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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 | 연재 [백제기행]
전북가야, 잊혀진 왕국의 이면을 보다
다시 문화유산답사 장수가야·운봉가야
이민욱 전북대신문 기자(2013-07-30 17:41:26)

토요일 아침 7시, 직장인 대학생 할 것 없이 고된 일주일과 불타는 금요일 저녁을 거치고 늦잠을 만끽하고 있을 그 때. 전날의 피곤함과 아침의 공복감을 뒤로하고 143회 백제기행은 잊혀진 왕국 전북가야를 향해 떠났다. 철의 왕국, 제4의 왕국이라 불리며 국사책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야. 오천년 한국사에 한 획을 긋는 국가임이 분명하지만 가야사 연구는 백두대간 너머에 위치한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 경북 고령의 대가야에 치중되어왔으며 주로 영남에서만 연구되었다. 따라서 호남에게 있어 가야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원 운봉과 장수 일대에서 가야유적지가 발굴되면서 가야는 ‘그들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었다.


천혜의 요지에 자리잡다
일반적인 전북의 이미지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평야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북 서부지역에 국한된 특징이며 전북 동부지역은 서부와 달리 험준한 산악지형이 펼쳐진다. 백두대간과 금남, 호남정맥이 만드는 동부의 산악지형은 예부터 혼란을 피하는 명당으로 각광받았다. 마한의 왕이 진한의 공격을 피해 수십년간 정착했던 달명계곡도 이곳에 있다. 이렇듯 전북가야는 천혜의 요지인 동부 산악지형 속에 터를 잡고 성장했다. 전북가야 중 하나인 운봉가야가 자리 잡았던 운봉고원을 올랐다. 도로포장이 되어있었지만 운봉고원을 오르는 길은 험했다. 운봉고원의 험준함 앞에서는 버스도 힘에 부치는지 느릿느릿 고지를 향해 전진해 갔다. 그리고 약간 시간이 지난 후 고도차 때문에 귀가 먹먹해질 즈음에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까딱 실수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차도의 경사를 봤다. 그러한 험준함은 운봉가야가 강력한 외부세력과 맞서는 가장 큰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산에 둘러싸인 지세를 봤을 때 전북가야는 외부와 전혀 교류가 없는, 고립된 국가 형태를 띄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이 지역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이다. 육십령과 치재를 통해 경남지역에 위치한 가야 연맹국들이 백제의 중앙과 교류했기에 외부세계와의 접촉도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한다. 이렇듯 외적의 침입을 막기 좋은 지형을 확보하고 동시에 외부문물의 교차로까지 장악한 점은 전북가야가 번영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철의왕국 운봉가야
철은 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산물이었다. 서역의 히타이트부터 중국의 제나라까지 철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는 철광석 채취부터 제련까지 모든 것을 국유화했었다. 철이 지금의 핵무기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기준으로 봤을 때 전북가야는 핵보유국이었다. 산악지형에서 양질의 철이 나왔기 때문이다. 운봉고원에 올라와 국도를 쭉 따라가서 선유폭포라는 곳 근처에 왔다. 버스에서 내려 여행의 가이드를 맡은 곽장근 교수님을 따라 산 속으로 들어갔다. 쓰러진 나무가 많아 들어가기 힘들었는데 “전북가야는 탐험을 해야 한다”는 곽 교수님의 말이 이해되었다. 마침내 다다른 산 속에는 철광석을 제련하고 남은 부유물인 쇠똥과 아직 제련되지 않은 철광석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이런 곳이 몇 군데 더 있다고 한다. 아직 제철시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 곳 ‘고기리 제철유적’은 부유물로만 추정해도 고령 대가야의 자랑인 야로 제철유적 보다 몇배는 거대한 규모로 전북가야가 강력한 무력을 지닌 국가라는 것을 보여줬다. 운봉 땅의 철이 거대한 무력을 의미했기 때문에 철에 대한관심은 운봉가야 멸망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신라와 백제의 운봉쟁탈전이 이를 증명했다. 백제 무왕은 운봉을 노리고 수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운봉이 백제의 영토가 된 후에는 침공이 뜸했던 것으로 보아 전적으로 운봉의 철을 노린 전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적관리와 가야에 대한 관심
전북가야의 고총 약 300여기가 장수, 운봉일대에서 발견되었다. 전북가야의 고분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때문에 고분안에 유물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 진행되는 고분발굴은 내부의 유물 발굴 목적보다 고분내의 건설양식을 역사적인 사료로 쓰는 목적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고분들의 관리상태가 좋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남원 두락리 고분으로 현재 남아있는 고분은 약 40여기. 현지주민들이 농지개간 등의 목적으로 훼손하고 남은 것이다. 고분군이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지금도 훼손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을 뒤쪽에 있는 고분은 위에서 감자가 재배되고 있었고 고분을 허물고 건물을 짓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는 장면이었다. 영남의 가야유물이 보존, 관리되고 있는데 반해 전북의 가야유물은 방치, 훼손되고 있었다. 전북이 오로지 백제의 영향권이었고 가야는 그저 남의 역사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식을 바꿀때 이다. 가야도 우리지역의 역사이다. 가야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쓸쓸히 묻혀있는 전북가야를 이제는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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