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아일랜드, 20살이 채 되지 않았던 ‘필로미나(주디 덴치)’는 놀이공원에서 만난 남자와의 하룻밤 사랑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 의해 미혼모들을 교화하는 수녀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힘들게 남자 아이를 낳은 뒤,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만 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단 한 시간뿐이다. 그 꿀맛 같은 시간도 아이의 입양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 후 50년의 세월이 흐르고 필로미나는 그제야 가슴에 묻어든 아들을 찾아볼 결심을 한다. 그녀는 딸의 소개로 전직 BBC 기자인 ‘마틴(스티브 쿠건)’을 만나 미국으로 아들을 찾으러 떠난다.
그러나 아들이 이미 수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동성애자이면서도 반동성애 정책을 지향하는 공화당 당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런 모순된(?) 정체성은 엄마를 닮은 듯하다. 필로미나가 가톨릭 신자로서 수녀원의 규율을 따르고자 어린 아이를 입양 보내고 평생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필로미나는 아들이 게이였고 더욱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노년의 나이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내재적 보수성을 염두 했을 때는 분명 의외의 반응이다. 하긴,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외간남자인 마틴에게 아무렇지 않게 그 시절의 섹스가 얼마나 황홀했는지를 술회하는 그녀이니, 원하는 성별과의 섹스를 위해 세상의 편견에 맞선 게이들의 사랑을 이해하기란 오히려 더 수월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보면, 각자의 시대에 성적 금기(!)를 깨고 쾌락을 좇았으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필로미나에게 있어 진짜 충격은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행여나 생모와 고향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들의 죽음만큼이나 그녀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사진을 보고 추억을 더듬을 때 마다 아들이 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평소에 했는지의 여부를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러나 긍정적인 답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마틴이 아들의 사진에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켈틱 하프’ 모양의 배지를 발견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필로미나에게 있어 아일랜드를 기억한다는 것은 민족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앞서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이 주었던 진심어린 사랑을 아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징표의 다름 아니다.
필로미나의 아들은 죽기 직전에 애인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아일랜드의 수녀원을 방문했다. 생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년원은 이미 입양 기록을 모두 불태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필로미나에게는 아들이 그 수녀원에 묻혀있다는 사실조차 숨겼다. 그런데 필로미나는 그런 수녀들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했다. 한편, 사사건건 종교의 모순성을 꼬집으며 필로미나와 대립각을 세웠던 마틴은 수녀원에서 행패를 부리며 끝까지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용서할 마음이 없지만 필로미나가 건네는 그 용서의 가치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반면에 당시 수녀원의 강제 노역과 입양이라는 어두운 역사의 주역이었던 노수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태도로 항변한다. 그 수녀는 육체적 쾌락에 눈이 멀어 몸을 더럽힌 여성들을 종교적 믿음에 근거해 훈육한 것이었다며 용서를 빌기는커녕 당당하게 맞선다. 즉 필로미나는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용서를 해버린다. 아마도 그것은 절대적 믿음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동병상련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로미나는 수녀가 너무 원망스럽지만 수녀가 가진 그 진심어린 신앙심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무엇보다도 그녀가 간절하게 믿는 대상은 수녀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며 성경도 아닌, 바로 하느님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