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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 |
이 시대의 독립토사 '귀농인' 요새 멧되지는 잘 크고 있는가?
관리자(2006-12-27 14:38:18)
여기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현재는 유기농 살림꾼으로, 아이 키우는 엄마로, 정읍 동막골에서 희망을 일구고 있는 정현숙 씨. 마흔네 살에 낳은 ‘어진이’의 교육 이야기며, 된장, 청국장, 산야초 향기에 묻힌 산골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내가 주인인 인생”에 행복을 느낀다는 그에게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지 앞으로 연재될 ‘잘사는 이야기’를 통해 들어봅니다.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정현숙 씨는 서울에서 10년 넘게 국어선생님을 하다가 “젊은 시간을 몸땅 바쳐 밥벌이 하는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농촌으로 들어가 지금은 정읍, 전주한살림 대표와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귀농운동본부의 마을도우미교육 프로그램을 다녀왔다. 첫날 저녁 자기를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에 벌써 귀농인들의 온갖 애환과 행복, 뿌듯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저 귀농한지 한달 됐거든요.’ 하는 새댁에서부터 ‘10년째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하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또 경남 함양에서부터 강원도 화천, 오색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귀농인들이 동창회라도 하듯 한해 농사를 뒤로 하고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농사가 너무 힘들어 결국 부부가 갈라서고 말았다는 드문 케이스는 이런 곳에 나타날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일까. 일이 너무 힘들다는 얘기도, 수입이 적어 먹고 살기가 막막하다는 얘기도, 또는 태풍에 병충해에 올해 농사를 말아먹었다는 얘기도 그냥 아름답고 흐뭇한 후일담으로 들린다. 농사 수입이 적으면 부부 중 한 사람이 나가서 벌고, 흉년이 들어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댁에서는 찌질이 잔챙이들을 모아 즙을 내 팔았더니 웬만큼 만회가 되더라고 하는데, 멧돼지가 곡식을 다 먹어 허탈한 사람보고 동네 아저씨 인사가 ‘자네 요새 멧돼지는 잘 크고 있는가?’ 하더라는 기막힌 사연이 나와도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입가에는 그냥 웃음이 묻어 있다. 가슴에 저마다 사연을 안은 그 웃음이 어찌 그냥 웃음이기만 하리오만 오랜만에 느긋하게 온천에 모인 귀농자들은 만주벌판을 달리다 잠시 돌아온 독립투사처럼 모처럼 동지들을 만난 반가움에 웃고, 한 해 농사 잘 짓고 잘 버텨 준 다른 귀농인들이 고마워서 웃고, 힘든 한해를 무사히 넘기고 이 자리에 선 자기 자신이 대견해서 웃는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에 몸 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손 흔들고 돌아서 각자 자기 꿈과 애환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우리 가족도 올해 9년째 농사를 지은 귀농 농부다. 농부가 평생 농사를 지어도 모내기를 한 오십 번 하면 잘 하는 것이라는데 연륜으로 치자면 상당한 연륜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 길 말고 달리 가고 싶은 길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매일 눈 뜨고 일어나면 여전히 내 앞에는 하얀 백지가 있고 나는 그 위로 발자국을 찍어 새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데 앞이 안 보일 때가 가끔 있다. 귀농해서 첫해는 100만원 주고 임대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고추도 심고 고구마, 참깨, 콩 부지런히 심었어도 수입은 꽝이었다. 이듬해는 집 뒤 비탈밭 얻어 쉬엄쉬엄 도라지도 심고 메밀도 심었는데 여름에 잠깐 오라는 데가 있어 곁눈질 좀 했더니 그해 농사 역시 꽝으로 끝났다. 가진 땅도 없고 집도 없는 시골살이가 막막하고 불안하던 그해 가을, 정말 기적같이 지금 이 곳에 땅을 사고 동네 빈 집을 빌려 이사를 오게 되었다. 제대로 된 밭도 아닌 찔레며 칡이며 가시덤불 우거진 산비탈에서 풀을 헤집고 장독대를 마련하고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단풍드는 산골짜기에서 꿈같은 농사를 짓고 된장을 만들고 세상을 만난다. 산비탈 우리 땅에는 오래 된 감나무가 많고, 은행나무, 밤나무, 뽕나무, 산딸기에 두릅이며, 미나리며, 쑥이며, 산나물들이 온통 흔하다. 구태여 농사짓지 않아도 거둘 것이 많고 약삼아 먹을 것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독 많은 먹감나무는 봄이면 새순이 꽃보다 곱고 가을이면 온 산을 붉게 물들여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따기도 어렵고 따도 구태여 뭐 하기도 어려운 작은 감들을 그래도 농사라고 곶감도 만들고 감식초도 만드느라 가을이면 한철 바쁘다. 올해는 감이 너무 흉년이라서 감도 따다말다 그냥 두고 있고 곶감도 예년보다 훨씬 적게 깍았다. 덕분에 일이 좀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아직도 숱하게 나무에 매달린 감들은 틈틈이 따서 홍시로 먹거나 감식초 만드는 데 쓰겠지만, 한겨울 나무에 붙어있는 언 감은 추운 날 툭툭 쳐서 주워 먹기도 한다. 밤나무 두 그루, 7,80년 되는 은행나무 셋, 유월이면 오디벼락을 맞게 하는 뽕나무들. 뽕나무는 워낙 잘 자라는데다 빈 자리 구석구석에 씨가 떨어져 1,2년 사이에도 새로 자라는 어린 뽕나무를 많이 본다. 어디 그뿐이랴. 온 산은 자연 그대로 우리 밭이요 정원이요 과수원이다. 내년부터는 그 동안 심어 둔 자두나 살구, 복숭아도 조금씩 열릴 것이다. 된장을 만들고 청국장을 만들어 살림살이에 보태오던 생활에서 올해는 나의 농사 이력 가운데 또 하나의 전환을 이룬 해였다. 4년 전에 심은 차나무에서 처음으로 잎을 따고 차 만드는 것을 배워 차를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쑥차며 뽕잎차며 산야초차도 고루 만들어 보았다. 웅덩이와 마당 한 켠에 백련을 심고 작약뿌리를 한 자루 구해다 심은 것도 특기할만한 일에 포함된다. 농사와 함께 섬세하고 오묘하고 참으로 그윽한, 차와 야생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일하는 틈틈이 철마다 피는 꽃을 보며 잠시 일을 잊기도 하고, 지인들과 좋은 차를 나누고 함께 마실 때면 농사꾼답지 않게 과분한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우리 차나무에는 조롱조롱 차꽃이 피어 있다. 내년 된장에 필요한 메주도 다 삶아 매달았으니 이제 신통찮은 배추밭만 마무리하면 올해 농사는 대충 끝나는 셈이다. 이웃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사는 것이 태평성대라고 말한 분이 공자였든가 맹자였든가. 아무튼 들앉아 있으면 세상사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긴 겨울, 눈이라도 내려 길이 끊어지면 더욱 고요해진 산 속에서 세상도 나를 잊고 나도 세상을 잊는다. 그리고 아직 겨울이 채 깊지도 않은데 우리는 벌써 내년 봄 씨 뿌릴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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