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여중생 ‘천지’의 자살로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마치 미스터리 영화의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듯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추리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용의선상에 놓인 여러 인물들과 마주한다. 그 용의선상에서 ‘은따’였던 천지를 친구라는 미명하에 자기방식대로 관계를 주도하면서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뒷담화의 대상으로 일삼았던 ‘화연’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그리고 한때 천지와 비밀 공간을 공유하며 단짝으로 지냈다가 자신의 아빠가 천지 엄마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절교해버린 ‘미라’도 빠질 수 없다. 물론 살아생전 천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언니 ‘만지’와 엄마도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 한 명, 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에 대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신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한 천지 자신도 분명 책임이 있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점차 범인을 찾는 일의 무의미함에 봉착한다.
애초부터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일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우리 모두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자이자 (잠정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지가 떠난 자리에 그녀를 괴롭혔다고 손가락질 받는 화연이 공공의 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천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추정되는 이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화연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아마도 그녀는 자신만의 철없고 서툰 방식으로 천지와의 친구 관계를 유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천지도 그녀를 용서하며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연은 따져 묻는 만지를 향해 울며 말한다. 자신도 천지가 너무 보고 싶다고.
부실한 관계 그물망
관계의 그물망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쉽게 끊어져 버릴 만큼 부실하다. 따라서 차라리 가해자는 우리가 반드시 맺어야만 하는 인간관계 그 자체이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소통에 의존한 채 그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 늘 노심초사해야만 하는 피해자인 것은 아닐까?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이 갖는 근원적 불완전성에 기반한 복잡미묘한 인간관계의 본질, 그것은 더욱이 너무나도 어린 그녀들이 감당하기에는 더 버거워 보인다.
한편, 화연의 엄마는 화연을 꾸중하면서도 정작 천지 엄마를 앞에 두고는 자신의 딸이 천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미라 역시 천지의 자살에 책임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언니 미란 역시 동생을 두둔하면서도 괴로워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들을 우리는 비난할 수만은 없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천지의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그들 역시 관계 맺기의 본질적 어려움에 갇힌 피해자일 뿐이다.
불완전한 소통에 대한 애도
영화의 끝에 이르러 우리는 자살 직전에 가족들로부터 구해지는, 그리하여 살아남는 천지와 만나는 만지의 꿈을 본다. 죽음을 둘러싼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우리가 부재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죽음을 막는 상상을 통해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이뤄진다. 그것은 현실 속 수많은 천지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위안의 몸짓이다. 천지는 자살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던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경청하도록 했다. 죽음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사소통 행위였다. 영화는 죽음과 상상적 부활의 의식을 통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소통을 애도한다. 천지의 유언처럼, 살아있는 이들은 계속 살아가야하니까 죽어버린 사람/관계는 그들을 용서한다. 우리는 그렇게 위로를 받으며 어제의 실패한 관계를 딛고 일어날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