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
그들의 권리, 정부가 나서야 한다
관리자(2007-01-15 13:07:04)
과학기술의 발달은 시각장애우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묵자로 된 인쇄물의 스캐닝을 통해 컴퓨터가 인식하여 이를 점자로 변환, 출력시켜 주는 장치가 십 여 년 전부터 국내에도 들어왔다. 이제 이 기계만 있으면 구술 또는 점자화를 위한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으니, 시각장애우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묵자를 점자로 변환하거나 구술하여 녹음하는 것은 저작권법상 저작권자의 복제권 또는 배포권에 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 시각장애우들이라고 하여 저작권법 적용의 예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표된 저작물의 대부분은 시각을 통해 인지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서적과 같은 어문저작물이 그것이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또는 사고로 실명하여 시각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저작권법을 차별 없이 적용한다면, 이들은 우리 시대 문화의 상당부분을 향유할 수 없게 된다.
위와 같은 불합리를 시정하고 장애인들의 복지를 향상하기 위해 우리 저작권법은 시각장애우들에 대한 특별한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공표된 저작물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위하여 점자로 복제, 배포할 수 있다”(저작권법 제30조 제1항),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 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설에서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이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공표된 저작물을 녹음할 수 있다”(같은 조 제2항). 그리고 그 시설로서, 장애인복지법상의 시각장애인생활시설, 점자도서관과 장애인생활시설, 장애인지역사회재활시설 및 장애인직업재활시설 중 시각장애인 등을 보호하고 있는 시설을 열거하고 있다. 한편 이에는 일반 초·중·고등학교에 설치된 시각장애인등을 위한 특수학급을 둔 각급학교, 그밖에 국가, 지방자치단체, 비영리법인에서 시각장애인의 교육·학술 또는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설치·운영하는 시설도 포함된다(저작권법 시행령 제4조).
우리 저작권법은 저작권자의 권리를 다소 희생시켜서라도 시각장애우들의 복리를 증진하고자 특례조항을 두고 있는 것이다. 본래 저작권은 부동산소유권과 같이 배타적권리로서 물권에 유사한 권리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채권처럼 채무자에게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 모두에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작권은 준물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부동산소유권과 같은 물권은 그 기간에 제한이 없는데 반해 저작권은 사후 50년이라고 하는 보호기간을 두고 있다. 이는 저작권이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라 일반 이용자의 이해와 적절한 조화를 꾀하는 권리임을 알 수 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서 신체장애자 등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되어 있다(헌법 제34조). 시각장애우도 우리 국민임에 틀림없고 그들의 장애로 인하여 불편하고 어려운 점에 대하여 국가는 도울 의무가 있다. 한편, 저작권은 절대적인 재산권이 아니라 법에 의해 인정되는 권리로서 일정한 경우에 제한될 수 있는바, 우리 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가치인 장애인복지를 위해 저작권자들은 일정 부분 자신의 권리를 제한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장애우의 편의를 위해 저작재산권을 일부 제한한 저작권법 조항은 매우 아름다운 입법으로서 인간 냄새나는 법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만난 이후 김영일 교수와 필자는 이메일로 서로 연락하고 있다. 필자가 보낸 이메일은 그가 갖고 있는 시각장애우용 노트북 컴퓨터에 의해 점자로 변환된다. 키보드 자판 밑에 점자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빠른 속도로 흘러 지나가면, 김교수는 검지손가락을 이용하여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속도로 읽어갈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교수한테 들은 바로는 시각장애우용 노트북 컴퓨터는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어떤 연구원의 노력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다이어트 치료제 개발을 위해 투자되는 돈의 10분의 1만 써도 아프리카에 창궐하고 있는 말라리아 예방약을 만들고도 남는다는 보고가 있다. 말라리아 약은 발명해도 이를 돈 주고 살 아프리카 나라가 별로 없다. 특허발명이나 저작물과 같은 지적창작물은 발명자 또는 창작자에게 경제적 혜택이라고 하는 인센티브가 보장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살 수 있는 시각장애우들이 얼마 되지 않아 그 시장이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발명품을 만든 그 연구원을 필자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법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에게 김교수는 이런 고충을 털어 놓았다. 한글 또는 워드파일로 논문이나 책자를 받아볼 수만 있다면 바로 위와 같은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출판사는 저작권법 규정을 들어 이를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출판물을 스캔하여 파일로 변환시켜 이를 다시 점자화 하여 읽을 수밖에 없는데, 스캔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캔으로도 인식이 어려운 정보는 놓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울러, 우리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인터넷상의 각종 정보도 너무나 그림파일이 많아 김교수와 같은 시각장애우들에게는 점자화하여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시각장애우들을 고려하여 별도의 화면을 만들거나 가급적 그림파일을 자제한다고 한다.
기술발전에 따라 시각장애우들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은데, 그 미흡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관심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시각장애우용 노트북 컴퓨터와 같은 돈이 되지 않는 발명품을 또 누군가 만들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런 일은 시각장애우들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남형두ㅣ연세대 법대 교수 | hd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