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작곡자들이 남긴 것들입니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이들의 음악이 여전히 현대인들의 가슴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악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이들이 되살아난다면 이들은 현대에 연주되고 있는 자신의 음악을 들으며 어떤 평가를 할까요? 어떤 경우 “내가 저런 음악을 썼다구? 저건 내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음악에는 작곡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지휘자나 연주자의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작곡자는 자신의 음악을 악보라는 양식에 남기는데 악보에는 음표 외에도 수많은 지시사항을 담아 놓습니다. 빠르기에 대한 지시 뿐만 아니라 감정에 대한 지시, 음량에 대한 지시, 심지어는 음표 하나 하나에 여러 지시를 해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곡자들이 이렇게 꼼꼼하게 이런 저런 지시를 해놓았는데도 같은 곡이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다른 느낌으로 들리는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연주자가 빚어내는 소리의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인 이유는 아무리 작곡자의 지시가 많다 하더라도 연주자마다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영화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싱겁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곡자의 지시는 어디까지 지켜야 하고 연주자의 해석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작곡자의 창작의도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내는 범위에서만 해석을 허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작곡자의 창작의도를 존중하되 그것을 연주자가 자신의 해석을 보다 자유롭게 더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범위까지 허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쉬운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어쩌면 작곡자와 연주자 사이에 놓인 영원한 딜레마이자 갈등의 씨앗인지도 모릅니다. 가끔 연주평을 보면 어떤 경우에는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한 연주였다는 얘기가 호평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정반대로 새로운 해석이 돋보였다는 얘기가 호평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마다 평가의 기준도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평론뿐만 아니라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허용하는 범위가 다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바그너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지휘할 때는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서 연주했으면서도 다른 지휘자가 자신의 작품을 고치면 쫓아가 싸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구스타프 말러는 다른 작곡자의 작품을 고쳐서 연주한 대신 다른 지휘자가 자신의 작품을 고쳐서 연주하는 것에도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연주자에 의해서 다르게 연주되는 경우는 아주 흔합니다. 베토벤 5번 운명교향곡은 총 연주시간이 보통 30분 정도로 1악장의 경우 보통 7분에서 7분 30초 정도로 연주하는 데 지휘자에 따라서 연주시간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카라얀은 7분 10초 정도로 연주하는 데 반해 현대 지휘자의 대표주자인 리카르도 샤이는 6분 40초, 레너드 번스타인은 8분 30초에 연주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뒤져보니 1악장을 가장 빠르게 연주한 사람은 2002년에 녹음한 슈트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로저 노링턴이라는 지휘자가 6분 21초에 연주했네요. 반대로 가장 느리게 연주한 경우는 피에르 불레즈가 1968년에 녹음한 연주로 연주시간이 무려 9분 18초입니다. 오토 클렘페러 또한 느리게 연주했는데 연주시간이 9분 12초이네요. 같은 악장을 두고 가장 빠른 연주와 가장 느린 연주 사이에 무려 3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평균 7분 짜리 연주에서 3분의 차이가 난다면 하나는 얼마나 빠르게, 다른 하나는 얼마나 느리게 연주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속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니 틀림없이 두 연주는 그 느낌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빠른 연주에서는 미처 운명이 다가 옴을 알아차릴 틈도 없이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서 나를 흔들어 놓고 휙 지나갈 것이며, 느린 연주는 운명이 저만치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어쩌면 그 무게감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이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과연 베토벤이 그리고 싶었던 운명은 어떤 운명이었을까요?
참고로 베토벤은 모든 악보에 메트로놈 빠르기를 기입해서 어떤 속도로 연주하라는 지시를 꼼꼼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교향곡의 연주시간은 지휘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이유는 물론 지휘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포함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토벤이 악보에 표기한 메트로놈 빠르기가 연주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는데 어떤 이는 당시에는 지금처럼 규모가 큰 교향악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속도로 연주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 아마도 베토벤의 메트로놈이 고장나 있었던 게 틀림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토벤의 빠르기 지시는 대체로 무시되어 왔습니다.
여하튼 음악계에서는 작곡자가 남긴 악보에 얼마나 충실해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그룹으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작곡자가 남긴 악보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객관파라고 하고, 연주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관대한 입장을 주관파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지휘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지휘했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필요 없었습니다만 전문 지휘자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 문제가 점점 첨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전문 지휘자들은 대부분 객관파 보다는 주관파들이 많았습니다. 작곡자가 아무리 악보에 이런 저런 지시사항을 남겼어도 지휘자들은 그때 그때 자신의 감정에 따라 특정한 악상기호(예를 들면 ritardando 점점 느리게, accelerando 점점 빠르게)를 과장되게 사용하며 템포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소리의 강약을 과장하면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주관파가 많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이 점점 거세졌습니다. 이러한 비판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토스카니니입니다. 토스카니니는 악보에 가장 충실했던 지휘자입니다. 그는 “어떤 이는 <에로이카>를 히틀러라 하고, 어떤 이는 무솔리니라고 우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에로이카>의 첫 악장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에로이카 1악장에 대한 힘차고 빠르게 연주하라는 베토벤의 음악적 지시였습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로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오텔로>의 리허설 현장에서 베르디가 “첼로 파트의 소리가 너무 약하니 조금 더 강하게 연주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토스카니니는 “악보에는 피아니시모로 표기되어 있다”라고 항의했고, 베르디가 “아 그건 내가 연주장의 규모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랬으니 악보를 수정하겠소. 좀 크게 연주해주시오”라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연주를 수정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끝내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 악보대로 하고 나중에 수정된 악보로 연주하게 된다면 그때 수정하겠소”라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더 마음이 가시나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역사적 환경에서 만들어진 만큼 현대에서는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현대인의 취향이나 미적 감성에 맞도록 연주할 필요가 있다”는 쪽이신가요?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것일 때 더 의미가 큰 것이지 오늘날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그려서 가져다 놓으면 이미 모나리자가 아니다”라는 쪽이신가요?
어쨌든 소리는 현장예술이라 그 시간 그 현장을 떠나면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것인데 악보라는 훌륭한 발명품 때문에 영원히 인류 곁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악보냐, 해석이냐는 논쟁도 영원히 남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