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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 |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 [1] 80's
관리자(2006-12-27 14:31:12)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전북문화의 지형을 읽는다. 문화에 대한 인식과 문화정책이 급변하면서, 전북의 문화판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모습이 변했다. 1987년 창간호를 발행, 그동안 우리지역 문화의 흐름을 관통해온 문화저널이 창간 19주년을 맞아 시대별 문화환경을 점검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로 시기를 나눠, 지역문화의 한복판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그 시대를 회고하는 자리였다. 각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쟁점들을 짚어보고,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우리 지역의 문화가 구소련 붕괴나 IMF 등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있었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맞물려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각각의 시대가 안고 있던 문화에 대한 고민과 시각 역시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1980년대 집담회에서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현재 오히려 문화에 대한 진지성과 열의는 찾아보기 힘듦을 안타까워했고, 1990년대 집담회에서는 사회주의권 붕괴와 IMF로 인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가졌던 혼란과 고민들을 엿볼 수 있었다. 2000년대를 점검하는 집담회에서는 젊은 문화일꾼들의 고충을 들어볼 수 있었다.     각각 시대별로 진행되었던 집담회를 정리하여 싣는다. 1980년대의 문화담론, 아직도 유효한가? “시대적 거대담론이 인간 개인의 내면을 앞선 시대” 참석자 곽병창: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백학기: 시인, 영화배우 겸 영화감독 송만규: 전북민예총 회장 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 진행 김정수: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 실장 일시: 11월 7일 오후 7시 장소: 스펠바운드 ●김 정 수  반갑습니다. 평소에 자주 뵙는 분들이라도 이렇게 좌담회 형식을 통해 만나 뵈니까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듭니다. 지금도 여전히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계시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80년대 활발했던 문화운동 현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시의 화두랄까, 그 때의 시대상황 속에서는 독재와 민주화를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모두들 당시 문화운동 최일선에 계셨던 분들이시기에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80년대 문화운동 양상을 자연스럽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운동의 조직화, 현장으로 나가다 ●송 만 규  80년대는 정치적으로 크게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있던 해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80년대 중반이 되자, 사회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세력들이 조직화 되었죠. 문화운동도 민중운동세력들과의 연대에서 조직화되고 현장운동화 해나가는 시기였습니다. ●김 정 수  일반적으로 80년 광주가 정면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접근했던 것이 시고, 그 다음 소설, 연극 순이 아니었나 생각되는데요. ●곽 병 창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연극이 가장 발 빠르게 대응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광주에서는 들불야학의 후신들이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주역으로 참여를 했었어요. 이들 중에는 도청항쟁의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고, 감옥에서 고문당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죠. 이중에 살아남은 이가 박효선이라는 분인데, 이 분이 극단 ‘토박이’를 곧바로 창단해서 그 때 광주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연극화해서, 광주항쟁의 실상을 알리는데 앞장섰지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김 정 수  광주의 경우 민주화운동의 현장이라는 특수성이 있었기에 전주 쪽 양상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요, 어떻습니까? ●곽 병 창  살아온 시절들의 여러 상황에 대한 표면적인 언급을 해야 할지, 내성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지 심경이 복잡하네요.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이른바 변혁운동의 일선에 서있던 분들이고, 문화예술을 통한 변혁운동에 온전히 투신했던 분들인데, 저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못되고, 80년대를 정면으로 언급하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닫힌 시대에서 열린 시대로, 그 대가는 컸다 ●김 정 수  백학기 선생님은 80년대 문학운동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난민시를 만든 주역이면서도 90년대 갑자기 영화배우 되기를 선언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했는데요,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이 얘기를 좀 해주시죠. ●백 학 기  70년대는 닫힌 시대였어요. 1970년 전태일로 비롯된 억압의 시작은 79년 10월 궁정동 사건으로 막이 내렸는데요. 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된 80년대는 열린 시대를 지향하면서 내면적으로나 영혼적으로 대가를 참 많이 치룬 시대였죠, 아까 지적하신대로 80년대는 열린 실천의 시대를 지향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실천문학운동의 일환으로 지역 문화예술이 활성화됐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제일 먼저 문학이, 그것도 시운동이 제일 앞장섰다고 봐야겠죠. 이 지역 시인들이 중심이 된 남민시 동인은 그렇게 태동했습니다. 남민시 1집은 ‘들 건너 사람들’이었는데, 이후 문학과 미술, 마당극, 연극 등과 연계해 활동범위를 사회적으로 확장해가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에 저는 극장에 자주 가 있었습니다. 영화관이죠. 순수한 의미에서 사회적 활동 못지않게 영화를 몹시 좋아해 영화관에 살다시피 했는데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는 야심을 품은 때이기도 합니다. 81년 제 문단데뷔작이 <삼류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입니다. 이해되시죠. ●김 정 수  신정일 선생님은 현재 우리 땅 걷기 모임이나 황토현 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는 등 긴 호흡으로 일관된 일을 추구해 오셨는데, 어떻습니까? 80년대에 가지셨던 생각과 현재 생각, 변한 게 있습니까? ●신 정 일  원래 문학을 꿈꿨었는데, 문학은 안됐고, 80년대 초에는 거의 안기부 직원들과 기무사 직원들이 우리 가게에서 살다 시피 했어요. 제가 했던 느티다방에는 신동엽의 시가 전체 벽을 차지하기도 했었죠. 그때 글은 안 써지고, 우회적으로 문화운동을 하자고 생각해서 80년대 중반에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문화계에서는 우리를 개량주의자라고 하고, 안기부에서는 항상 감시를 받는 상황이었죠. 89년만 해도 황토현문화연구소에서 했던 여름문화마당에 정읍 안기부 분실장과 직원 둘이 와서 3박 4일간 텐트를 치고 같이 생활했고 그 뒤로 몇 년간은 나를 비롯해 우리 회원들이 요시찰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동학 운동을 했던 것이 자랑이 되는 세상입니다. 심지어는 동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내를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기도 해요. 동학에 대한 진정한 애정의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김 정 수  신선생님은 동학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쏟아왔었습니다. 곽병창 선생님도 동학에 관한 작품도 쓰고 관심과 활동을 많이 하셨고요. 과거의 민중봉기가 현대에 들어 관에서 전폭 지원하고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동학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으면서부터인 것 같은데, 신정일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동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나요? ●신 정 일  동학에 대해서는 70년대 문학을 꿈꾸던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둘째 아이 이름을 신동엽 시인의 장편 서사시 <금강>의 주인공 이름인 ‘신하늬’ 라고 짓기도 했고 김개남. 손화중의 기념비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덕진공원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00주년을 기점으로 동학에 대해 관심이 늘어나면서부터, 내가 굳이 활동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진정성에서 우러난 우리 역사나 특히 동학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곽 병 창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요. 정권도 바뀌었고, 예술을 하는 환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시기뿐만 아니라 적어도 한 동안은, 문화예술 현장에서 무엇인가를 바꿔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살아온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정일 선생님의 말씀처럼, 과연 무엇이 바뀌었나 하는 자조도 있습니다. 그 시절 독재정권의 후계자들이 만든 당에 대한 지지율이 지금 40프로에 육박합니다. 20년 전 변혁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후예랄까, 진정한 적통을 잇고 있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군부독재를 향한 투쟁, 미술로 분출 ●김 정 수  송만규 선생님 경우에는 지금 현재, 당시의 문화예술 운동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민예총 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곽벽창 선생님 신정일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드리자면, 예술운동이라면 사회가 변화면서 변화의 폭도 함께 가져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미술 쪽은 어떻습니까? ●송 만 규  논리적 바탕보다도, 그 시대 변화의 과정들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7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 겪었던 고통 등 내재되었던 것들이 80년대 들어서 전북 미술계에서도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83년도에 우리지역에 미술과 시가 만나는 ‘땅전’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 당시 미술인들과 문학인들이 만나서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김용택, 안도현, 강태형 등의 시인들과 미술인들이 모였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이런 집단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순수한 미술쪽에서는 ‘미술패 땅’이라는 동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동인에서는 우리사회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현장과 연대하는 활동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84년도에 소몰이 투쟁에 깃발을 들고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라던가, 이리 공단 내에 있는 노동운동 집단들과 연대해서 프로그램도 하고 지원도 하는 활동 등을 했었습니다. 당시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를 통해서는 사회단체들과 연대해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도 고민했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하다가, 87년도에 6월 항쟁을 맞이하면서 걸개그림이라던가 깃발운동, 때로는 현수막을 제작해서 공장이나 농촌 등에 설치하는 작업들을 많이 했고, 농한기에는 농촌 두레활동을 통해 농민들과 같이 미술프로그램도 하고, 같이 작품도 해서 한마당을 이뤄내는 일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김 정 수  미술을 가지고 농민들을 찾아가는 일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텐데요, 농민들과 어떤 형식으로 소통할 수 있었나 궁금합니다. ●송 만 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농민들과 풍물마당과 미술을 통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농민들한테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아니었고, 농민들이 할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토론을 통해 탈춤 제작 등을 했었던 것이죠. 지금은 뭐, 합법적인 체험마당이라던가 하는 활동을 통해 하는데, 그때는 물론 불법이었습니다. 개인창작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시절 ●김 정 수  그 때는 운동에 있어 명쾌한 방향설정을 할 수 있는 시대였다면, 현재는 그 당시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과거 80년대와 비교해서 현재의 양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송 만 규  당시에 소위 문예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예술성이나 창작성도 중요시했었지만, 개인보다는 사회가 요구하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 예컨대 사회 변혁을 위해 어떻게 내 몸을 불사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었던 시기였습니다. 화가들도 개개인의 자기 창작보다는 사회변혁을 고민했었죠. 지금보면 안타까웠던 것이 사회변혁에 너무 치중하다보니까 개인창작에 너무 등한시했던 것이죠. 심지어는 개인창작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치상황이나 사회경제 모든 면들이 전반적으로 변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변화된 조건 속에서 문화활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들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김 정 수  그런데, 외면적 상황을 보면 가장 화려하게 변한 것이 연극판인 것 같습니다. 곽병창 선생님이 느끼시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곽 병 창  그 때보다 지금의 연극판이 화려해졌다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때 민간극단의 활동은 지금 못지않게 활발했어요. 아까 얘기한 백제마당의 후신이었던 녹두골 패가 있었고,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강습과 창작을 병행했고요. 굳이 운동 차원에서의 연극 행위 말고도, 창작극회, 황토 등을 비롯해서 여러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었습니다. 민간극단들이 어찌 보면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극단도 있었고, 리얼리즘이나 연극적 환타지를 강조하는 극단도 있었습니다. 경향도 다양했고, 극단 숫자나 공연 숫자도 지금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어요. ●김 정 수  한해 공연이 20여 편 되는 해도 있었지요. ●곽 병 창  그 때보다, 연극인들의 생활 형편이나 외형상의 크기는 커졌지만, 연극에 대한 열의나 치열한 고민 등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봅니다. 약간의 안락함은 얻었지만, 삶의 깊이 등은 부족해진 것 같습니다. ●김 정 수  언젠가 기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카톨릭 센타에 고은 선생님이 강연을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이 나도 서정시만 쓰면서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급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에술가의 고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 같았습니다. ●백 학 기  고은 선생은 이 지역 군산 출신이죠. 한때 스님 생활을 했고, 이후 엄청난 힘으로 시와 소설, 평론 그리고 산문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셨는데, 그때 대단한 우상이셨죠. 또한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주도하면서 문인의 사회적 역사적 실천이라는 행동과 양심을 주장하기도 한 지식인이었죠. 80년대 지역문화예술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민주세력을 주축으로 한 시대의 양심과 관련 세미나를 연 것 같아요. 그 무렵 고은 선생이 전주 카톨릭센터에 오셨고, 서정시와 관련한 발언을 했는데 역시 울림이 컸습니다. 기억하지만 저를 포함한 시인들은 고은의 <겨울 문의 마을에 가서> <부활>등 이런 인간의 내적 울림을 주는 시세계를 고은 시세계의 중심으로 믿어왔는데. 80년대 들어 대단한 충격적인 시를 발표합니다. 바로 <화살>이란 시죠.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가자는 선언적이고 시대적 역사적 당위를 노래한 시로 우리 시인들의 문학적 역사적 실천을 주창한 시로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인 자신의 내면적 울림이나 소리를 거부할 수 없는 거죠. 우리 시단에서 20년대 소월이나 30년내 육사나 만해, 영랑 등 소위 서정시를 쓰고 싶은 욕구가 저마다 있는 거죠. 독일의 브레히트도 그렇게 외쳤듯 시인이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와 역사에서 살고픈 시절을 고은 선생이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 어둡고 캄캄한 시대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서정시를 쓸 수 없는 형벌의 시대를 저주했던 시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주천이나 다가산 그리고 완산칠봉과 멀게는 모악산에 올라 시대의 아픔과 울분을 토로하면서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절이 과연 올 것인가 회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는 시대적 거대담론이 인간 개인의 내면을 앞선 시대였으니까요. ●송 만 규  팔십년 중후반에 전북문화운동협의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면서 현장 지향성, 노동과 농촌문제 등과 연대하면서 하는 사업과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하는 사업들을 공동으로 해왔었어요. 미술로 다시 얘기하자면, 80년대 후반 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민족해방운동사라고 하는 77미터짜리 걸개그림 사건입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라고 전국단위의 미술단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걸개그림을 제작해 전국을 순회하게 된거죠. 내용은 갑오농민혁명부터 100여년에 걸친 우리 역사를 민족과 민중문제에 초점을 맞춰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평양축전에 보내려고 하다가,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경찰에 의해 이 걸개그림이 파괴되어 버리고, 재미교포를 통해서 이북에 슬라이드 필름이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북 작가들에 의해 다시 그려져 북한에서 순회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89년도에요. 이걸 안기부에서 놓칠 리가 없었죠. 많은 회원들이 수배를 당하게 됐었습니다. 이것이 80년대 후반에 대표적인 미술대항운동입니다. 사라져간 현장 운동의 맥, 너무 아쉬워 ●곽 병 창   80년대 문화운동을 얘기하자면, 아무래도 문학과 미술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정 수  문학의 현실참여는 그 전통이 깊어 새삼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미술의 경우 80년대 들어 괄목할만한 활동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 만 규  민중운동이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미술이란 매체가 차지한 부분이 상당히 엄청난 것 같습니다. 문익환 목사도 ‘나도 시를 쓰지만, 시각매체가 갖는 혁명적 효과는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었습니다. 운동현장에 걸개그림 한 장이 갖는 힘은 폭발적이라는 것이었죠. ●곽 병 창   일반 시민들과 민중미술이 만나는 중요한 창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있었죠. 온다라 미술관이라고 하는 민중미술 전용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곳이 없었죠. 일반 시민들에게 민중미술의 지향점이나 그 미학을 확산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송 만 규  안타깝게도 80년대 현장운동의 맥들이 90년대 2000년대를 넘어오는 과정 속에서 상당수가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일탈현상을 가졌죠. 모든 분야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곽 병 창   특히 연극분야가 안타까워요. 80년대 초에 마당극 운동을 이끌던 녹두골의 정신과 인맥이 85년도에 끊겨버린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앞서가던 것이었습니다만…. 산문의 시대·시의 시대·영상의 시대 ●김 정 수  우리 사회를 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과거에는 문학에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다면 최근에는 급격히 그런 양상이 무너지고 새롭고 다양한 채널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면서 영상의 약진은 괄목할만 한데요, 서울 소재 어느 대학의 전체 수석이 영화과에서 나오는 일들만 보아도 이제 기본 중심축이 문학적인 것으로부터 시각적인 것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도 문화운동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백 학 기  70년대를 산문의 시대라고 하고, 80년대는 시의 시대라고 얘기를 한다면, 현재는 영상의 시대라고 얘기합니다. 자본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영화과 학생들을 보면, 인문학적인 감수성이 뛰어난 학생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영화의 역사는 채 백년도 안됩니다. 그런데 제 7의 예술이라는 영화가 갖고 있는 집단성 자본성, 대중적인 파급효과는 엄청납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영화과에 가는 것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예전이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자본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의식과 사고를 보면, 굉장히 영상적인 것들이 많아요. 우리 세대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들도 많습니다. 언젠가 티브이를 보니 사법고시에 2차까지 합격한 고시생이 사법연수원 입소를 앞두고 레게머리를 하고 미용실을 경영하는 장면이 나와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사고와 관습으로 보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펜과 종이로만 세상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 젊은 날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국문과가 문예창작과로 바뀌고 문예창작과 영상문예과로 바뀌면서 학생들의 의식과 사고도 점차 영상문학 쪽으로 흘러가는 시대를 보게 되는 거죠.   7,80년대가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고 걷는 낭만과 거대담론의 시대였다면, 지금 젊은이들의 사고는 실존적이며 개인적이며 포스트모던시대입니다. 우리 때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런 행동과 사고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 하지만, 아무튼 21세기는 영상의 시대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영상은 문학과 시, 미술, 애니메이션 자본, 기술 그리고 집단성, 대중성까지 갖추고 있어, 잘 되면 명예와 권력(?)까지도 쥘 수 있는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으로 성공의 키워드인 거죠. 영상은 모든 예술의 총아입니다. 인문학 위기, 그 원인은 어디에 ●곽 병 창   역사적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큰 틀에서는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은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대적 중압감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에게 시대를 너무 단선적이고 대결적으로만 바라보게 만든 측면도 있으니까요. 문학에서 서정시를 쓰고 싶지만 못쓰는, 개인적인 창작에의 열망이 있지만 시대화를 그려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더 발랄하고 창의적이면 좋겠는데, 정말 선배들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촉수를 뻗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천착들이 과연 있는가 생각하면, 비관적입니다. 삶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연속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찰나적이고 즉흥적이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가로서 자의식이든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는 것이죠. 시대와 삶이나 인간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천착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송 만 규  디지털 정보화가 되면서 표현이나 사고의 다양성이 상당히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면서도 인문학적, 철학적 사고가 부재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단순히 정보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젊은이들의 작품들을 보면, 거의 자기의 체화된 얘기보다는 정보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김 정 수  최근 대학에 ‘글월 문’자 들어가는 학과가 다 없어지고 있다합니다. 사학과, 철학과가 없어진 학교들도 엄청나게 많다고 알고 있는데요. 흔히 인문학의 위기로 표현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 정 일  인문학의 위기네 어쩌네 하는 얘기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호사스러운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정약용 선생이나 이중환 선생이 후원자가 있어서 학문을 하지는 않았잖아요. 여기에 비해, 요즘 대학교수들은 괜찮습니다. 월급 빵빵해, 조교, 대학원생이 도와 줘, 도서관이나 서점에 수많은 자료들 있어, 뭐가 부족합니까. 그런데 여기다가 그렇잖아도 국가에 수없이 만든 무슨 무슨 위원회가 쓸데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또 하나 위원회를 만들어 돈을 대주라고 합니다. 인문학은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새로운 기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굳이 말한다면 인문학자의 위기일 것입니다. ●곽 병 창   언제부턴가, 예술가들이 기획서 쓰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아까 80년대보다 지금이 화려해졌다는 것은 연극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지원도 엄청나게 늘었죠. 하지만, 80년대보다 양질의 작품이 나오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술가들이 골방에서 기획서 쓰고, 컴퓨터 앞에서 관련 정보 수집하고, 위원회 쫓아다니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창작에 전념할 시간이 옛날보다 오히려 부족한 거지요. ●신 정 일  많은 학자들이 ‘프로젝트’에 목매달고 있는 것 같아 멀리서 보면서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김 정 수  오늘 안드레김 선생이 재미있면서도 뼈 있는 말을 했더군요. 연예인들이 결혼식을 이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고요. 결혼식이라는 것이 일생에 한번 가장 성스러운 약속의 장인데 지나치게 희화화되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느닷없이 그 말이 생각나는군요. ●신 정 일  저는 일요일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방송 3사가 전부 다 똑같은 웃고 웃기는 방송프로그램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 라는 누군가의 시 구절처럼 그렇게 바보를 양산하는 프로그램이 즐비한데, 시청자들의 항의도 없어요. 매일 이런 순간적인 재미만 추구하다가, 인생에 뭐가 남겠습니까. 우리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 포기할 수 없어 ●김 정 수  80년대 문화운동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계승을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요. 지나치게 기성세대적 발상을 요구하는 우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각자 평소에 가지셨던 생각을 말씀해주시지요. ●신 정 일  시대적 변화를 따라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내 본연의 자세는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잃어버린다면 뭐가 남겠습니까. 초심을 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저널도 초심을 잃지 말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의 불화’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롭고 쓸쓸해야 글도 잘 써집니다. 좀 쓸쓸해져야 합니다.   ●곽 병 창  예술가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결함이 많은 존재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80년대를 이야기 할 때, 예술가들은 항상 가슴속에 예술이 뭐냐 인간이 뭐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에 대한 물음을 품고 살아왔었습니다. 그 당시 시대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되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 학 기  그렇습니다.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이 지닌 삶의 태도와 예술적 지향점을 매우 탁월하게 생각합니다. 빔 벤더스 감독은 일찍이 미국문화를 동경해 뉴욕으로 가 ‘이유없는 반항’을 만든 니콜라스 레이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우고 <파리 텍사스>를 찍었으며 이후 자신의 독일 문제 즉 분단과 통일이라는 문제를 영혼적으로 접근한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듭니다. 자신의 분단 문제와 인간문제를 전 세계에 알린거죠.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분단 독일의 민중성과 영혼성을 우리는 영상언어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빔 벤더스는 2000년 쿠바 음악 뮤지션들을 위한 음악영화 <브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이란 영화로 다시 전 세계의 영화인들의 가슴을 사로잡습니다. 문제는 빔 벤더스 감독의 의식과 사고가 글로벌해간다는 거죠. 거기에 문학과 영상과, 음악과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빔 벤더스처럼 우리의 문화 예술이 더 넓은 세계와 시대로 뻗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예술성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야겠죠.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맞물린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어느 시대와 역사보다 더 위기라는 의식과 그 어느 시대보다 기회가 더 있다는 의식과 사고로 접근해간다면 우리가 인생에서 원할 수 있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송 만 규  완벽하게 몸이나 마음이 움직여지지 못하니까, 이부분에서도 뭔가가 언저리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빨리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문화운동이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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