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문화저널]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를 바로 찾자
참다 참다 못견뎌 일어선 고부땅 사람들
고부봉기
김은정 전북일보 기자, 편집위원(2003-09-15 14:34:55)
조병갑에 수세 갑면 진정, 오히려 곤욕 치른 군민들
척왜양, 반봉건의 기치를 내세우고 전국각지역에서 물밀어들 듯 일었던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수그러들던 1893년 말, 전라도 고부에서 한 크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고부 조소리에 살고 있는 동학교도 전봉준 등 군민들이 군수 조병갑에게 수세 감면을 진정하는 사건이었다.
농민들이 진정했던 수세는 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갖은 탐학과 수탈을 자행하는 가운데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이곳 동진강 상류에 민보가 있었음에도 다시 기왕에 있던 만석보 밑에 별 필요도 없는 또 다른 새보를 쌓기 위해 군민들을 강제 사역시키고는 그 보의 세금을 다시 군민들에게 부과시키는 등 갖은 폭정을 자행한데에 따른 것이었다. 고부의 농민들은 이제 겹쳐지는 수탈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고 그 고통을 등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탈의 보고(?), 고부
관리들의 탐학과 수탈은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던 까닭에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현상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봉준 공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전라도 감사 이하 각 읍 수재가 십중팔구는 탐관」이고,「내직(중앙관리)에 있는 자도 매관 매직을 일삼으니 모두 탐학」했던 당시 사회상황에서 관리들의 수탈은 비단 고부나 전라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었다. 지방 관리들의 대부분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악용해 자신들의 부를 채우거나 권력정치 세력에 빌붙어 보신하는데만 눈이 어두웠으니 결국 탐학과 수탈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농민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병들고 굶주림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방관리들의 탐학, 수탈의 정도가 가혹하게 더해지면서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마침내 들고일어났고 그러한 민요는 전국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그들 대부분의 민요는 더러는 과격성을 띠기도 하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받아내기 위해 관아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발전은 가져오지 못하고 대체적인 민요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다만 고부의 경우 비옥한 농토와 해안까지 끼고 있어 수탈을 하기에 천혜 적인 조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가렴주구에 눈이 어두워 있던 탐관오리들에게는 당연히 보고쯤으로 여겨져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으니 그로 인해 이 지역에서의 수탈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심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각 지역에서의 등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발전해 민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지라 고부에서의 이 사건도 바로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여느 민란과 다를 바 없는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부 민란은 달랐다. 고부민란 역시 그 이전 전국 각지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다른 민란처럼 자연발생적이고 1개 군 단위의 국지적인 투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다른 민란이 한순간 폭발하다가 그치고 또한 그 지역을 전혀 넘어서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냈다. 이를테면 고부봉기는 지속성이라는, 종래의 민란이 보여주었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미한 합법적 등소, 군민들의 분노
당시 등소에 앞장섰던 전봉준은 등소 따위의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이미 자기 배를 채우는데만 급급했던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늦추는데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이제는 농민들의 보다 단결된 의지와 세력이 표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전 1893년 11월 조병갑에게 진정한 내용이 시정되기는커녕 도리어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상황을 경험한 농민들은 억울함과 부당함을 가슴속에 삭이고 있을 수 만은 없게 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에서 은밀한 계획이 모의되고 있었다. 전봉준 등 고부 북서쪽에 거주하던 20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추진한 이른바‘사발통문’거사계획이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은「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군기창과 약고를 점령」「군수에게 아유(아부)하여 군민을 괴롭힌 탐리를 격징」「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중앙)로 직향」한다는 등이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은 당시 통상적으로 행해졌던 정소운동의 단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달랐고 거대한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봉기의 시대적 요청을 내세우며 격문을 만들어 고부군의‘각 리 이장 및 집강’앞으로 띄웠고 소문은 입과 입을 통해 군민들에게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군민들은 앞으로의 사건에 불안해하기는 고사하고「낫네 낫네 난리가 낫네」라며 오히려 잘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있었다. 그만큼 군민들의 생활은 더 이상 견뎌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고 고통스러웠으며 억울함과 울분의 응어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때맞춰 제1차 응징 대상인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나자 통문의 서명자 집단의 거사계획은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구체적인 봉기의 계기가 약화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보류의 상황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11월 30일에 익산군수로 발령이 난 조병갑이 전임지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고부관야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가 하면 그사이 이은용, 신좌연,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절등이 순서대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비롯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단 한명도 부임을 하지 않는 사태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을 이용, 전라감사 김문현은 거짓장계를 조정에 올려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잉임(孕任)발령해 줄 것을 건의했고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조정에서는 마침내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에 임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그 사이 12월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 의지를 누르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 감면을 비롯한 폐정을 호소했으나 김문현은 이들을 쫓아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병갑의 고부군수 재임명은 화약고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조병갑은 11월 익산 군수로 발령을 받고서도 부임하지 않은 채 고부관아에 남아 그대로 복무하는 기만적인 행동을 해왔는지라 군민들의 분노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참다 참다 더 참을 수 없어 일어서
마침내 고부 군민들은 1월 9일(음력) 밤 예동마을에 모였다.「온 고을의 인민이 참고 또 참다가 종말에는 더 참을 수 없어서」봉기에 나선 것이었다. 이날 저녁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5백명에 이르렀으나 말목장터를 거쳐 읍내로 진격해 들어가 고부관아를 점령할 때는 이미 15개마을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군수에게 빌붙어 살면서 군민들을 괴롭힌 아전들을 끌어내 악정의 내력을 엄정하게 취조하고 처벌했으며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차지해 세력을 확충하는 한편 수세로 거두어들인 양곡 1천 4백여석을 몰수했다. 또 진전에서 거둔 세곡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만석보 밑에 쌓은 새보를 허물어 버렸으며 읍내에 진을 쳤다.
「사발통문」의 3개항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농민들의 조직력을 다지기 위해 향촌 주민들을 동원, 민군을 구성했다. 1월 17일 민군은 말목장터로 옮겨 그곳에 다시 진영을 설치하면서 나이든 사람이나 어린이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장정들만을 골라 민군을 갖추었다. 고부민군은 이제 지도부를 중심으로 조직력과 결속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부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전봉준 김도삼 최경선 정익서 등이었다. 여기에 각촌의 동장 집강등이 적극 참여, 그들의 지휘아래 참여한 민군들은 함부로 해산하는 일없이 단결력을 강화시켰다. 고부민군들은 백산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말목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쉽고 교통도 편리했으나 관군을 변장시켜 장터로 잠복시켜 민군들을 크게 자극시켰다. 민군들은 힘과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민란수준 넘어선 고부민군
10일 봉기 이후 말목장터와 백산에 진영을 설치했던 고부민군은 그동안의 민란 수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에 조정에서는 무력으로라도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백산에 모여있던 민군의 숫자는 대략 1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또다시 들어오는 민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민군의 숫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말목장터가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지세가 불리해 민군들에게는 불리한 여건이었던데 비해 백산은 해박 50미터의 낮은 산인데도 교통의 요충지인데다가 사방이 탁트인 광활한 들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들이 집결하고 대오를 정비하는데는 아주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조병갑과 전라감사 김문현을 징계하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 군수에,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안핵사에 임명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석진 등을 변복시켜 민군을 해산시키려 했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군 5진영과 금구 정읍 부안 김제 담양 무장 태인 흥덕 등 11개읍의 병정을 소집해 대기하도록 했다. 백산에 진을 치고 있던 고부민군은 2월 23일 백산을 출발해 고부군을 다시 점령하고 군기고의 무기로 무장을 강화, 25일에는 백산으로 돌아왔다. 이 동안 백산 근처에는 장시가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민군들도 한달여동안 소강상태로 지냈다.
민군 내부 갈등, 해산
농민군 내부의 지도부와 민군사이에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함열 조창에 나가 전운영을 격파하고 농민들의 혈세를 탐학한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하고자 했으나「민우가 월경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민군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 즈음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섣불리 민군들을 공략하지 못하고 일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타협책을 선택, 전봉준에게 이 의사를 전했으나 농민군은 다시 3월 1일 식량조달을 위해 줄포의 전운소 세고를 파괴했다. 박원명은 보다 적극적인 효유책을 세우고 음식상을 크게 차려 민군들을 불러모아「조용히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지낸다면 죄를 용서하고 읍폐를 시정하겠다」며 해산을 설득했다. 고질화된 병폐와 탐학관리를 벌하고 제거하는데 뜻이 있었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되자 더 이상의 투쟁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박원명의 효유책은 민군들을 동요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고부군의 지역적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던 향촌민들의 의지까지 더해져 민군의 기본 세력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부봉기가 그동안의 민란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층 지도부가 지향했던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민군들이 해산하기 시작한데 이어 그동안 눈치만 살피며 고부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안핵사 이용태가 그때서야 역졸 8백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오히려 박원명의 효유책을 탓하며 조병갑의 탐학을 정당화하고 민란 참가자를 색출, 갖은 횡포와 잔안무도한 탄압을 자행했다.
3월 13일 마침내 민군은 완전 해산하고 전봉준 등을 비롯한 지도부는 무장의 손화중포로 피신, 두달여에 걸친 봉기의 횃불은 내려졌다. 그러나 반봉건에의 혁명 의지와 정신은 이제 새로운 불씨를 당겼으니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들불을 지핀, 이를테면 농민혁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