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
한 마을 사람모두가 성당에 다니는 이유
관리자(2007-01-12 15:36:20)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한 종교만을 믿는 마을이 있다면?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집성촌은 자주 볼 수 있지만, 마을 사람 전체가 같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는 아마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진안에서 장수가는 중간에 오천 삼거리가 있다. 여기에서 우회전해서 한참을 들어가면 맨 끝 마을이 진안 성당 어은 공소가 있는 죽산리로, 바로 이런 마을이다.
100여 가구가 살던 동네에서 이제는 25가구가 사는 어은동 마을과 공소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와 내력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마을 레지오 단장을 맡고 있는 67세의 강길랑 씨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의 한 중심이 진안이었고, 이 마을 어은공소가 산 증인이라고 얘기한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의 북경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서 정약용, 정약전 형제에게 세례를 준 이후, 신해·신유·정해박해 등이 있었다. 특히 대원군 시절 1866 병인박해 때, 경기도나 충청도에 살던 신자들은 전라도로 박해를 피해 피난을 와서, 외교인과 자연히 격리되어 산 속에서 무리지어 살게 되었다. 장수 팔공산, 임실 성수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4개나 있는 진안지역에 숨어들어와 산을 개간하여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전, 옹기장사 등을 하였다.
천주학쟁이 하면 ‘옹기장이’를 연상할 정도로 옹기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옹기를 굽는 가마들이 주로 깊은 산골에 있었고, 굽는 사람들 역시 천민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숨어들 수 있었다. 옹기를 지게에 짊어지고 돌아다니면서 팔아 생계도 유지하고, 포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안읍에 사는 92세이지만 아직도 건강한 함연국 할아버지의 육성증언에 의하면, 충남 서천군 마산면 관포리 음산마을에서 살던 증조부 함성화가 진안 용담 방골로 피난을 왔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살다가 안정된 곳이 못되어 다시 진안면 반월리 삼바실의 아주 좁은 골짜기에 들어와 살았다. 주로 감자농사를 주식으로 하고, 나무를 해서 진안 읍내에 가서 팔아 겨우 연명을 하다 어은등 위 절골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한다.
절골의 도깨비 소 옆에 최덕효가 살았다. 어느 날 최덕효의 집에서 십자가상이 주위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이에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서로 박해를 피해 숨어사는 처지임을 밝히고 모시골에 모여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고, 공소를 시작하였다. 그때의 신자들은 함연국의 조부 함응서, 이사순, 이화서, 송사진, 이학수, 최덕효 등이었고, 당시 공소는 이학수의 집이었다. 1888년 어은동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신자들이 어은동으로 모여들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은 단위의 기초 교회 공동체이며, 같은 지역의 신자들이 모인 현장교회로 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1년에 정기적으로 두 차례 방문하여 판공성사를 집전한 곳이다.
신자들은 1년에 봄·가을 두 번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이를 판공이라 하는데, 부활절 앞에 갖는 것을 ‘봄 판공’,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받는 것을 ‘가을 판공’이라 한다. 판공은 일종의 신앙점검이고, 판공성사 때 신부는 ‘찰고’ 즉 교리시험을 가진다. 오는 12월 22일이 올해 어은동 공소의 판공일이다. 그 날은 진안본당 신부님이 어은 공소에 오시고 신자들이 전부 모여 미사를 한다.
1909년에 지어져 100년의 역사를 지닌 어은공소 건물은 소박한 슬레이트 건물로 근대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 문화재 제 2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亞字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맨 처음에는 백운면 미제에서 나는 돌너와 지붕이었으나, 1967년 새마을 운동 당시 슬레이트로 교체했다. 지을 당시 나무는 머우내 앞산과 장수 천천 오리골에서 베어 지게로 날라다 지었고, 지금은 초라한 시골집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 근방에서 굉장히 크고 상징적인 건축이었다.
어은동 공소의 시작은 박해시대의 어려운 시대상황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 심심산골에 모인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신자끼리 결혼을 하게 되고, 한 마을에서 생활을 하게되어 결국 천주교人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주로 충청도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왔던 분들의 후손들이 어은동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여러 번 어은공소회장을 역임한 67세 강길남 씨는 배추 150포기를 김장하고 있었다. 두 부부, 큰 아들네, 그리고 세 딸네집 모두 5가족이 먹을 김치의 양이다. 65세의 부인 혼자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김치를 담고 있었다. 51세의 한영석씨는 전형적인 건장한 산골아저씨로, 현재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벼농사, 고추, 한봉, 채소 등 여러 가지 농사를 지으며 독실한 신앙심으로 자족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전·현직 공소회장뿐 아니라 마을사람 모두 마음이 부자인 분들이다.
오로지 신앙만을 위해 여러 대에 걸쳐 살던 터전을 떠나 피난을 하다 결국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신앙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일이 요즘 우리들에게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