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원칙 따로 실천 따로, 대학 입시제도
윤덕향 발행인(2003-09-15 10:01:10)
좋게 말해서 소신지원이고 정확하게 말해서 요행수를 바라는 배짱지원으로 대표되는 전기 대학 입학시험과 그 와중에서 터져나온 낙동강 수질오염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도박판에서나 있음직한 배짱지원이 공식적으로 가능한 대입시험 탓으로 명문대학에서 미달사태가 빚어지고 그런 한편으로 몇 십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한 대학도 있다. 그 바람에 경쟁률이 높은 학교에서는 면접시험을 치루느라 홍역을 치루었다고도 한다.
대학입학 시험에서 왜 면접시험을 치루는지 알 수 없다. 면접시험은 어쩌면 단순한 지식을 측정하는 이런저런 시험보다 훌륭한 선발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학입학에서만은 요식 행위로 자리하고 있다. 사범계열 지원자의 경우 면접점수가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 원칙상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범계열의 면접이 응시자의 인간됨됨이과 앞으로의 수학능력 등을 따지는 것인지? 사범계열 이외의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을 시킨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 또 몇 분 동안 치르는 요식 행위로서의 면접시험에서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동차 운전면허를 얻기 위하여 치루는 적성검사나 신체검사에서 손가락을 차례로 굽혀보는 것은 차리리 의미가 있다. 그것만도 못한 면접시험을 치르느라 인근 학교를 빌리고 신문에 시험장소를 광고한 대학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 별다른 의미 없이 치르는 요식 행위에 동원되는 지성인 집단이라는 대학교수들의 시간낭비는 관심 밖이다. 그저 지금까지 해왔으니까 왜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것 같다. 남이 장에 간다니까 덩달아 따라 나서는 식으로 일제강점기에도 했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하니까 면접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높은 점수를 얻고도 재수를 하는 사람을 막기 위하여 허용한 복수지원 제도로 인하여 몇몇 학교에서는 합격자의 30-40퍼센트만 등록을 하고 이에 대비하여 예비합격자를 선정하였음에도 더 많은 예비합격자를 선정하여야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또 몇몇 대학교의 수석합격자가 세칭 S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수석합격이라는 영광과 그에 부수되는 혜택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S대학교로서야 한껏 자부심을 높일 일이지만 다른 대학교로서는 이만저만 망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같은 합격자들로 인하여 정당하게 합격될 수 있었던 다른 응시자의 합격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다. 물론 경쟁의 원리에서 본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아니다. 또 대학 진학자들이 모두 같은 생각. 즉 아무데나 붙고 보자는 생각으로 대학을 선택하고 학과를 선택한다는 생각이라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소신껏 해당학과를 지원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억울한 기회박탈인 것이다. 입학원서를 작성할 무렵이면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여기저기에서 조언을 넘어서 강요를 하다시피 한다. 그러나 그 말대로 학과를 선택하고나 학교를 선택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원칙 따로 실천 따로인 것이 우리의 대학 입학시험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입시에서만이 아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대학시험에서 적성이나 개개인의 능력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성적으로 합격이 가능한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방법으로 그럴 듯한 학교와 학과에 진학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진학담당 교사들은 입학원서를 작성하면서 아주 세밀하게 몇점따위로 진학지도를 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을 뿐 이미 각 대학교별, 학과별 서열과 그 서열에 따라 입학가능 점수가 있으며 점수에 맞게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비유하자면 각기 다른 가격표를 붙인 형태와 색깔의 옷을 손에 쥔 돈에 맞추어 사도록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틈에서 손에 쥔 돈이 적은데도 야바위꾼처럼 사는 사람이 없어 재고로 남은 옷을 거머쥐는 것이 배짱지원이다.
그런데 보다 큰 문제는 선발제도에서만이 아니다. 수학능력 시험이 끝난 다음 본고사를 포기한 학생들을 위한 대책이 있는 곳이 거의 없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다. 고등학교는 오로지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를 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 우리의 교육이다.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국가 백년대개를 입에 올리며 해방이후 반세기 가까운 동안 크게는 10여차례, 작게는 30여차례나 뜯어 고쳐서 마련한 것이 지금의 이 꼴이다. 개혁을 표방하고 출범한 문민정부에서도 대학입학 선발제도를 바꿀 의향이 있는 것처럼 보도되기도 한다. 바꿀 때 바꾸더라도 제발 바라건대 어느 날 갑자기 발표되어 대학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일선교사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안 한다고 하던 일을 돌아보면서 한다고 발표하는 것이 문민정부에서 적잖게 이루어졌으니 무턱대고 마음놓을 일이 아니다.
참으로 바라건대 밤잠 못 이루는 수험생과 학부모를 더 이상 당황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또 그럴싸한 명분을 입에 올리며 교육외적인 이유로 더 이상 교육제도를 뜯어고치지 말기를 바란다.
나무도 옮기고 난 다음 얼마간은 가만 두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이 교육실험을 위한 모르모트는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