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헝가리 무곡>이 바로 그것입니다. 브람스 역시 처음에는 <헝가리 무곡>을 피아노곡으로 작곡했지만 나중에 오케스트라용으로 다시 편곡해서 발표했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스트와 브람스는 집시음악을 클래식음악으로 흡수하여 집시음악의 위상을 높이고 클래식음악을 풍요롭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작곡가들인데 이들은 기악곡 중심의 집시음악을 보다 더 진지한 예술가곡으로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이는 좀 지나치게 비유하자면 뽕짝음악을 차용해 가곡을 만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악곡으로 만들어진 집시음악 중 대표적인 걸작은 바로 슈만이 작곡한 합창곡 <유랑의 무리>를 들 수 있습니다. <유랑의 무리>는 합창단이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셨다면 한번쯤은 불러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왜 집시음악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에게 <헝가리>라는 국가 이름이 붙어 있을까요. 약간의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5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인도의 북부지방을 떠나 온 집시들이 동유럽, 특히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러시아 등에 주로 몰려 살았고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음악적 특색에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리스트는 1859년에 발표한 저서에서 ‘헝가리의 민속음악은 집시음악이다’라고 발표했습니다(이는 리스트만의 의견은 아닙니다. 유럽인 대부분이 뭔가 느낌이 남다른 헝가리 음악을 집시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유명한 작곡자인 벨라 바르톡(Bela Bartok, 1881-1945)이 헝가리 마을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 집시음악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헝가리 민속음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집시음악이 동유럽 음악에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닙니다. 서유럽음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곳이 스페인입니다. 투우와 함께 스페인의 대표적인 문화적 상징, 플라멩코(Flamenco), 열정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애잔함도 느껴지는 이 플라멩코가 집시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음악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집시들이 이곳 저곳을 거쳐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대거 흘러 들어갔는데 이들의 음악과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문화, 그리고 지역의 토속 민속음악이 융합해 만들어진 것이 플라멩코입니다. 그래서 플라멩코에는 집시들의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끈적끈적한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집시음악은 그 어느 곳보다도 스페인에서 꽃을 피우는데 스페인의 근대음악은 물론 현대음악에도 깊이 영감을 주었습니다(생상스의 유명한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1870년 사라사테에게 헌정한 곡인데 생상스는 스페인 스타일로 썼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집시 스타일곡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정도입니다). 스페인 음악은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서양음악의 본류에 합류할 만큼 크게 부흥하는데 여기에 집시음악이 크게 공헌한 것입니다. 그래서 탄생된 작품이 <스페인무곡>, <아랑페스 협주곡> 같은 명곡들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시들의 삶과 음악은 19세기 서양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대부분 편견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집시들은 대부분 부도덕하거나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집시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묘사는 음악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바로 오페라에 등장하는 집시들인데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비제의 오페라<카르멘>입니다(카르멘 초연 때 파리시민들은 집시여인이 등장하는 오페라가 자신들의 교양을 무시했다며 항의하는 등 카르멘 초연은 실패로 마감되었습니다). 비제는 집시여인 카르멘을 자신이 유혹해 운명이 바뀌어 버린 남자를 배신하고 또 다른 남자를 유혹하다 결국 살해되는 운명으로 그렸습니다. 또 베르디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 집시를 등장시키는데 원수를 갚기 위해 원수의 아들을 유괴해 기르면서 원수와 그의 아들이 결투하게 하여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하게 만드는 섬뜩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집시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배타적인 기독교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에게 집시의 자유분방한 삶과 문화는 부도덕한 것이며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또 집시들은 잦은 유랑생활로 한 곳에서 부와 문명을 축적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낮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멸시와 모멸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집시들의 삶은 그들이 은밀하게 숨어서 추구하던 근대적 억압과 규범, 규칙을 벗어난 원초적 자유로움의 표상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집시를 멸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집시들의 삶에서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자유분방한 삶, 또 문명인이 잃어버린 원초적 본능을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시음악은 때로 흥겹고 열정적이지만 그 내면의 멜로디는 매우 멜랑콜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시음악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우수에 젖게 하고 마음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떠오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음악이 이런 묘한 매력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친 삶의 역사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요.
집시는 나라에 따라서 집시, 치고이너, 치간느, 지탕, 보헤미안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만약 음악작품에 위와 같은 이름이 붙어 있거나 헝가리, 스페인 같은 나라 이름이 붙어있다면 틀림없이 집시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바로 브람스의 <집시의 노래>,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 라벨의 <치간느>, 푸치니의 <라보엠>, 마스네의 <헝가리의 풍경>, 랄로의 <스페인교향곡> 등이 그렇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집시들의 음악은 서양음악이 성장하는 데 위대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