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
동계장의 튀밥 가게 “남의 거 물어준 것만 해도 쌀 한 섬이 넘어"
관리자(2007-01-15 13:03:49)
초겨울 햇살이 따사로운 순창군 동계면이 활기로 가득하다. 5일장이 섰다. 쇠전까지 들어섰던 옛 영화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장 곳곳에 놓인 두꺼운 옷과 털신발들, 그리고 그 앞에서 흥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열린 곳보다 닫혀 있는 곳이 더 많지만 낡은 장옥들도 5일 동안 굳게 잠겨져 있던 문을 활짝 열고 흥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장옥들 사이에 유난히 구수한 냄새를 풍겨오는 곳이 있었다. 흔한 간판도 없이, 앞과 뒤를 활짝 터놓은 그곳에서는 튀밥 기계 두 대가 불에 달궈지며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벽과 녹슨 튀밥 기계가 그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축제현장이나 도심 한복판에서 ‘향수’를 무기삼아 ‘뻥이요’를 외치는 장사꾼들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시골장터에서 오래된 튀밥 가게를 본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했다. 그만큼 시골 장터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여기 가게는 그 훨씬 전부터 있었고. 내가 전에 하던 사람한티 가계 권리금하고 기계 값 다해서 당시 돈으로 30만원을 조금 못주고 인수했어.”
원래 전라남도 순천에서 살다가 25년 전쯤 동계로 이사 온 정만수 할아버지가 이 가계를 인수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꾀임에 빠진거지. 지금은 영감님이 돌아가시면서 문을 닫아버렸지만, 원래 바로 저기 옆에도 나이든 영감님이 튀밥가게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 영감님이 자꾸만 날더러 이 가게를 사라는거여. 돈 잘 번다고 말이여. 내가 인수하던 무렵만해도 진짜 잘되았지, 장날이믄 새벽에 문 열어서 밤늦도록 계속 기계를 돌렸다고 하니까. 근디, 두 가게 중에서 영감님 가게보다는 여기가 더 잘된거여. 알고 보니까 그래서 영감님이 나보고 여기를 사라고 한거더라고. 아무래도 요령없는 사람이 일하믄 손님들이 영감님한테 몰릴거 아녀.”
그때 요령이 없어 정 할아버지가 ‘남의 거 물어준 것만 해도 쌀 한 섬’이 넘는다. 아침 여덟시부터 점심때까지 기계에 불을 넣어 하루 3만원 벌기도 어려우면서 아직까지 정 할아버지가 가게문을 닫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때 물어준 쌀을 생각하면 골이 나서’이기도 하다.
“요새 누가 튀밥을 먹어. 시골에 애들이 있어야 먹지. 먹을 사람이 없어. 옛날같이 애들 많을 때는 마당에 떨어진 것도 다 주서먹었었지. 지금은 애들이 없잖아. 그래서 요즘은 튀밥은 거의 안해. 다 물 끓여 먹을 거 볶아.”
정 할아버지를 도와 함께 일하는 김일순 할머니가 옆에서 거든다. 일은 별로 없어도,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라고 한다. 일이 없을 때는 김 할머니가 말동무도 되어준다. 김 할머니의 말이 끝나갈 무렵, 정 할아버지가 일어나 기계에서 불을 뺀다. 이제 다 볶아졌다는 신호다. 멍석을 깔고 입구를 열자, 긴장했던 ‘뻥’소리는 나지 않고 날카롭게 증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한번 주위에 온통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기계에서 나온 것은 옥수수나 쌀이 아니라, 둥글레차였다. 김 할머니의 말처럼, 겨우내 물을 끓여 먹기 위한 것이었다.
“10년 전만해도 뻥튀기가 많았지. 옥수수도 튀기고 쌀도 튀기고. 옛날에 기계 지고 다님서 했던 사람들은 논도 사고 그랬어. 그런데 요즘은 손님 자체가 없어. 저번 장에는 하루 종일 앉아서 기계 한번 돌리고, 2500원 벌어서 갔네.”
오늘 장은 지난 장에 비해 벌이가 좀 낫다. 아침 여덟시에 문을 열어 점심때까지 3만원 벌이는 했다. 한번 볶는데 2500원이니까, 열 번은 넘게 돌린 셈이다.
“지금은 그래도 좀 괜찮은디, 여름에는 좀 복잡혀. 한 겨울이라고 아무리 추워도, 와서 불만 올려 버리믄 좋아. 근디, 여름에 불 앞에서 기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래서 모타를 좀 달아볼까 했는디, 여기 전기가 안들어 와. 여기까지 전기 끌어오고 계량기 달고, 모타까지 달라믄 한 50만원 든다는디. 지금 내 나이가 일흔다섯이여 앞으로 튀밥을 하믄 얼마나 한다고 50만원을 투자하겄어.”
그래도 정 할아버지는 기력이 있는 한 이 가게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한다.
“돈은 안 되아도, 기왕에 가게도 있고 기계도 있으니까 안할 수는 없지. 장날 가게 문 닫혀 있으면 찾는 사람들도 있고, 그 사람들 봐서라도 안할 수는 없제.”
앞으로도 동계장에 구수한 냄새 끊길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직접 둥글레나 옥수수를 들고 가서 맛있는 차를 만들어 오는 것도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