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
"불편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지상강좌로 만난 건축가 이일훈
관리자(2006-12-27 14:40:16)
우리안의 미래 연수원 상징조형물_2006 정리 | 최정학기자
‘공간’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떤 공간을 만들고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어떤 방식의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관심은 ‘입는 것’이나 ‘먹는 것’에 비해 크지도 않을뿐더러, ‘투자수단’으로 그 가치가 변질되어 버린지도 오래다.
문화저널은 우리가 늘 상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터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공간’에 주목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얼마 전 전북환경운동연합이 주관한 ‘초록시민강좌’에 강사로 나선 건축가 이일훈 씨의 강의 내용을 옮겨 싣는다. 1978년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이일훈 씨는 ‘채나눔’이라는 건축설계 방법론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건축가. 그의 작업은 분방한 상상력과 의미를 절제된 건축어휘로 표현한다는 평을 듣는다. ‘탄현재’, ‘궁리채’, ‘작은 큰집’, ‘가가불이’ 등의 주거건축을 통해 나눔을 구현해왔고, ‘기차길옆 공부방’ 이라는 사회성 짙은 작업과 천주교 ‘자비의 침묵 수도원’, ‘하늘담은 성당’과 불교 ‘도피안사 향적당’ 등 종교건축을 빚기도 했다.
건축가가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건축주를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한번도 건축주를 설득시켜보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설득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축가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건축주의 의도를 알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건축주와 함께 삶의 방식을 상의하고 나눠서, 이를 건축으로 표현해주는 것이죠. 건축주와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사람이 건물을 통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건축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짓겠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삶의 덕목을 잘 정리하고 이것을 소화해내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건축에 대한 생각의 결과물이 바로 ‘채나눔’ 운동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경운동의 성과는 점차 가시적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환경운동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채나눔 운동’도 환경운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채나눔 운동’의 세 가지 덕목은 ‘불편하게 살기’, ‘바깥에서 살기’, ‘늘려 살기’입니다. 물론 이것은 크게 호응 받지 못합니다. 불편하게 살자는데 누가 호응하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점 때문에 앞으로 ‘채나눔 운동’을 더욱 줄기차게 주장할 것입니다.
바람직한 덕목이라면, 이것에 대한 ‘응원’이 적을수록 더욱 분발해서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전주환경운동연합의 회원이 전주시민 60만 명이라면 환경운동연합 해체해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불편하게 살기
불편하게 살기는 여러모로 생각해볼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세대 환경문제는 모두 편하게 살려고 하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편안함을 마다하고 불편함을 좋아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현대는 무조건 더 편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편리함은 환경이나 생태적 관점에서는 죄악이 되기도 합니다. 환경과 관련된 모든 판단 기준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안목이 되어야 함에도 당장의 편리만 취하느라 모르는 척 하는 것이죠.
때문에 불편하게 살자는 것은 이 시대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수정하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주거환경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모든 것은 편하게 살기의 부산물과 부작용입니다. 그것의 해결을 위해 ‘불편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것이죠. 그리고 불편하게 살자는 것은 불편해도 상관없을 영역을 자꾸 넓혀서 주거 양식의 보편성을 바꾸어보자는 것입니다.
참을만한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건축의 영역과 해법이 다양해짐은 물론 같은 집에서 변주되는 경험이 풍부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깥에 살자
현대 건축물은 기본적으로 공간의 성격이 내부지향적입니다. 상자형 모양의 비슷비슷한 건축물이 세계 어느 지방이나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여기저기 퍼져있죠. 이런 공간들은 에너지가 더 들어가건 말건, 눈비 막아주고 온도조절이 가능한 것을 추구합니다. 현대의 건축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서 돈만들이면 어떤 공간이라도 완벽한 실내공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동물원 하나 정도도 내부공간화 할 수 있죠.
사람들도 될 수 있으면 내부공간에서 생활하려고 합니다. 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김치냉장고의 발명입니다. 일상생활의 동선을 연결해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내 공간 속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일년 내내 인위적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일은 이제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내부화된 일상, 밖을 잃은 일상을 살면서 일부러 자연을 찾아 나가는 불균형한 일상이 우리가 사는 방식입니다.
물론 이렇게 살면 편합니다. 하지만 답답합니다. 방과 방 사이에 외부가 끼어 있든지 외부화 된 공간을 방들이 둘러싸고 있든지, 건축물 속에 내부와 외부가 서로 균형있게 공간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실생활의 다양한 행위를 더 높게 보장합니다. 이렇게 가능한 대로 외부공간을 많이 마련하자는 것이 ‘밖에 살기’의 근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환경 얼마나 좋습니까. 봄과 가을이면 밖에서 살기 정말 좋습니다.
늘려 살기
현대 건축의 특징 또 하나는 동선을 짧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조금이라도 편하기 위해서입니다. 합리적 동선이란 언뜻 짧을수록 좋다는 오해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짧은 동선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축소된 동선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보통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동선을 아주 짧게 한다고 해도 얼마나 짧아지겠습니까.
제가 주장하는 늘려 살기는 동선을 늘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불편하자는 것입니다. 가옥의 구조는 삶의 방식을 지배합니다. 가만 누워서 손만 뻗으면 뭐든지 해결된다면, 그거 돼지나 다름없는 삶 아닙니까. 이런 생활 방식 때문에 현대의 온갖 병들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동선이 길어져야 합니다. 일터의 휴식 동선과 거주하는 공간의 이동 거리를 될 수 있으면 길게 만들고 많은 움직임을 유도하는 공간 구성이, 늘려 살기의 핵심입니다.
늘려 살기는 또, 공간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똑같은 면적의 공간을 만들 때도 넓게만 만들려고 하지 말고 좁은 것 여러 개를 연결시킬 수도 있고, 같은 면적이면 좁고 길게 만들어 구성을 달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갈 때 긴 연결 복도를 지나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늘려진 공간은 단순한 길이의 증가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늘어난 것이므로 그 사이에서 사는 사람의 사유와 의식의 폭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으로 공간을 나누면 각각의 공간이 홑켜가 됩니다. 우리나라 주저공간인 아파트를 보면 남향만 제외하고 옆은 남의 집이고, 뒤는 복쪽입니다. 또 방 앞에는 방이고, 방 옆에도 방입니다. 이런 공간은 일년 내내 자연환기가 안됩니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방에는 바람도 안 들어옵니다.
공간을 나누고 각각의 공간이 홑켜가 되면 각각의 공간에 햇볕이 들고 바람이 잘 통하게 됩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바람과 비와 햇빛이 통하는 공간, 이웃공간과 마주하는 공간은 얼마나 중요한 경험입니까.
(홑켜 공간: 모든 집의 공간 구성이 홑켜로 되어있다. 홑켜는 방들끼리 내부 벽체가 겹치지 않고 벽체 2면 이상이 외기에 직접 접하는 것을 이른다. 그럴 경우 자연환기·자연채광에서 탁월한 효과를 취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 건축은 대부분 홑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홑켜 배치는 공간의 전개 방식이 마치 한 줄로 이어진 실타래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타는 것에는 신경을 많이 쓰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공간에는 신경을 안 씁니다. 너무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집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이 주는 편안함이어야 합니다. 건강한 집이 좋은 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좋은 집은 건강한 집이고, 그 건강함이란 햇빛 잘 들어오고, 바람 잘 통하는 공간입니다.
현대 건축은 비만의 건축, 탐욕의 건축입니다.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가치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공간은 좁고, 춥고, 덥고, 불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은 자연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건축물은 어떤 것을 짓건 그 근본은 똑같습니다. 주거 시설과 특별한 목적을 가진 시설이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양과 서양, 목적과 주거 등의 이분법적 사고는 건축에 있어서도 들이대서는 안될 잣대입니다. 단지 상황과 필요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옷을 예로 들자면, 양복과 한복이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옷감을 바느질해서 만들고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다만 모양이 다른 것은 재료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재료가 다르면 자연스럽게 바느질의 기법도 달라지게되고, 그 모양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건축의 본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