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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 |
춤명인 장금도 "나는 놀든 안코 춤춘 것만 봐"
관리자(2006-12-27 14:35:27)
슬픔도 기쁨도 모두 마음에 있더라 문화저널이 전라도 땅에서 살아온 명인 명장들의 삶을 기록하는 '명인열전'을 시작합니다. 세월의 더께 위에 켜켜이 쌓인 명인 명장들의 삶과 예술을 통해 전라도 문화의 원형을 찾고, 사라져 가는 전통의 정신과 삶이 얹힌 소중한 문화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는 소중한 작업입니다. 첫 번째 '명인열전'은 민살풀이의 대가 장금도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장금도 할머니의 구술을 가필없이 정리하였지만, 겹치는 부분과 개인의 사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은 편집하였습니다. 어려운 용어나 사투리도 이해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주석은 생략하였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갈 '명인열전'의 사진은 사진작가 유백영씨가 함께 니다. 1928년 군산 중앙동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열두 살에 군산 소화권번에 들어가 춤과 소리를 배웠다. 이명곤, 김창용, 이기원, 김준섭, 민옥행 등에게 소리를, 최창윤, 김백용, 도금선 등에게 춤을 배운 그는 소리보다는 춤으로 명성을 날렸다. 스물아홉에 소리와 춤을 작파한 후 30년 동안 춤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장금도라는 이름이 다시 알려지게 된 건 198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3회 ‘한국의 명무전’을 통해서다. 다시 만난 선생의 춤은 숙명적인 예인의 삶에 삭고 녹아든 춤사위였다. 장금도의 살풀이춤은 흰 수건을 쓰지 않아 ‘민살풀이춤’이라고도 한다. 여든을 앞둔 나이. 장금도의 춤은 개인의 삶과 애환을 넘어 역사의 질곡을 담아내는 시대의 몸짓이며, 곰삭은 혼으로 관객의 숨을 멎게 하는 예술의 경지다. 방정맞게 초하룻날 났댜                 내 지금 나이가 원 나이로 해서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물질라고 허는디 닭 울었다고 허드랴. 그러먼 초하룻날로 쳐얀다고. 근디 아버지가 기집애가 방정맞게 초하룻날 그랬다고 그믐날로 쳐얀다고. 그래가꼬 시방 말허자먼 일흔여덟. 그렁게 배암띠로 혀. 옛날에는 많이 개렸잖아. 그리서 지금 일흔여덟요. 지금은 거그가 중앙로라 하데요. 일정 때 소화통에서 태어났지. 친정어머니는 전남 곡성이래. 아버지는 경상도 상주라든가. 확실치는 않어. 우리 집 형제간 들이 통 일가가 없어요. 아버지가 3대 독자고 내 위로 아들하나 딸 하나 낳고 12년 만에 나 낳고 밑으로 동생들 혀서 6남맨디 다 죽고 둘만 남았어. 나하고 내 밑으로 여동생하나 남았어. 아버지는 키가 커단 했어. 잘 기억에는 없는디 집에는 잘 안 있고 왔다 갔다 했어. 집안 명이 짧아서 오빠 장개를 일찍 보냈는디 남매 놔 놓고 죽었어. 우리 언니도 죽고. 막내 동생은 제주도 살어. 둘 살고 다 죽었어. 하나는 학도군 나가서 죽었어. 제주도 사는 동상이 이걸 반대혀. 이번에 텔레비전 나간 것 보고 전화 왔어 근성을 못 버린다고. 어떻게 기분나빠하는가. 내가 그렸어 너는 먼 돈 갔고 시집갔냐. 내가 결국은 오빠 남매들하고 그 식구들 맡아갔고 그렸지. 공부허는 것도 어려워서 그렸지. 김영주씨라고 가야금 병창도 잘허고 인물도 예쁘고 그 양반이 돈대주고 그려서 시작혔어. 우리어머니를 꼬셨드만. 갈치먼 벌어먹고 살수가 있다. 그 양반이 권번 때 뒤를 다 대줬어 학비를. 열두 살 때지. 그 양반 딸이 있는디. 가는 맨날 옷을 좋게 입고 댕기고. 나는 맨날 심부름만 시켜. 왜근가 혔지. “너도 권번 들어가면 옷도 잘 입혀주고 심부름도 안 시키마” 그러대. 그 바람에 들어갔지. 우리 친구하나가 어찌케 짓궂은가 기생들 인력거가 지나가믄 따라감선 놀렸지. “찌룽 찌룽 나간다. 기생아가씨 나간다. 안 비키면 다쳐” 놀리는 소리를 허지. 나는 안코 그 옆에 있는 애가. 그서 더 안 들어갈라 했는디. 하도 꼬시는 바람에. “그럼 니가 옷도 자처럼 존놈 입고 그렇게 헌게 그렇게 혀라 돈도 많이 벌고 식구도 많고 헌게” 뭔 소린가 그때는 이해가 안 가등만. 그 옷잘 입혀준단 바람에 사실은 넘어갔지. 맨날 심부름 나만 시킹게. 가는 안 시켜 옷도 좋게 입고. 그때는 주릿대 치매라고 그려, 이렇게 옆으로 쨈매고 머리 질게 땋고, 댕기 좋은 놈 드리고, 이뻐 그렇게 허면은. 그 시암내서 갔더니 결국 이렇게 되았네. 김판례라고 딸은 아니고 조카딸인디 나보다 나이가 많어. 먼저 배웠고. 우리어매하고 그 집 어매하고 친혀. 나도 그 집 가면 먹을 것도 줘쌓고 그런게 맨날 그 집만 가지고. 설 때 세배허먼 돈을줘. 잘 헌게 좋습디다. 그렁게 그이 말을 잘 들었지. 내가 그렇게 이렇게 되았소. 말 잘 듣고 착혔었거든           제일 먼저 소리를 배웠지. 이명곤이라고, 나중에 알고 본게 이기원씨 조카라고등만. 승무는 최창윤씬가, 이름은 지금 내가 시방 소리선생 이름하고 엇석비석혀서 잘 기억이 안나. 김백용선생한데 검무, 화관무, 포구락 많이 배웠어. 최선생한테는 승무 하나만 배웠어. 김준섭선생은 소리, 민옥행선생은 독선생으로 배웠어 소리를. 그 선생한테 돈을 많이 줬지. 집으서 대려다가 독선생으로 소리는 배웠는디 지금은 못혀. 작파 헌지가 언지간디. 사설을 다 잊어버렸어. 가야금 산조는 이운주씨한테 배웠는디. 그런게 목이 좋으니까 가야금 산조를 띠고 나면 병창을 배우는디 못허게 헙디다. 병창을 허게되면 목 배린다고 못허게 혀. 살풀이는 도금선씨한테 배웠어. 그 양반이 나를 찾아가지고 불러서 추라고 혔어. 왜냐믄 공부가 지그반이 끝나면 저 아래채로 놀으라고 나가라고 허거든. 춤추는 사람만 그 방으서 배워요. 나는 놀든 안코 춤 배울 시간이면 춤 춘 것만 봐. 창문으로 이렇게 보면은 못 보게혀. 나가라고 혀. 근디 내가 선생 말도 잘 듣고 착헌디 춤추는 것은 자꾸 보고 싶어서 이렇게 주저앉았다가 또 보고, 또 보고. 하도 뭐라고 해도 안 된게 김영주씨를 부르더래요. 그 양반한데 자가 아무래도 춤은 소질이 있는 갑다고 배울 라냐고. 물어봐서 이왕 갈치는 건게, 똑떨어지게 혀라. 그란다고 나중에 그 양반들이 얘기헌 소리 들었어요. 그리서 간게 “너 춤 배우고 싶으냐” 얼른 대답을 헐 수가 있어야지 가만 있응게. “너 배우고 싶으면 배워라 춤 배울래” “예” 그 말 떨어진 게 승무선생이 “그러먼은 너 저그서 본거 내가 안다” 그거여. “한번 춰 바라” 사실 승무는 돈 안줬는디 췄어. 나중에 그 양반이 불러다 놓고 그러드래. 배운 애보다 자가 났다고. 그래서 배웠는디 살풀이는 도금선씨가 자청해서 살풀이 춤 춰라 그랬지. 돈 벌어먹는 것은 검무네 승무네 포구락 화관무 같은 것 다 배웠어도 승무 갖고 벌어먹었지. 큰 경사 집이나 이런데 검무는 아무래도 둘은 불러야 혀, 쌍으로 추니까. 허지만 승무는 혼자 추자녀. 그렇게 벌어먹었는디. 환갑집 같은디 각 기관장 큰 경사 있을띠 살풀이를 춘게는 승무는 안 혀도 돼. 살풀이 춤 하나갖고 돈은 많이 받아먹지. 나는 나이가 어려 많이 달라고도 못허지만 선배 된 양반들이 많이 받아줬어. 배울 때는 몰랐는디 소리 허고 춤 허고 섞어서 헌게 돈을 벌었지. 그리가꼬 어떻게 춤을 춘 것이 소리보담 춤으로 이름을 얻어 버렸어. 열 여살 까지 배웠는디 나갈라면 머리를 얹혀야 나가. 쪽을 져야 나가잖여. 그전에는 기생 머리 얹고 이런 사람들은 이름 있는 사람들, 돈이 많다든가 이름 있는 사람들 이름 빌려가지고 머리를 얹혀. 긍게 터놓고는 못살지 본인만 알고. 그전에는 젊은 사람도 판사 검사 허먼 영감 영감 그렸어. 나 젊었을 때만 혀도. 그래가꼬 머리들 얹혔어. 허가를 못 내가꼬 안 나댕기는디. 공연헌 것처럼 헐 때 군산극장에서 가서 한번 승무 춤을 췄어. 그래가꼬 환영을 받았지. 그담에는 공회당이라고 있어. 거기도 한번 가기도 혀고 그랬는디, 오빠한티 뒤지게 두디려 맞었어. 열다섯 살인가 그렸는디, 대환영을 받았는디, 나는 몰르고 고깔쓰먼 잘 안 뵈는지 알었는디. 오빠가 알어가꼬 뒤지게 맞았어. 오빠는 그 뒤로 죽어버렸어. 그 양반이 일찍 병이 들었어. “너한테 큰 죄를 짓고 간다” 그럼서 “애들을 내가 죽으면 느그 언니를 주지마라, 데려간다고 허면은 니가 키운다고 혀라” 먼 소린가 당초에 이해가 안가. 나이가 어리고 왜 나보고 키라고 헌가 나중에 커서 본게 이해가 가등만. 정신대 안갈라고 시집갔지                   열일곱 살 때 시집갔지. 그때 일정 때 큰 애기들 열다섯 살만 넘어가면 뽑아 가잖아 정신대라고. 거기가면 창녀나 한 가지라 더만 그런 바람에 시집을 갔지. 나 시집간 이가 부여 사람여. 부여로 시집갔어. 거그 가 살다가 영 못 살것어. 등불 밑에서 양 울어 싼게, 중신에미가 경상도 최뭣인디, 그 양반이 중신을 혀갔고 살게 됐는디. 그이 남편도 서천이여. 그 집허고 우리 집 허고 신작로 길 건너에 살었어. 대문 열먼 환히 비여. 서로가 알기는 먼자부터 알었지. 긍게 그이 말 듣고 그거 나오는 바람에 갔지. 시집을 가버린거여 아주. 중신에미가 해방만 되면 내보내 준답디다. “해방만 되면 나가그라” 그렸어. 갑자기 촌에가 가서 살란 게, 막 등불 켜 놓고 갑갑해서 환장 허것등만. 맨 날 여그만 오고 싶고 못 살 것 등만. 거그서 한 일 년 살고 애기 슬랑게 그 사람이 그렇게 안 미워져. 그렇게 미워, 뭐 사다준 것도 싫고, 먹으란 것도 싫고. 애기 슬랑게 안 밉대. 머슴애를 낳는디, 안산다고 헌게 애기를 뺐는디야 또. 근디 어린 마음이라도 애기는 주기가 싫어. 그리서 살았지. 부여서 1년 넘게 살고, 애기 배갖고 나왔지. 배갖고 와서 나댕겼어. 원체 벌이가 없고 헌게 나댕겼어. 그렇게 애기 낳고도 다니고 그때는 위로를 해주대요. 식구는 많고 먹고 살길은 없고, 어떻헐 거여. 말허자먼 그이 딸 하나가 나하고 몇 살 차가 안나. 나하고 같이 놀았당게 밤에 등불 켜놓고. 거서 같이 공부헌다고, 머슴애도 여자애도 같이 놀았지. 지금도 잘혀. 그이네 집은 부자여. 그 때만 혀도 옛날아녀. 나 시집 간게 집 한 채 좋게, 대문 좋게 집을 시어머니가 지어줬어요. 살으라고. 여그는 헌 집인게 새집서 살라고. 낭중에 본게 해방되았다고, 그 중신엄니가 해방되면 내보내 준다고 했는디. 찾아왔드라고 그리서 내가 “해방되면 군산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가만있어 해방됐으니까 메 칠만 참아라, 여태 참았는디 그걸 못참것냐” 애 선지도 몰랐는디, 어쩐지 그렇게 싫었는디 그 사람이 안 미워져. 겸상해서 밥을 같을 먹었다고. 밥을 절대 같이 안 먹었는디. 그이가 안 미웁대. 재미없는 세월만 보내버렸어. 답답허고 그런 건 모르것는디, 여그서는 친구들이 많고 그랬는디.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물 동우 하나 깨먹고 시집살이 한번 안 혔어. 물질로 갔는디 못 일어선 게 걸음이 발만 띠면은 흔들려서 못 가것어. 동이 꽉 잡고 살살 걸어 보라드만. 그러다 깨먹었지. 딴 집 같은먼 시어머니가 난리 난다드만. 깻으먼 들어 가야는디 안가. 도로 시암으로 갔어. 물동이 깻어요 그랬더니 그 옆에서 대꼬가드라고. “너 뭣허고 인제 오냐, 아가” 옆으서 “물 항아리 깨먹고 혼나까 싶어서 그런대요” 그렁게 시엄마가 니가 물도 안 질어 먹고 전등불 밑에서 살던 사람이 이렇게 살고 안되았다. 그러더니 호롱불을 켜줘요. 지금 말허자먼 한 두어 시간 켜줬나. 집은 대문이 크고 좋고, 집은 보면 살고 싶은디 아주 거그 살고 싶진 않아. 다니로 가서 보면 집은 탐나. 해방되고 나와서 같이 살았어. 일을 나가면 내가 구루마 불러갔고 나가면 애기 젖 돌은게 애기 대리고 갈란 게 구루마 두 대를 불러야혀. 젖을 줘얀게 그때는 우유도 없었잖아. 시간나면 젖먹이고 그랬지. 애는 하나 딱 낳고 못나요. 그 양반은 거그서 왔다갔다 혔어. 그 아들들이 딸이랑 나 용돈주고 가고 그려 인제는. 어머니 그 어렸을 때 고생허고 했다고. 크고 보니까 같이 늙거든. 엊그저께도 왔는디 서로 늙었응게. 차라리 안 온게 낫것다 싶어. 며느리 보기가 부끄러. 허게 허게 허기도 그렇고, 허쇼 허기도 그렇고. 지사 때나 명절 때나 느그들이 가라 그려. 저번 날 나와서 “어머니 건강허세요” “예에” 뭔 어머니 말만 어머니. 차라리 안 온게 낫것다 그렸어. “엄니라 어떻게 어머닌디 오지 말라 그려요” “그렇다는 말여” 그렸어. 춤 추고 소리헌게 돈을 더 주대 애기 놓고 나서는 터놓고 해버렸지. 한번은 이리 가서 하숙을 허고 보니까, 애기 있지, 유모 데리고 가야지, 하숙비 대야지, 여그만 못혀. 며칠 있어 본게 못 허것 드라고. 그리고 군산서 했지. 요정 있잖아요. 명월관, 문화관, 만수관, 천일관, 갑종요정만 댕겼지. 환갑잔치라든가 경사 있는디. 제일 많이 댕긴디가 지금 ‘대야’라고 허죠. 지경, 김제, 만경, 부안 요리 많이 댕겼지. 춤추고 소리허고 긍게 돈을 더주지. 악사들 다 안 데리고 라도 장고, 거문고, 가야금, 북, 이런 거 있잖아요. 요정에는 손님 서너 명만 와도 악사를 불러요. 북을 쳐 줘얀게 춤 안 춰도.   요정 많이 놀러 댕긴 손님들은 모시를 풀로 싹 대려입고 나가면 만지도 안혀. 옷 버린다고. 요즘 영화보고 그러면 막 붙들고 그러등만. 나는 안 예뻐서 그런다고 허지만 딴사람도 보면 그렇게는 안혀.       그전에는 이렇게 터놓고들 안혔어. 군대식여. 선배가 뭔 말허면 들어줘야지, 말 대답허고 그걸못혀. 허라 먼 허란 대로. 나가도 권번장이 가끔 한번 요정을 빙 돌아요. 그래가꼬 술 먹고 흥청거리고 그러면 혼나. 한 달에 한 번씩 삭회를 허는디. 칭찬받을 사람은 칭찬허고, 혼날 사람을 혼나고. 또 한 달에 누가 돈을 제일 많이 벌었는가. 일등 이등 삼등 사등 이렇게 알리고. 사람마다 표를 만들어가지고, 그 표를 명월관가면 명월관으로 밀어놔. 긍게 어디 있는지 다 알지. 지금은 영화 나온 것 보면 거짓말 많이 혀. 영화를 보면 막 붙잡고 안고 흔들고 굉장혀. 그러들 안혔는디. 그렇게는 안허는디. 나 헐때는 글 안혔는디 먼 짓인지 모르것다 그려. 권번장이 박재오씨라고 여잔디. 일본말을 잘혀. 그리가꼬. 서장 허고 쌈헌 사람은 박재오씨 하나뿐여. 나중에 소리 시험보잖여. 서장이 일본사람이잖여. 시험을 봐요. 1류 2류 3류까지 있어. 그건 얼마 가지 않았어. 이건 뜬 말인지 모르것는디 서장 하나가 좋아 혔어. 조홍도라고 얼굴이 이뻐. 근디 소리는 못혀. 목이 나빠 갔고. 그 시험 봤는디, 그 사람이 3류가 되았어. 그래 얼마 가다가 없어졌지. 일본말로 아무개 허고 부르면 “하이” 허고 무대로 올라가. 가서 단가를 헌다든가 춤을 춰. 그러먼 다 똑같이 배웠는디 목이 그렇게 안 좋아 3류가 되었거든. 그러더니 없애버렸어. 그때는 술집을 카페라 그렸어. 여자들 의자에서 술 먹고 노는디. 우리 친구가 거 있어서 거서 만나갔고 얘기 좀 했는디. 그것도 걸려갔고 혼났어. 기생이 큰 것인가. 박재오씨 그 양반이 어떻게 심허게 혔는가먼, 요리해서 전주, 이리, 남원, 해서 군산이 최고 무섭게 했어. 할머닌디 그렇게 싸나. 해비상(줄넘기)허고 걸리먼 뒤지게 맞고. 비석치기 같은거, 윷 놀고 공기 같은거 밖에는 안혔당게. 뛰어 댕기는 건 질색이여. 가다가 비가와도 한쪽 모퉁이에서 섯다가지, 담박질 허지 마라고. 못 뛰게혀. 뒤지게 맞어. 한 달에 한 번씩 허는 삭회 때 니가 술집 작부노릇을 해라. 그럼서 사람들 많은 디서 우세를 시켜버려. 허는 처세나 예의범절은 잘 배웠어. 학교 문전도 안 가봤어. 권번에서 배운 게 다여. 가난허게 살은 게 그렸지. 권번 월사금도 김영주씨가 다 대주고. 나중에 내가 다 갚았어. 내가 생각허기는 그 양반이 이름이 있거든. 도금선씨도 유명혀. 그렁게 내가 딱 선정이 된 것 같여. 누가 새로 나왔는디 불러 보까요 그러면 불러. 그렁게 선전이 되아버렸어. 선배들 잘 못 사귄 사람들은 오래 터덕거려. 내가 아무리 춤을 잘 춘다 허드레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것어. 선배들이 내가 소리도하고, 춤도 추고, 헌수도 허고, 헌수를 드릴 줄 알기 땜에 많이 불렀어. 그 두 양반 땜에 후딱 선전이 되가지고 성공을 헌것 같어. 그 양반들은 존 양반들인디 가버렸어. 밤나 보먼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뭣이 좋아, 한나 좋은 것도 없는디. 막 춤을 추고 들어와도 “욕 봤네! 좋을 때다” 뭔 소린지 모르것대. 지금 대야라고 거길 갔는디 거기는 꼭 임방울 씨를 불르등만. 그 양반이 “금도야” “예” “너 허고 나 허고는 몇 년간은 춤 안 추고 소리 안 혀도 허것다. 내 쑥대머리 오천칠백번은 혔것다” 했는디 또 허라허고 또 허라허고 그렁게. “너도 춤 안 춰도 허것다” 그렸어. 그때는 충청도 악사들이 많았어. 충청도 멋도 없는 동네라고 그렸는디. 다 할아버지들이여 그때는 악사들이 다 늙었어요. 춤이고 뭐이고 배우긴 잘혀. 멍청히서 글지, 춤이고 뭣이고 꼴등은 안혀. 선생들한테도 한 번도 안혼났는디, 해비상허다가 종아리한번 맞았지. 걸음도 달음박질을 못허게혀. 아침밥 먹고 갈라면 승무 부채들고, 검무 그놈 칼 들고 가는디. 고대로 갔다 고대로 와야지 해뜩해뜩 허고, 왜 어렸을 때는 파딱파딱 뛰어서도 잘 가잖아요. 길가다가도 그렇게도 못허게 허고. 허지 말란 짓을 혔다고 종아리 한번 맞았지. 사정없이 때리등만. 살풀이는 시간 정해놓은 춤이 아녀 소리 헐때는 자세가 반듯 혀야 허고, 삐틀어지면 안 되고. 뺑둘러 앉아서 허먼, 까불고 그런 애들이 있어. 그러먼 웃음이 나와. 저도 맞고 나도 맞고. 그렇게 까불어쌓고, 신작로를 가도 파딱파딱 뛰어쌓고, 권번에서는 그걸 못허게 헌게, 가네 엄니가 “금도는 시집가먼 잘 살턴디 너는 어찌먼 그렇게 방정맞고, 너는 산중에 숯꾼 사내한테 보내야 헌다” 했는디 가가 청장한티 시집 갔당게. 복 이란 건 따로 있어요. 가가 나보다 한 살 더 먹고, 그 집 가서 아들만 셋을 나줬어. 복은 타고 나야 돼. 동생이 여상 당길 땐가. 나갔다 들어온 게 “남원산성 올라가...” 그러고 있어. 너 이리와 봐라 너 지금 뭣했냐. 여상 댕겼는디 배웠디야. 교장이 좋아해서 가야금선생, 무용선생도 있고, 갈치드랑게. 낭중에 교장선생을 알은게 “교장선생님 거그서 춤도 갈치고 소리도 배우고 가야금도 갈치고 그려요?” 그런 게 그런디야. “그러면 거그가 권번이네요?” “권번은 아니지” 학교서들 배운다고 허대요. 우리가 나가잖여. 나가먼 시간제로 가. 첫 번에는 예를 들어 시간에 만 오천 원 허먼 다음은 만원씩혀. 그러먼 두세 시간 놀아도 열 시간씩 끊어줘. 대개가 단골손님아녀. 몇 시간씩 달어줘. 도금선씨는 원래 거그 다녔는디. 나댕기는 사람인디. 원래는 승무 춤을 잘 췄대요. 거시기랑 친구라 허드만 최승희. 승무 춤은 악사들이 많기 땜에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잖아. 살풀이는 조금만 있어도 허거든. 추는 사람은 흥이 안나도. 그러니까 그거 허먼 좋다고 허라고. 살풀이춤은 사실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근디 오래 추먼 보는 사람이 힘들어. 그렁게 잠깐 잠깐, 20분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추는디. 아무리 잘 추는 춤이라도, 춤 속을 아는 사람들은 보는디, 모르는 사람들은 못 봐요. 쌈박 허기는 8분정도가 적당헌디. 장단을 안 넘겨주면 끝까지 춰야혀. 승무 춤은 출라면 악사들이 있어야 잖어, 거그선 못 춰 살풀이춤을 추지. 그전에는 손수건 넣고 다니잖여. 춤을 추다가 때봐서 이놈을 내가 던져 놓잖여. 찾아가서 앉어서 입으로 물어주면 굉장히 대환영여. 내가 그걸 안 허면 이렇게 수건을 던져주는 사람이 있어. 살풀이는 도금선 선생이 갈쳐줄 때 그 말을 혔어요. 내가 헌대로 허지 말고, 이게 싫으면 이렇게도 혀보고, 저렇게도 혀보고 그러라고. 옛날에는 살풀이라고도 허고, 굿거리라고도 허고, 흔튼춤 이라고도 허고 그렸어. 지금 사람들 예쁘게 춰도 손이 올라가고, 그런 거 보면 아녀. 다리를 살풋 들으라 그렸어. 근디 다리도 번쩍 들고. 그전에는 ‘오이씨 같은 발’이라 그렸어. 발놀림을 볼 랑게. 한번 그냥 들어줘. 살짝 보이게. 춤 속을 아는 사람은 괜찮다고 허는디 모른 사람은 싱거.     서울 가서 3, 4년 잘 혔어                   내 나이 마흔일곱에 할아버지 돌아가셨지. 나 젊을 때만 혀도 환갑만 넘어가도 만수무강헌다 그렸어. 회갑 잔치 때, 헌수 드릴 때, 만수무강 끄트머리 꼭 찾아주거든. 애 놓고 나서 댕김서 운이 좋아서 그랬던지, 서울 가서 3년 4년 잘했어. 서울 갈 때 기차 타러 가먼, 역전에서 쬐깐헌 것이 안 떨어질라고, 말도 못허는 것이 울고. 그렇게 가슴 아파요. 서울 역전에서 우리 집까지 갈라 먼, 종로3가 까지 전철 타고 가야허는디. 걸어가요. 속상혀서. 옆에 어른들이 어쩐 일로 엄마가 애를 띠어놓고 간다 그러고. 지금 같으면 내가 죄받아서 이렇게 고생 허는가 싶어.  6 25나서 내려왔지. 걸어왔어. 선배들이 올라오라 해서 올라갔지. 그 양반들이 나를 생각해서만 헌건 아녀. 그전에는 소리만해서는 돈이 얼마 안 나와. 춤을 춰야지 돈이 나오지. 그래서 올라오라고 했든가 벼. 그전에 군인들 장교들 오잖여. 지들이 뭘 알거여. 그리도 춤추고 나면 돈을 막 뿌리고. 서울은 춤이 좀 개벼. 살풀이라도 좀 빨러. 어깨도 들썩들썩 허고. 선배들이 시키데, 그렇게 허라고. 나중에 여그 내려온 게 춤 배렸다고, 또 고치라 그러대. 살풀이춤은 너무나 까불어도 못써. 수건 들고 추는 살풀이는 경상도 살풀이라 그렸어, 나 배울 때만 혀도. 내 춤을 민살풀이라 그러대. 수건을 안 들고 추잖여. 지금도 살풀이 추는 것 보면 손가락을 다 이렇게 해. 수건을 들고 춰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해야는디. 스물아홉에 아들 땜에 작파혔지. 아들이 핵교를 댕길 때, 군산서는 외출을 통 안댕겼는디. 법원에 댕기는 이가 잔치가 돌아왔는디, 어떻게 오라고 해 싸서 갔는디, 그 집 아들이 우리 아들하고 한 반였는가벼. 긍게 “야 느그 어머니 우리 집 와서 춤췄다” “우리 엄니가 왜 느그 집 가서 춤춰” “췄다” 긍게 탁 때린 게, 코피가 났디야. 그 이튼 날 누가 찾아 왔드라고. 애기 엄니 나오라고. 문을 열고 나간게 그 여자여. “여기가 댁이요” “어쩐 일이요” 그란 게 그 말을 허드란게. 이만저만 이리혔다고. 그리놓고는 애 아버지도 보내긴 보내도 항상 껄적지근 혔거든. 우리 동생도 그렇게 반대를 허고. 그리서 작파 혔어. 아들땜시 작파했다 다시 시작 어떻게 찾아 왔는가 몰라. 정범태 그 양반이. 전화가 왔드라고. 동생인디 죽고 없어요. 안된다고 그랬더니 안 가먼 우리 집으로 온 디야. 그리서 나갔더니, 이렇게 팔만 벌려 보래야 한번만. 그러먼 안다고. 귀신이등만. 꼭 그 속으로만 놀아나서. 벌린 게 다 벌리래야. 그렁게 “욕봤소” 이렇게 들었다 놨는디 알았디야. 그 질로 계속 연락 와서 나갔지. 전주서도 어떻게 알고 연락이 오고. 그거 나가고 나서 일정 때 헤어진 친구들 만났지. 다섯이나 만났는디 셋 죽었어. 가먼은 공연 끝나고 만나서 놀고 그런디. 늙은 게 다 죽등만.   절대 텔레비전 안 나간다 그랬거든. 낭중에 보니까 텔레비전에 나왔등만 며느리 친구가 글더래 “니네 시어머니 텔레비전에 나와” “먼 텔레비전에 나와” “나와서 춤췄어 잘 추드라” 그러드래. 몰래 2박3일로 놀러간다 그러고 옷은 한복집에 매껴 놓고, 갈 때 찾아가지고 가니 몰르지. 감쪽같이 몰랐는데 나중에 다 알았더라고. 텔레비전 나와 갖고. 그렁게 비밀이 없어. 정범태씨 전번에 만나갔고 “도둑” 그랬어. “그리 좋잖아” 그려 “그렇게 헌게 이렇게 나와서 구경도 허지. 지금 집구석에서 가만히 썩을 것인디” 험선 되레 큰소리여. “도둑 안녕하세요” 그려 내가. 그담에 진옥섭이가 여기 찾아왔지. 인제 질 나서 자꾸 나댕겨. 인제 알고 댕긴 게 차라리 편한 헙디다. 승무나 검무 같은걸 추라면 잊어서 안 돼. 살풀이는 다른 춤 다배우고 나서 살풀이춤을 추거든. 이 춤은 본인 맘에 있는 대로 가락에 맞춰서 추먼되야. 장단을 잘 치면 나도 모르게 좋은디. 그게 안 맞으먼 힘들어. 악사들 잘 만나면 좋아. 소리만 크다고 잘 치는 게 아녀, 잔가락만 잘 친다고 잘 치는 것도 아니고. 나 허고 맞어야혀. 국악원에 통 안 나갔는디 군산 국악원이 쓰러져 간다고 긍게 시장 마누라하고 우리하고 친목계를 했어. 그 양반이 여자라도 가야금 산조를 혀. 우리가 들어가서 살리자 혀서 자청해서 갔지. 한 달에 한 번썩 가지. 소문은 다 나등만. 서울서 토요일 날, 일요일 날 갈쳐. 쌩댕이는 못 갈치고 선생들. 송미숙이랑 신명숙이. 딴사람은 보먼 아는디 이름을 잘 모르것어. 늙은 게 기억력도 없어지고, 하나 모르것어. 요전에 프랑슨가 어딘가 갔었는디. 어디가든지 가먼은 내 고향사람들이 좋등만. 그렇게들 좋아헐까. “지금도 쪽진 사람이 있네” 그럼서. 외국 사람들은 암것도 모름서 박수 하나는 잘치등만. 강선영씨. 무대에서 만나먼 말잘 안허는디. 각자 분장실 따로따로 쓴게. 이물게 안혔거든. 비행기갈 때 옆에 앉고, 거그가서 이물어졌어. 확실히 서울사람들이 멋은 없어. 여든세 살  먹었다는 디. 젊데. 형님이라고 혀야혀 내가. 형님이라고 혀놓고 난게 이물어지데. “내가 형님을 사겨 놓고 난게 적자가 났어” “먼 적자” “키도 쬐깐허지, 얼굴도 젊지, 그런 양반보고 내가 형님이라 그렁게 적자지” 서울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 말 못 알아들어. 내가 사람을 못 사겨. 첫 번에 봐갔고는 말도 안혀. 이놈의 장단이 어찌나 긴지 맨 첫 번에 국립극장에 나갔을 때 얼떨떨허대. 악사들이 춤을 한번만 맞춰보자 혔어도 괜찮았을 텐데. 이놈의 장단이 길기는 긴디. 도대체 안 넘겨줘. 어깨는 빠질라고 허고, 사람 죽을 뻔 혔어. 우리며느리는 “남 안돌려 먹고 도독질 안혔응게 그렇게 헐 필요가 없어요” 그래. 가네 집이 짱짱헌디, 거그서 반대 헐지 알았는디, 우리 아들보다 났어. 지 아들들 설득시키고, “할머니는 지금은 그게 뭔 숭이간디요. 못해서들 야단인디” 손지며느리가 그려. 서울서 공연했을 때 다 왔었어. 우리 아들이 꽃다발도 가져오고. 깜짝 놀랐지. “할머니, 할머니, 죄송해요. 맨 지집애만 낳아서” “너는 팔자 늘어났다. 앞으로 여자 세상이드라” 나는 시집가서 머리맡을 좀 걸어갔다고, 자리가 넓은디, 하늘같은 서방이 자는디, 요망시럽게 머리맡을 지나갔다고, 시어머니한테 혼났어. 시집살이는 안 시켰는디. 너무나 어리고, 전깃불 훤헌 디서 살다가 호롱불 밑에서 산다고...... 추우를 그렇게 타요. 여름은 더워도 못 참것고, 그런디 병을 앓은 뒤로 더헌 것 같은디. 지금도 약 먹어요. 죽드락 먹어야 한디야. 약 먹기도 정성 드려야 먹것등만. 괜찮다고는 허등만 몰르것어. 아침 새벽바람을 쐬면 재발헌다고 그려서 며느리는 낮에 돌아다니래. 아파트 여그를 뱅뱅 돌으리야. “야, 사람들이 숭봐 얼마나 오래 살을라고 저런다고 숭봐” “남이야 숭을 보든 말든 무슨상관요” “니가 어른해라” 그려. 이제 이물어진게 야가 잔소리를 허드랑게. 그리도 잘혀. 잠 안 오는 병이 있어가지고, 요새는 해도 짤릅고, 그런다고 거실서 지그들이 노는디, 헐 말이 없어. 딸자식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다고 혀. 딴사람들 보면 딸 허고는 이야기를 허는디. 아들 허고는 헐 말이 없어. 종일 텔레비전만 봐 눈만 아프고. 서이 다 가만히 시골각시들 마양 그러고 있어. 우리 아들은 뭔 말 물어보면 대답이나허고 말도 잘 안혀. “어머니가 말혀요. 내가 들어줄게요” 그려. 딸 있는 사람들은 참 부럽드랑게. 어디가든 딸 있으면 제일 좋아. 옷이 있어도 계에서 관광간다는디 그러면 사주거든. 딸은....... 내이름 장금도는 본명이여 장금도가 본명이여. 곗돈 떼먹고 도망도 못가. 이름 하난디, 일정 때 다 이름 갈았잖여. 좋다고 안 갈았어. 다 댕겨봐야 금도란 이름이 없어. 비단금자 복숭아도자. 나 기생시켜 먹을라고 이름도 그렇게 지었나 보다 그려. 늙어가꼬 허고 싶은 거 있으면 뭐 있나. 우리 집이 보통 30을 못 넘기고 갔는디. 나이가 너무 많이 먹었응게, 송미숙이한테 그려. “나 뭐 시켜줄라고 헌거 (현재 장금도씨 무형문화재 선정 준비 중) 성의는 고마운디 맥없이 쌩고생허지 마라” 그려. 좀 더 젊었을 때 같으먼 허것는디...... 인제사 바래서 뭣헐거여. 서산에 해졌당게. 안 작파 허고 허야는 건디. 내가 잘못혀서 그런 것을 누구를 원망혀. 그것도 내 팔자지. 자꾸 돌이켜 돌이켜. 그려도 그것이 순간뿐이여. 그때 계속 혔으면 고생도 덜 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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