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을 많이 듣고 있다. 최근이라고 말했지만 최근에 부쩍 그런 질문을 많이 들었다는 소리이면서, 사실 예전에도 종종 많이 들어왔던 질문이다. 그들은 단지 내게 그런 질문을 통해 안부를 물을 뿐 이지만 나는 그들이 흔히 ‘안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그 질문이 매번 어색하게 들린다. 그래서 늘 듣고있는 질문을 위해서라도 다양한 대답을 내놓아야 하지만 나의 대답은 면접에 준비된 면접자처럼 전형적인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상당히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의 대답은 언제나 “언젠가 생길 거에요”라거나 영양가가 없는 웃음만 넌지시 내비칠 뿐이다.
남자친구가 없는 이유를 공교롭게도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남자친구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지인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다. 변명도 참 그럴 듯해서 나를 아는 지인들은 금방 속아 넘어가거나, 속아주기도 한다. 속이고 속아주는 관계는 은밀한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으리라. 그저 내가 그들에게 안부인 듯 안부 같지 않는 그런 질문을 하더라도, 의례적으로 눈을 감아 달라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한 약속인 양 하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연애를 못 해 도태된 사람처럼, 이 지구상에 멸종된 사람처럼 늘 거리를 배회하거나,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면서 ‘연애의 정석’이라든가, ‘남자친구 잘 꼬시는 법’이라든가, ‘연애를 잘하는 99%의 노력과 1%의 재능’이라든가,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책을 사서 달달 외운다거나, 빨간 줄 밑줄 쫙-을 칠 정도로 열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연애는 글로만 배워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신여성이라는 걸 이 글에서 밝히고 싶다. 이런 신여성의 구애란 늘 이런 식이다. 구애처럼 보이지 않는 구애, 구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구애, 단지 그 구애가 애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바람 같은 것들.
스무 살 초반, 단 한 번의 연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별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 결별로 인해, 난 단단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척이나 단단해진 사람. ‘저절로’ 되어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어떤 다짐들이 마구 솟아난 스무 살 초반들의 기억은 나를 한 번 더 성장과 성숙의 계단을 걷게했다. 하지만 어쩐지 괜스레 슬퍼지는 건 스무 살 초반 이후에 남자친구가 없는 내 모습이 아니라, 어느 덧 스무 살 중 후반을 달려가는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느껴지는 서글픔이다.
가끔씩은 오히려 내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정말 연애는 하고 싶은 거니?”라는 질문을. 막상 나 스스로 그런 질문을 툭-하고 던질 때면 자꾸만 방황하는 사춘기처럼 대답을 회피하면서 외면하게 되는데 나는 그때 깨달았다. 외면만큼이나 무서운 건 없다고, 외면은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오로지 그 대답은 나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날 문득,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라는 단어는 혼자를 뜻하지만, ‘우리‘라는 단어는 ’함께‘이므로 함께여서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을, 또 앞으로의 날들을 함께 그려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당분간 행복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행복한 느낌은 내가 다시 연애의 세포를 다시 탑재시켜 가동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느끼고 싶기도 했다.
따스한 봄 날씨, 누군가와 걷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걷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든 그게 누구든 같이 걷고 싶은 날씨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위로 받았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자꾸 연약해지기 십상이지만 그런 날이 있는 것조차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나의 바람들이 상상의 날개로 흩어져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꽃을 피우는 작은 씨앗들이, 한낱 씨앗들로만 남겨지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