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6.12 |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 [2] 90's
관리자(2006-12-27 14:28:32)
1990년대, 이데올로기의 흔적 찾기 "격정적이었던 힘의 시대, 지역과 활동가에 눈뜨다" 참석자 김선경_전주방송작가 방용승_전북통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원도연_전북발전연구원 지역발전정책연구소장 홍석찬_창작극회 대표 진행 : 문윤걸_예원예술대하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일시 : 11월 8일 오후 4시 문화공간 지담 문윤걸- 문화저널이 19주년을 맞으면서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를 나눠서 문화적 성과와 논쟁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다들 아시는 분들이니까 소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진행하면 부담도 되니까, 가볍게 논의를 이끌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1990년대면 벌써 15년 전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실 지도 모르니까 먼저 기억을 되살리는 이야기를 하시도록 하지요. 문화라는 것이 사회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포함하여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나 문화적 지형의 변화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꺼내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제 기억에 의존해서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빠진 것이 있으면 후에 추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90년대 초입에 세계 질서에 충격을 주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회주의권의 붕괴인데요.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문화적 상황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충격을 준 가장 큰 이슈였죠.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문화운동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하나의 논쟁이 있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탈근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근대사회의 연장선에 있는 후기 모더니즘으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신조류에 대해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또 신세대 논쟁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섞이는 가운데 N세대, E세대, 미시족 등 다양한 층위로 그룹 짓는 이른바 새로운 인간형군에 대한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건 우리 문화, 전통문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영화 서편제를 시작으로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 대유행했지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류의 우리 문화, 우리 역사찾기가 대단했으니까요. 또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역문화정책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구요. 여기에 80년대 후반에 민족문화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지역문화운동이라는 것이 태동되던 시점도 90년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만 놓고 보자면, 1999년 전주국제영화제라는 매머드급 축제가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영향을 빼놓을 수도 없을 듯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이 시간에 한번쯤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또 있을텐데요. ‘사회 변혁’, 새로운 물꼬트기 원도연- 대체로 크게 빠진 것이 없이 90년대 상황을 잘 요약해 주신 것 같습니다. 90년대는 사회학적으로 보면, ‘지역’이라는 개념과 ‘활동가’라는 개념이 생겨난 시기였습니다. 이슈로 보자면, 지방자치제의 성장·발전을 통해서 ‘지역’이라는 아젠다가 생겨났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실천가로서 활동가라는 개념도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계에서 활동가라고 불리는 세력들을 크게 보면 두 개의 경로로 발전해왔습니다. 즉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던 세력들이 90년대의 또 다른 화두였던 문화로 관심을 옮긴 경우고, 다른 한 가지는 운동과는 상관없이 문화예술을 하다가 변화된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 차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부류가 있었습니다. 홍석찬- 저는 90년대를 30대의 나이로 살았습니다. 30대면 소처럼 일을 할 때죠. 80년대 후반부터 연극을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멋모르고 선배들을 따라하다가, 90년대 들어서서 지역소재의 얘기를 하고 작품에도 풍물 등을 의도적으로 도입 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 서울지역에서 뮤지컬 붐이 일어나고 대중적인 연극에 대한 바람이 일면서 전북지역 연극계에도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 되면서 전북지역 7~8개 있던 극단들은 뮤지컬극단, 인형극단, 마임극단 등이 속속 창단되면서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습니다. 이때 전북도립국악단에서 생산해낸 대규모 창극들은 재미를 더하면서 판소리를 쉽게 접하게 했고 차차 장르들과 협연을 통해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대학연극동아리의 활동이 기성극단으로 이어졌던 기존의 시스템은 대학교에 여기저기 연극학과가 신설되면서 단원수급이 자유로워졌고 전문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90년대 후반은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지원도 다양해지면서 문화예술 단체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시기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90년대는 문화지형이 격하게 변화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김선경- 저는 91년도까지 대학에 남아 있었는데요. 당시 학생운동 진영에서 92년 대선과 93년 총선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시기로 규정돼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92,93년은 일종의 혁명기, 대변혁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소련이 무너지고 운동권 세력이 분열되면서 그 믿음은 형체가 불분명해졌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회에 나왔는데, 당시 전북민문협(현 민족문학작가회의) 안도현 선생님의 제안으로 ‘전북청년문학회’를 조직했습니다. 학생 때부터 ‘자주적 대중문예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전문가들만의 문학이 아닌 ‘삶 속에서의 문학’을 기치로 내걸고 야심차게 시작을 했죠. 전북지역뿐만 아니라 경기, 전남, 경남, 경북 등 당시 각 지역마다 대학 문예일꾼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노동자문학회나 청년문학회를 조직했고, 소박하나마 소식지 형태의 문예지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연대활동을 하면서, 지역 내에서는 당시 전민협에 문화분과 활동을 했죠. 그림마을, 우리마당, 선언 등과 함께 문화연대활동을 하기도 했고, 각종 집회나 행사에 공동으로 참여하기도 했죠. 하지만 98년 이후 청년문학회가 해체되고, 문예단체들끼리의 연대활동도 약해지면서 그 이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90년대 초반의 기억이 오히려 선명하고, 후반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화, 시장의 힘에 의해 지배계급의 도구로 전락 방용승- 저 같은 경우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운동을 쭉 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치열하게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실 90년대 우리들이 바라볼 때,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느꼈던 것들은 모두 비슷한 것 같아요. 또 하나 90년대 초에 북미핵공방이 시작됐고,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고, 그러면서 북이 곧 붕괴한다는 예견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빠르면 3일 늦어도 3년이면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권의 상황이 급변하는 등, 격변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핵공방으로, 미국의 유일패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남쪽은 남쪽대로 시장개방압력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되었고, 전체적인 흐름을 보기 보다는 앞선 선배들이 말했던 것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완전히 마음을 달리 먹는 등의 변화를 거쳤습니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은 이 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사람이 문화적 행위를 통해 생활과 사회현상에 대해 좀더 잘 알고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즉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매개입니다. 그러다보니, 문화는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본래 문화적 의미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90년대에는 이미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경쟁구도가 사라지면서 문화가 시장의 힘에 의해 지배계급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문화라는 것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관점이고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문화의 의미를 실현시킨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90년대 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의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 풍물패 등을 만들어 이를 악물고 풍물 강습 등을 꾸준히 했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30~40명 정도씩은 항상 강습을 받곤 했습니다. 이 성과로 대학병원에 노조가 생기기도 했었구요.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90년대 후반들어서부터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남북한 문화예술의 교류 시작 문윤걸- 문화와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8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초반에도 계속되었죠. 그러면서 문화와 예술을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각자가 나름대로 이해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문화예술운동 단체들도 다양하게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가 북한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원도연- 90년대 초반은 아니고 조금 더 뒷 시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요. 90년대 초반만 해도 아직 우리 사회가 경직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남북한 문화예술인들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요. 방용승-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남북한 문화예술이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6.15 공동선언 이후의 일이었죠. 문윤걸- 그런가요? 남북한 문화예술인들의 직접적인 교류는 아마 그 시기가 맞는 듯 합니다. 하지만 북한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이 북한의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체 세미나나 워크샵 등을 열었던 것은 90년대 초반에 이미 시작되지 않았나 싶어요.   원도연- 문화운동의 흐름들을 바라볼 대안문화 운동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안문화운동은 90년대 상황의 키워드였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불어닥친 IMF, 머리는 단순해졌고 무대는 가벼워졌다 홍석찬- 96년도 97년도에 아이엠에프 상황을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90년도 초에 연극판은 민간이 관을 리드하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94,5년부터 관이 독자적으로 연극단체를 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면서 민간은 소외되게 되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닥친 아이엠에프 상황은 일반서민들을 경제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지만 민간예술단체들도 독자적으로 꾸려나갈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을 만들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은 작품 활동을 위축시켜 더욱더 관의 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었지요. 경제적 어려움은 작품의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모로 우리의 모습을 재점검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쫓다가 지쳐버릴 정도였습니다. 해야 할 얘기를 ‘나중에 하자’고 미루다가 폐기처분해야 할 때도 있었지요. 올곧게 지키려고 했던 얘기들을 하면 관객이 없으니 좀더 쉽게 재밌는 것으로 작품의 경향이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머리는 단순해졌고 무대는 가벼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문윤걸- 현재 우리 지역에서 문화예술 단체를 가장 크게 지원하는 것이 관인 것이 사실인데 이것이 IMF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 온 것이로군요. 원도연- 그렇습니다. 90년대부터 문화에 대한 관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자치단체의 직간접적인 지원이 활성화되기 시작합니다. 직접적인 지원형태는 관립예술단을 만들어 문화인력을 흡수하는 방식이고 간접적으로는 각종 지원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상황이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거의 모든 문화예술이 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상황으로 변해갔습니다. 운동권 세력과 전북문화의 지형변화 문윤걸- 오늘 좌담회를 위해서 이전에 문화저널에서 했던 좌담회의 기록을 훑어보았는데 그중 93년도 기록에 음악을 하시는 분께서 ‘갑자기 민간주도 음악단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제는 공연장을 잡기 힘들 정도다’고 말씀 하셨더군요. 이는 연극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93년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역의 문화단체들이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걸까요? 원도연-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이 문화판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비롯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80년대에 사회를 바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꿨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들이 문화판으로 들어와 각각 자신의 삶과 철학을 담은 문화운동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문화인력들이 급증했었습니다. 이들은 운동을 한다고도 할 수도 없고, 예술을 한다고도 하기 힘들었었습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이 의미있는 문화 만들기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대안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김선경-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열정들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이엠에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돌이켜보면 청년문학회도 그 시기를 지나면서 상당히 약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방용승- 90년대 들어서면서, 진보적 학생운동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특히 전북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기현상을 겪었습니다. 돌아보면, 이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80년대 학생운동의 이러저러한 결과물들이 90년대 문화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90년대 중후반의 학생운동이 집단적으로 무너지면서, 2000년대의 새로운 문화운동가들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홍석찬- 여성의 목소리도 90년대에 커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 작품을 보면, 여성 단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를 다루자는 말이 없었는데, 90년대 중후반 들어서면서부터 이들이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직접 일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원도연-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음악에 대한 관심도 90년대 중후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방식의 변화가 ‘전통문화’와의 접점이 형성되면서 발생합니다. 대안문화를 지향했던 세력들은 대부분 전통문화와의 접합을 시도함으로서 민족적 성격을 견지했습니다. 연극하는 분들이 마당극적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고, 현대음악과 전통음악을 합한 퓨전 스타일의 공연 등과 같은 시도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동학 100주년, 그 애매모호했던 풍경들 문윤걸- 우리가 앞부분에서 말했던 것처럼 80년대 학생운동이 자양분이 되어서 90년대 초반에 문화운동이 굉장히 활성화 된 것 같습니다. 90년대 초반에 우리 문화계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동학 100주년이었습니다. 동학 100주년이 우리 지역 문화판에 미쳤던 영향을 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행사가 지역에서 매우 비중 있게 펼쳐졌는데 그 성격이 제도권 행사도 아니고, 비제도권행사도 아닌 경계선에 있으면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 모두 참석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또 전주뿐만 아니라 서울의 전문인력도 참여하고 정읍의 문화인력도 참여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성격규정을 하기 힘든 행사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대규모 문화행사로서는 아마 지역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는데 이 행사가 주는 의미가 있을텐데요. 원도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 의장이 도의회 의장이었습니다. 이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점이 어디냐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완전한 제도권은 아니었지만 제도권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명분을 갖고 있었습니다. 재야 쪽도 이런 사업에 대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재야쪽에서 본다면 당연히 이 사업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어야 했으나, 기념사업의 폭을 넓히고 좀더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또 길을 열어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개인적으로는 기념사업회 간사를 하면서 당시 재야운동을 이끌던 선배들의 고충에 대해 훗날 전해들은 바 있었습니다. 김선경- 그때 전주엠비씨의 전성기 피디가 처음으로 동학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홍석찬- 저도 94년도 동학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었습니다만, 그때 행사에 참여했었던 사람들은 거의 타 지역 단체들과 예술인들이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수많은 단체들이 집단거주지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만들어내는 창작과정 자체는 참여했던 사람들을 많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문윤걸- 지금보면 어설픈 면이 없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인 행사였었습니다. 원도연- 당시 가장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우리 지역만의 사업으로 협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00주년 행사 자체를 전북만의 행사가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판을 지역적으로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서울의 전문가들을 참여시키자는 안이 자연스럽게 공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홍석찬- 어찌됐건, 100주년 기념행사로 인해 몇 년 동안은 어딜가나 온통 전봉준이야기였습니다. 문윤걸- 내용뿐만 아니라, 대규모 문화행사를 치루는 형식에 있어서도 이런 형식이 마치 전범처럼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계속됐었습니다. 방용승- 84년도 학교에서 동학 90주년 행사를 할 때, 그때 전봉준 역할을 맡아서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시대정신과도 치열하게 일치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00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그런 것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다수 민중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담론을 담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될텐데, 그런데 민중들이 대상화된다는 느낌을 받았었으니까요. 민과 관이 함께 했다는 기능적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냈느냐는 차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활황기, 그러나 정체성 혼란은 컸다 문윤걸- 이제 90년대 후반부쪽으로 기억을 옮겨 얘기해보죠. 당시 가장 큰 지형적 변화는 지방정부가 들어섰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역축제의 붐과 지역 정체성 찾기라는 숙제가 대두됐고, 지역문화정책이라는 말도 점점 중요한 가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민간문화단체들이 관의 문화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한 거 같은데… 원도연- 90년대 후반의 화두는 관립예술단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98년도였던 것 같은데요. 문화저널 사무실에 전북도청의 문화관광 공무원이 찾아왔었습니다. 개인적 관심에서 온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었습니다. 지역문화에 대해 지역사회가 특히 지방자치단체가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였습니다. 관립예술단이 지역문화예술의 중심 동력으로 성장했지만, 문화계 전체적으로는 인력이나 역량이 조금씩 쇠퇴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에서였던 것 같은데요. 첫째는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처럼 대학가에서 문화역량을 가진 활동가들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은데서 기인했고, 둘째는 기존 활동가들이 점차 나이들어가면서 생활상의 문제 등 이유로 문화계를 떠나가는 상황이 왔다는 것이지요. 김선경- 문학 전반으로 보자면 90년대는 후일담 문학의 전성기였고,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시기였지만, 전북지역에서는 여전히 시대정신을 강조하는 민족문학 작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선배 작가들은 ‘청년문학회’에 대해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차세대 전투기’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왕성한 창작활동과 전투적인 실천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실 그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격월간 <청년문학>을 5년 동안 펴내긴 했지만 창작성과도 미미했고, 무엇보다 현실에서의 문예운동과 개인적인 문학창작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과연 우리가 제도권 문학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밤늦도록 토론을 했을 정도니까요. 기억에 남는 건 <문학, 버릴 수 없는 내 꿈>이라는 대중문학강연인데요. 고은, 송기원, 은희경, 도종환 같은 문인들을 강사로 모시고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토론을 했죠. 아사달에서 시낭송회 겸 문학까페를 열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그런 문학행사에 100여명 넘는 사람들이 모이곤 했어요. 젊은 혈기로 좌충우돌 헤매기는 했지만 늙지 않은 문학, 항상 젊은 문학을 해보겠다는 저희들의 의지는 선배문인들에게 조금은 자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배들이 주최한 시인학교나 시화전, 창작교실 같은  행사를 하는 데 청년문학회가 늘 ‘실천부대’ 역할을 했으니까요. 원도연- 90년대는 전라북도 문화판에 스타가 없던 시대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안도현이나 박남준 등 걸출한 시인은 있었지만, 그것은 개인적 측면으로 일이고, 90년대라는 시대를 담고 있는 스타는 없었습니다. 시대의 문제의식 속에 너무 깊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90년대가 오히려 문화적으로 활황기는 맞는데,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다는 것이죠.   방용승- 그 당시, 소외 진보운동 진영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저 같은 경우 나름대로 운동할 이유를 꾸준히 찾아왔었습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의 답이 될 수 없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어제 서울에 한미 FTA관련 회의가 있어 갔다 오는 길에, 안치환씨를 비롯해 매일 저녁마다 촛불시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치환씨가 ‘우리가 추운 날씨가 와서 평화를 얘기할 때 여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건 말건,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대가 어떻게 변했건 간에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으며 꾸준히 활동해온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평택문제나 한미 FTA문제는 우리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민중운동을 꾸준히 해왔던 우리들은 문화라는 것이 그 사회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대중들의 가슴에 확 와닿는 것들이 별로 없어 아쉬운 때였습니다. 나름대로 민중들의 저항은 도도하게 흘러왔다고 생각합니다. 치열한 투쟁은 전개되어 왔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의 문화적 기반이 취약하다보니까, 서울에서 사람들을 끌어오기도 하고 했었습니다. 문화, 운동과 결별하다 문윤걸- 아주 자연스럽게 지난 10여 년간의 성격규정도 하게 되고,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도 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정리를 해보죠. 홍석찬- 90년대 후반에 주목을 하고 싶어요. 90년대 초반 활발하게 활동하던 30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90년대 중반은 먹고 살아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엠에프를 맞고서 전면에서 물러나 일상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96년도인가 97년도인가, 어떤 작품을 준비 중에 그만 두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작품을 다시 읽으니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격정적이었던 90년대 상황은 이제 2000년대에 내면화 되어 나타납니다.    원도연- 아까 방용승 선생 말씀하신 중에 민중문화를 언급하셨는데, <청보리 사랑>팀이 지금도 강력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노동과 농민현장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문화예술팀으로 <청보리 사랑> 정도가 유일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을 제외하면 사실을 없었습니다. 90년대가 운동과는 별개로 문화화 되는 시기였었고, 제도화되는 경향이 강한 시기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민족문화와는 별개로 대중문화에 대한 열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답사프로그램이었죠. 90년대가 이런 문화의 전성기였습니다. 아주 많은 단체들이 답사프로그램을 했었고, 그 문화기행의 핵심적 지향점은 역시 전통과 대안이었습니다. 김선경- 모든 작가들이 후일담 문학에 눈을 돌릴 때, 이광재 씨나 정도상 씨 같은 소설가들이 80년대의 정신을 잃지 않고 소설작품을 써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영상과 영화 쪽으로 흘러가고 소설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죠.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문학의 목적을 잃고, 외부적으로는 문학이 설 자리를 잃으면서 젊은 문청들이 걷잡을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졌던 때가 90년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문학의 목표가 분명해졌는가? 하면 그것도 뚜렷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혼란스럽게 분투하는 것이 문학의 본령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방용승- 시대정신을 치열하게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돌파하려는 자세를 그리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지방분권이 되면서 축제가 늘어나면서 문화적 장이 많아지고, 관의 관심도 늘어나는 것 같지만, 관도 시장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 일을 추진해왔습니다. 조금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동안 공동체를 파괴해 왔던 것들을 문학이 됐던지 미술이 됐던지 정면을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야 했는데, 없었습니다. 활동하시는 분들은 나름의 생각을 갖고 일을 하셨겠지만, 신자유주의라던가 하는 우리가 대항해야 할 시대의 중심이 되는 의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민중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투쟁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생존권을 지킬 수 없는 노동자 농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상황은 문화적 상황에 여력을 투자하기 힘들었었습니다. 문화도 굉장히 팍팍하고 이런 가운데에 쓸쓸하게 그들 나름대로의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이루어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청보리 사랑은 전북의 지역문화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희망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윤걸- 지금 와서 이렇게 90년대의 상황을 되돌아보니 90년대에 우리 사회는 물론 우리 지역의 문화적 흐름이 매우 드라마틱했던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초반 역동적인 지역의 문화일꾼들이 대거 문화판에 진입하면서 지역문화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던 반면,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지형변화, 그리고 IMF 시대에 이르러 극에 달하게 되는 문화예술활동에 있어서의 시장원리의 개입, 또 이념의 붕괴에 따른 시민운동의 분화와 함께 하는 문화예술운동의 다양화 등 지역의 문화예술계가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번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 시기인 듯 합니다. 역동적으로 출발하였지만 문화예술계가 시장원리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젊은 인력들이 문화예술계에 진출하기를 꺼려하게 되었다는 지적이 무엇보다도 아쉬운 일이로군요. 오늘 긴 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