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문화저널]
문익환 목사님을 추모하며
시대가 요구했던 사람
이광재 소설가 전주세길청년회 회장(2003-09-15 10:02:51)
1993년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이었을 것이다. 마침 그 때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라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패배주의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기 이전에 저마다 자기 한 몸 추슬러 내는데도 버겁다는 생각을 해다. 그만큼 우리의 패배감은 참혹한 것이었고, 미래는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였다.
바로 그때, 문익환 목사님의 강연이 금암교회에서 열렸다. 지금 기억에 목사님은 만연해 있던 패배주의를 극복할 방도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다가오는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 맞이할 것인가를 역설했던 것 같다. 이미 전국을 돌며 무수한 강의를 했기 때문에 목사님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나는 울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눈물이 교회 책상에 후두둑 떨어진 다음에야 손수건을 꺼내들었으니 나는 어쩌면 참으로 무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날 내가 흘린 눈물은 실로 한 바가지는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눈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패기와 열정에 차 있어야 할 30대 초반의 내가 도리어 70대 노구의 목사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다는 부끄러움,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말하는 목사님 앞에서 한없이 위축돼 있고, 더러는 과장 섞인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 날 그렇게 울고 난 나는 참으로 개운한 느낌이었다. 힘이 났다.
문익환 목사님은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 날 그분께 위로 받고 다시금 용기를 얻은 사람이 어디 나 뿐이었으랴. 문익환 목사님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복돋아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겨레의 어른, 민족의 스승'이라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양심을 비껴가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고, 또 그러한 삶은 남루하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산다는 것은 그에 못지 않은 시련과 인고가 따르며, 당장은 그런 삶의 달콤한 열매는 영위하기도 어렵다. 특히 사회의 정의가 실현돼 있지 않을수록 양심을 지키는 삶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외면하기보다 지키기란 몇 곱절이 힘이 들며 그런 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문익환 목사야말로 이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분의 방에는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드나들 듯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경구가 붙어 있었고, 또 실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문익환 목사님은 또한 언제나 청년이었다. 그분의 해맑은 웃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방북 때문에 교도소에 계시던 89년에 재판을 받으러 나와 포승에 꽁꽁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한 점 티고 없이 웃던 그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이 언제나 청년이었다는 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통일은 기약할 수 없는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조국통일은 이제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러한 민족의 희망을 우리 앞으로 끌고 온 분이 바로 문익환 목사님이다. 민족의 입에 생명수를 넣어준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이토록 홀연히 가셨다. 통일이 눈앞인데, 그리고 통일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밀려 있는데 그분이 가셨다. 그래서 눈앞이 더욱 눈앞이 캄캄하고, 비통하다. 이제 남은 우리는 그 누구에게 어리광을 부려야 하는 것인지.
그러나 아니다. 그분이 그토록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것, 낙관과 용기를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한다.
그분이 하는 것을 우리가 나누어 하는 것이야말로 그 분의 명복을 비는 참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