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
가벼운 뉴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관리자(2007-01-12 15:25:58)
절묘한 제목이다.
악마와 프라다라……. 돌비 스테레오, 깨끗한 화면으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았다. 상업적 생존 능력 그리고 그 포장이 우리 몸과 마음이거늘 어찌 눈이 즐겁지 않겠는가. <섹스 앤 더 시티>의 뻔뻔한 뉴욕 노처녀들이 입고 신고 들고자 하는 욕망의 극장판인 <악마는 …>의 감독이 같은 사람이란다. 그는 뉴욕이란 도시 그 자체가 기호이며 볼거리라는 것을 꿰뚫는 여우. 상류층은 프라다를 걸치고, 영화대중을 형성하는 계층들은 철지난 세일코너에서 뭘 건질 게 없을까 고민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뉴욕 패션 매트릭스의 아키텍쳐, 여성지 편집장 메릴 스트립. 인물의 다중성이 문제지 고품격 커리어우먼이 무슨 악마? 이 명품은 악마적 집념을 가졌지 악마는 아니다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마적 집념을 가져야 한다). 캐릭터 창조를 위한 익숙한 이분법에 맞게, 촌닭 앤 헤서웨이가 44사이즈가 넘는 건 죄악인 동네에 뛰어들어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선천적으로 명령하기를 좋아하는 악마가 내리는 일방적 지시와 무시의 적응이 끝날 무렵, 그녀에게 프라다가 지급된다. 불손과 희롱과 냉소를 견디는 감정노동에 대한 보상. 세상은 그렇다. 좌회전은 비보호지만 우회전은 자유니까. 권력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자발적 협력의 단계를 거친 끝에 파리행 비행기를 타지만, 장르적 관습이 만드는 결말은? 비상했던 촌닭의 연착륙 아니겠는가. 일방적 복종에서 호혜적 상황으로 관계로 역전될 때,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가난한 애인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 프라다가 뉴요커의 필수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새로운 신문사에 안착한다. 솔직히, 대배우의 원맨쇼 그리고 뉴요커들의 기호 외에는, 메릴 스트립 말투로 댓츠 올(that’s all).
우울한 뉴욕, <택시 드라이버>
부시의 공화당이 깨졌단다. 사막 전쟁 탓이리라. 뉴스를 본 후, 공유폴더에서 다운받은 (공짜는 아니다)‘명품’<택시 드라이버>를 보기 위해 곰플레이어를 작동시킨다. 시뮬라시옹 시대에 모니터로 보는 이 격조 있는 복제품은 정체감이 희박한 시절에 제작된 70년대 미국의 사회문서, 꽤 선명한 화질. 마틴 스코시즈가 리메이크한 20세기 우울한 돈키호테는 재즈 선율 속에서 부옇게 흐린 차창 밖 뉴욕의 밤을 응시하는데. 월남전 퇴역 군인 트레비스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전쟁은 그에게 국가 개념이나 충성을 내면화 해주지 못했고, 그는 다만 잠이 잘 안 올 뿐. 스물여섯 살 저학력 실업자가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심야 택시운전. 무표정한 얼굴의 이 젊은 운전수는 밤샘 운전을 하고도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포르노 상영관에 들러 청춘을 죽이지만 계속 되는 전전반측(輾轉反側). 살아남은 자의 눈에 비친 씬시티는 마약, 매춘 등 전쟁터보다 나을 게 하나 없는 풍경이다. 내가 이따위를 지키려고 이렇게 등에 상처를 입었나, 그런 독백은 없다. 그래서 스코시즈다.
욕망의 집합체인 이 거대도시의 고립된 예비군은 사창가에서부터 대통령선거 캠프까지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환대란 없다. 그래도 이 하층민 사내에게 운수 좋은 날이 있어 브로드웨이에서 천사를 발견하게 되는데, 찰스 팔렌타인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베시가 바로 그녀. 트래비스는 이 우아한 여인에게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만 그녀는 그의 불면에 자장가를 불러주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어울리지 않아요."란 앙큼한 고양이의 말 한마디에 해병대의 자존심이 부러진 그는 매그넘 44를 포함 다섯 자루의 권총을 구입한다. 비애에 잠기되 모욕에 민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하층민의 자세일진데…….
희망이 사라진 소돔, 해병대 군복을 입은 (이건 째로 걸치는 밀리타리 룩이 아니다) 청년은 침묵의 뉴욕을 향해 말을 걸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자 그는 거울놀이와 함께 데쓰노트를 적어 간다. 그‘혼자 말하기’의 와중에 무시로 소화전 물이 터지는 동네, 골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콜걸들 사이에서 열두 살 창녀를 만나게 되는데. 파란 눈을 감추는 커다란 잠자리 안경에 돼지굽 신발을 신은 더러운 천사 아이리스가 바로 그녀 (아! 불세출의 조디 포스터다). 별자리 운세를 믿는 어린 창녀를 통해 이 도시의 타락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알게 된 트레비스. 그는 이제 시간 죽이기에서 적극적 쓰레기 퇴치로 작전을 변경, 도시를 정화하기로 결심한다.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깍은 그는 베시가 몸담고 있던 캠프 후보를 암살하려다 계획이 실패하자 사창가로 달려가 포주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침묵 속에 놓쳐버린 말들이 총구를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막판은 살벌하다. 총상 끝에 살아남은 그는 어린 창녀를 구출한 신문 가십 영웅이라는 얼떨떨한 대접을 받는데. 큰 악은 쓸지 못하고 겨우 팸프나 죽이고서 의인이 되는 나이브한 영웅주의라니. 센치멘탈하고 충동적인 영웅을 만드는 명품 감독의 포스는 어깨에 힘을 뺀 데서 나온다.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는 스코시즈-젊은 애들을 사막의 전장에 보낸 부시는 9시에 잔다는데-의 캐스팅 자체도 예술이다. 아, 대배우가 될 두 사람 로버트 드 니로와 조디 포스터를 병치하는 천재의 감식력이이라니. 그가 살려낸 히스테리 환자 로버트 드 니로가 뿜어대는 긴장과 불안에서 명품 캐릭터를 본다. 억세게 돋아나오는 수염을 면도해 날것을 억제한 듯한 파릇한 턱 그리고 턱선, 건들면 폭력이 터져 나올 듯한 일촉즉발의 눈에 주재하는 광기, 금지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술, 증오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눈, 폭풍과 파도를 몰고 올 듯한 밀어붙이기 전의 깡마른 몸이 주는 에너지, 배우의 ‘아우라’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30년이 흘러도 명품은 명품인 것이다.
가보고 싶은, 뉴욕
촌닭과 참전자가 선택한 파국은 각기 다르다. 누구도 기도하지 않던 70년대 뉴욕의 시스템에 총을 겨누던 의사(擬似)영웅이 사라진 30년 후, 대학신문 편집장 출신 아가씨는 21세기 뉴욕의 패션 고공에서 중력을 버리고 안착하지만 사유보다는 가벼운 관찰로 끝내고 만다. 그래서, 20세기 뉴욕은 무겁고 21세기는 가볍다. 프라다를 걸친 21세기 악마가 세공사의 모습이라면 뉴욕의 택시 운전수 이야기는 장인의 불무질과 무두질. 70년대의 뉴욕은 가해자들에게도 상처는 있다는 묵시록적 반성 정도는 있지만 21세기 뉴욕은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박살나던 9.11을 벌써 잊은 듯하다. 결국 둘 다 그런대로 다시 살아가는 미국적 낙관주의, 그들에게 탄식은 짧다. 그렇다. <택시 드라이버>로‘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막을 내리는 지점인 것이다. 75년에 끝난 베트남 전쟁 이후로 더 이상은 <대부>와 같은 스케일의 ‘남자의 시대’도 저물어 가는 것. 미국 영화가 77년에 <스타 워스>로, 78년에 <슈퍼맨>이라는 ‘애들 이야기’로 가는 것이 그 증거. 그러니 그 뒤에 나오는 <탑건>이나 <람보>는 당연히 짝퉁이다.
현금수입이 있고 정년이 보장된 나지만, 나는 FTA를 강요하는 미국이 싫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와 무역과 무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나라의 심장, 뉴욕이 가 보고 싶다. 달팽이 모양의 구겐하임이나 메트로폴리탄 같은 명품 미술관이 있는 뉴욕 거기서 사막의 위장 군복을 입은 제대 청년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프라다 걸친 악마들이 휴식을 취하는 레스토랑에서 밀러를 마시고 싶다, 한번쯤은.
아 참! 스코시즈 할베가 만든 새 영화 <디파티드>가 곧 개봉한단다. 부디, <갱스 오브 뉴욕>이나 <에비에이터>에서 잃어버린 아우라를 만회하시기를. 아카데미 감독상 받으시길. 가벼운 뉴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절묘한 제목이다.
악마와 프라다라……. 돌비 스테레오, 깨끗한 화면으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았다. 상업적 생존 능력 그리고 그 포장이 우리 몸과 마음이거늘 어찌 눈이 즐겁지 않겠는가. <섹스 앤 더 시티>의 뻔뻔한 뉴욕 노처녀들이 입고 신고 들고자 하는 욕망의 극장판인 <악마는 …>의 감독이 같은 사람이란다. 그는 뉴욕이란 도시 그 자체가 기호이며 볼거리라는 것을 꿰뚫는 여우. 상류층은 프라다를 걸치고, 영화대중을 형성하는 계층들은 철지난 세일코너에서 뭘 건질 게 없을까 고민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뉴욕 패션 매트릭스의 아키텍쳐, 여성지 편집장 메릴 스트립. 인물의 다중성이 문제지 고품격 커리어우먼이 무슨 악마? 이 명품은 악마적 집념을 가졌지 악마는 아니다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마적 집념을 가져야 한다). 캐릭터 창조를 위한 익숙한 이분법에 맞게, 촌닭 앤 헤서웨이가 44사이즈가 넘는 건 죄악인 동네에 뛰어들어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선천적으로 명령하기를 좋아하는 악마가 내리는 일방적 지시와 무시의 적응이 끝날 무렵, 그녀에게 프라다가 지급된다. 불손과 희롱과 냉소를 견디는 감정노동에 대한 보상. 세상은 그렇다. 좌회전은 비보호지만 우회전은 자유니까. 권력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자발적 협력의 단계를 거친 끝에 파리행 비행기를 타지만, 장르적 관습이 만드는 결말은? 비상했던 촌닭의 연착륙 아니겠는가. 일방적 복종에서 호혜적 상황으로 관계로 역전될 때,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가난한 애인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 프라다가 뉴요커의 필수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새로운 신문사에 안착한다. 솔직히, 대배우의 원맨쇼 그리고 뉴요커들의 기호 외에는, 메릴 스트립 말투로 댓츠 올(that’s all).
우울한 뉴욕, <택시 드라이버>
부시의 공화당이 깨졌단다. 사막 전쟁 탓이리라. 뉴스를 본 후, 공유폴더에서 다운받은 (공짜는 아니다)‘명품’<택시 드라이버>를 보기 위해 곰플레이어를 작동시킨다. 시뮬라시옹 시대에 모니터로 보는 이 격조 있는 복제품은 정체감이 희박한 시절에 제작된 70년대 미국의 사회문서, 꽤 선명한 화질. 마틴 스코시즈가 리메이크한 20세기 우울한 돈키호테는 재즈 선율 속에서 부옇게 흐린 차창 밖 뉴욕의 밤을 응시하는데. 월남전 퇴역 군인 트레비스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전쟁은 그에게 국가 개념이나 충성을 내면화 해주지 못했고, 그는 다만 잠이 잘 안 올 뿐. 스물여섯 살 저학력 실업자가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심야 택시운전. 무표정한 얼굴의 이 젊은 운전수는 밤샘 운전을 하고도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포르노 상영관에 들러 청춘을 죽이지만 계속 되는 전전반측(輾轉反側). 살아남은 자의 눈에 비친 씬시티는 마약, 매춘 등 전쟁터보다 나을 게 하나 없는 풍경이다. 내가 이따위를 지키려고 이렇게 등에 상처를 입었나, 그런 독백은 없다. 그래서 스코시즈다.
욕망의 집합체인 이 거대도시의 고립된 예비군은 사창가에서부터 대통령선거 캠프까지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환대란 없다. 그래도 이 하층민 사내에게 운수 좋은 날이 있어 브로드웨이에서 천사를 발견하게 되는데, 찰스 팔렌타인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베시가 바로 그녀. 트래비스는 이 우아한 여인에게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만 그녀는 그의 불면에 자장가를 불러주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어울리지 않아요."란 앙큼한 고양이의 말 한마디에 해병대의 자존심이 부러진 그는 매그넘 44를 포함 다섯 자루의 권총을 구입한다. 비애에 잠기되 모욕에 민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하층민의 자세일진데…….
희망이 사라진 소돔, 해병대 군복을 입은 (이건 째로 걸치는 밀리타리 룩이 아니다) 청년은 침묵의 뉴욕을 향해 말을 걸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자 그는 거울놀이와 함께 데쓰노트를 적어 간다. 그‘혼자 말하기’의 와중에 무시로 소화전 물이 터지는 동네, 골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콜걸들 사이에서 열두 살 창녀를 만나게 되는데. 파란 눈을 감추는 커다란 잠자리 안경에 돼지굽 신발을 신은 더러운 천사 아이리스가 바로 그녀 (아! 불세출의 조디 포스터다). 별자리 운세를 믿는 어린 창녀를 통해 이 도시의 타락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알게 된 트레비스. 그는 이제 시간 죽이기에서 적극적 쓰레기 퇴치로 작전을 변경, 도시를 정화하기로 결심한다.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깍은 그는 베시가 몸담고 있던 캠프 후보를 암살하려다 계획이 실패하자 사창가로 달려가 포주들과 총격전을 벌인다. 침묵 속에 놓쳐버린 말들이 총구를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막판은 살벌하다. 총상 끝에 살아남은 그는 어린 창녀를 구출한 신문 가십 영웅이라는 얼떨떨한 대접을 받는데. 큰 악은 쓸지 못하고 겨우 팸프나 죽이고서 의인이 되는 나이브한 영웅주의라니. 센치멘탈하고 충동적인 영웅을 만드는 명품 감독의 포스는 어깨에 힘을 뺀 데서 나온다.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는 스코시즈-젊은 애들을 사막의 전장에 보낸 부시는 9시에 잔다는데-의 캐스팅 자체도 예술이다. 아, 대배우가 될 두 사람 로버트 드 니로와 조디 포스터를 병치하는 천재의 감식력이이라니. 그가 살려낸 히스테리 환자 로버트 드 니로가 뿜어대는 긴장과 불안에서 명품 캐릭터를 본다. 억세게 돋아나오는 수염을 면도해 날것을 억제한 듯한 파릇한 턱 그리고 턱선, 건들면 폭력이 터져 나올 듯한 일촉즉발의 눈에 주재하는 광기, 금지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술, 증오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눈, 폭풍과 파도를 몰고 올 듯한 밀어붙이기 전의 깡마른 몸이 주는 에너지, 배우의 ‘아우라’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30년이 흘러도 명품은 명품인 것이다.
가보고 싶은, 뉴욕
촌닭과 참전자가 선택한 파국은 각기 다르다. 누구도 기도하지 않던 70년대 뉴욕의 시스템에 총을 겨누던 의사(擬似)영웅이 사라진 30년 후, 대학신문 편집장 출신 아가씨는 21세기 뉴욕의 패션 고공에서 중력을 버리고 안착하지만 사유보다는 가벼운 관찰로 끝내고 만다. 그래서, 20세기 뉴욕은 무겁고 21세기는 가볍다. 프라다를 걸친 21세기 악마가 세공사의 모습이라면 뉴욕의 택시 운전수 이야기는 장인의 불무질과 무두질. 70년대의 뉴욕은 가해자들에게도 상처는 있다는 묵시록적 반성 정도는 있지만 21세기 뉴욕은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박살나던 9.11을 벌써 잊은 듯하다. 결국 둘 다 그런대로 다시 살아가는 미국적 낙관주의, 그들에게 탄식은 짧다. 그렇다. <택시 드라이버>로‘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막을 내리는 지점인 것이다. 75년에 끝난 베트남 전쟁 이후로 더 이상은 <대부>와 같은 스케일의 ‘남자의 시대’도 저물어 가는 것. 미국 영화가 77년에 <스타 워스>로, 78년에 <슈퍼맨>이라는 ‘애들 이야기’로 가는 것이 그 증거. 그러니 그 뒤에 나오는 <탑건>이나 <람보>는 당연히 짝퉁이다.
현금수입이 있고 정년이 보장된 나지만, 나는 FTA를 강요하는 미국이 싫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와 무역과 무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나라의 심장, 뉴욕이 가 보고 싶다. 달팽이 모양의 구겐하임이나 메트로폴리탄 같은 명품 미술관이 있는 뉴욕 거기서 사막의 위장 군복을 입은 제대 청년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프라다 걸친 악마들이 휴식을 취하는 레스토랑에서 밀러를 마시고 싶다, 한번쯤은.
아 참! 스코시즈 할베가 만든 새 영화 <디파티드>가 곧 개봉한단다. 부디, <갱스 오브 뉴욕>이나 <에비에이터>에서 잃어버린 아우라를 만회하시기를. 아카데미 감독상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