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문화란 서구에서 생긴 말이지만 처음에는 물질문명과 동의어처럼 사용되다가 의미가 확장 됐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활동의 정수란 의미로 문화란 말을 썼습니다. 지금도 문화인이라고 하면 일정한 교양과 격식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좁은 의미의 문화이고 보통 인류학이나 사회학이나 말하는 문화는 훨씬 더 폭이 넓습니다. 문화를 아직도 인류학에서는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공유되고 있는 개념은 문화가 사회적 사실의 총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 사회체계나 상징체계, 물질 등을 총망라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화비평에서 쓰는 문화란 개념은 사실 인류학에서 얘기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과 좀 다릅니다. 문화비평가들이 쓰는 문화의 개념은 보통 영국버밍엄학파의 문화학 이론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에서 차용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비평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화비평은 단순히 장르비평으로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비평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비평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일단은 예술비평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회비평 쪽으로도 논의해보겠습니다. 먼저 예술비평의 현황과 문제점이 무엇인지 짚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홍석찬 | 공연을 하는 입장이라 공연을 보고 그에 대해서 평을신문이나 「문화저널」 같은 예술잡지에 실린 것을 보고 ‘우리 작품이 어땠는가’ 객관적으로 평을 짐작을 하죠.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연출가나 아니면 그 잡지를 구독하는 사람, 신문을 구입하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좀 적극적으로 적어도 리뷰 형태로 쓰지 않더라고요. 왜 그런 일이 있을까 했는데 비평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이지않다, 믿음이 안 간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합니다. 한 이야기를 또 한다는 말도 많고요. 비평하시는 분들이 전문적이지 않고 또 다른 예술을 하고 계신 분 이어서 제대로 꼬집지를 못하고 있더라고요. 저 분의 비평은 좀 상투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고 방금 주례사 비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공감합니다. 그래서 전문 비평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 몇 분이 전문적인 활동을 하는데 그분들만 하시기는 상당히 벅찹니다. 2013년도에 연극 부문에서 반년이 흘렀는데 연극 창작품이 올라갔는데도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비평은 두세 개밖에 안 되는 현실입니다. 그분들이 그런 비평들을 하셨는데 그것이 미덥지가 않고 이에 대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들이 있고 하니까 비평하기도 힘들고요. 했다 하더라도 지면이 할애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데 비평이 또 혹시 다른 형태로 변화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도 인터넷에서 공연 후기를 받기도 하는데 일반 관객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놀라울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작게는 공연이 끝나면 뒤풀이나 합평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틀이 확실히 변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문화저널 초창기 비평을 많이 봤습니다. 그때 날카롭게 비판을 했던 비평 세력들이 지금은 안 보입니다. 그분들이 정책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분들에 대한 비평은 누가 할 것이냐 이런 생각도 듭니다. 비평 문화라고 하는 것이 그런 점에서 단절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런 것조차도 비평할 수 있는 자리나 공간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형로 | 4~5년 전에 전북민예총 공연을 3년 정도 맡아서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체에서 공연을 다루는 과정을 보면, 외부적 평가가 주를 이뤘습니다. 비평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아주 강하죠. 물론 기대를 많이 해서 그렇게 비평이나 비판의 목소리가 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것이 추상적 표현이라 그 속에 스며든 은유적인 것들을 읽어야 되는데 외향적인 것만 접근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자라든지 아니면 나름대로 문화적 주체 선도세력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다방면들의 교수들이랄지 그 분들의 평을 보면 썩 피부적으로 와 닿지 않는 이야기를 합니다. 과연 70~80년대 디제이 다방이라든지 클래식 애호가들이 갖고 있는 냉정한 기호성에 대한 어떤 편애적인 측면보다도 오히려 더 떨어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작품 활동 공연을 했을 때 어떤 예산을 받아서 하는 것들은 자기 검열이 있어요. 이게 좋은 건지 잘못된 건지. 자기 비평을 어쩔 수 없이 써야 되는 경우엔 오히려 그런 건 냉정하게 자기를 검열할 수 있고, 그런 건 참 좋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작품을 자기가 더 잘 알고 꼬집을 수 있는데, 그걸 분명히 제3자적인 입장에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거든요. 어떤 분은 처음 부분만 보고 가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식의 누가 왔다는 것만 파악하고 그것을 들어가서 씁니다. 첫째는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를 해야 하고요,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 만큼이나 비평가들은 오히려 더 그래야 합니다. 곡을 하나를 만들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은 이를테면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를 위해 일주일 간 연주했다고 했을 때그걸 비평하기 위해서 일주일이 아니라 열달을 더 듣고 70일을 더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평다운 비평이 나오고요. 그래야 그 사람이 예술가의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비평가에 대한 프로그램이라든지 육성,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하루 아침에 되는 건 아니겠지만 문화부 기자분들이 전공도 다 다르고 관심분야도 다르겠지만 문화예술측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니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분석할 수 있는 부분을 총체적으로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기자 분이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요. 제가 약간 간섭을 하자면 그게 우리 판의 허약한 문제점입니다. 문화부 기자가 그 다양한 장르, 음악만 하더라도 클래식 고전음악 대중음악까지 귀도 다 다릅니다. 그런 모두를 기자가 전문가들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바라는 것은 조금 무리일 수 있는데요. 지역 신문사가 예산이 풍족해서 전문기자제도를 둘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한겨레신문에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라고 거의 비평에 가까운 글들을 쓰는데 사실 중앙일간지에서도 그 정도 퀄리티를 가지고 쓸 수 있는 문화부 기자는 몇 명 안 되거든요. 그런 부분은 서로 감안 해주시고, 김미진 기자의 답변 들어보겠습니다.
김미진 |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지역의 비평가가 소수이기 때문이고, 지면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나오는 글들이 지역 신문밖에 없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지역 일간지 기자들이 전 분야들을 공부를 하고, 특히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들은 더 공부를 하겠지만 또 많은 만남과 더 스킨십이 있었던 사람들을 다루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 많이 알고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자들이 자연스레 시선을 두고 바라보려고 하는 부분은 문예진흥기금이나 좀 큰 돈이 들어가는 것들입니다. 현장취재를 가서 예산이 잘 집행되고 잘 쓰이고 있는지 봐야 하니 큰 행사를 취재 하고 보는 겁니다.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있어서 앞에 잠깐만 보고 쓰는 것은 아니고 사실 통화를 한다든지 더 취재를 한다든지 분위기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쓰는 것입니다. 보도자료를 받아서 예고 기사 쓰는 것 외에는 현장에서 리뷰형식을 쓰는 것은 전문가 집단 이야기를 듣고 현재의 것도 같이 섞어서 기사를 쓰는 상황이에요. 지역 일간지 기자들이 쓰는 기사 중에 ‘어느 문화예술인은’ ‘한 문화예술인은’ 이런 멘트들 많이 보셨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거 너지?’ 하고 묻는데 사실 아니거든요. 홍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부분 문화인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내놓고 말하는 걸 꺼려합니다. 지역문화계에 행사들은 말 잘하는 사람들이 비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차후 불이익에 대한 부분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술가와 비평가가 나눠지지 않은 혼재된 지역문화판 현실에서 전문적인 평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어렵다고 판단되고요. 예전에 어떤 기자가 공연 리뷰 기사를 썼는데, 그것을 보고 누군가가 개인 페이스북에 “젊은 펜대를 아무렇게나 갈겼다”는 평을 남겼더라고요.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비평의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식견이 물론 필요하긴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나 예술인들을 쉽게 연결해줄 수 있는, 그런 쉽고 재미있는 평론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전주국제영화제 같은 경우 관객 평론가 제도를 통해서 영화 좋아하고 글 좀 깨나 쓰는 친구들이 평을 쓰면서 나중에 평론가의 길로 가는 사례들도 있었거든요. 좀 더 건강하고 재미있는 비평문화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예술인들도 자기의 예술 활동에 대해서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각 세울 필요 없이 좀더 마음을 열어 뒀으면 합니다. 서로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형로 | 신문이라는 특성상 여러 가지 공연을 문화부에서 담당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지금 같은 경우엔 인터넷도 있고 여러 잡지도 있고 하는데 그래도 비평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는 전문성이 문화부 기자라는 퀄리티가 있거든요. 더더욱 애정이 있고 그런 걸 주문하는 예술가적인 입장에서는 더 깊게 몰입하고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는 측면에서 가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수영 | 처음에 포럼 제안을 받고 고민이 많이 됐어요. 전북지역에 비평과 담론이 없다고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이런 총대를 메고 가려는 사람은 없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첫 번째, 시대가 변화했습니다. 이전에 문화비평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시대적 변화에 적응에 실패한 거라 볼 수도 있습니다. 오기 전에 옛 기사를 쭉 찾아봤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고민은 비슷합니다. 2000년 6월에 전북문화개혁회의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전북문화개혁회의에서 “전북지역에 문화정책 전반에 대한 경제와 감시를 위해 결성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선언문을 더 읽어보면 “현 단계 문화정책은 시민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시대의 문화적 과오를 답습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지금 문화단체나 문화 활동하시는 분들이 하고자 하는 것들은 사실 2000년부터 추진 해왔던 겁니다. 2003년 9월에 전북민예총이 설립된 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활발한 운동을 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2008년 어느 시기부턴가 민예총이 가져야 하는 부분들의 힘이 떨어집니다. 2003년 민예총 토론회 관련 기사를 보면 “민예총이 행정과 사업 쪽으로 가고 있다”, “관중심 문화행사에 집중하면서 문제에 봉착했다”고 자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꼭 그 단체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 문화비평이든 문화를 고민할 수 있었던 그 결집체가 많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니까요. 저도 문화포럼 이공이라는 이름으로 왔지만 지역에서 문화운동적 성격으로 뭔가를 선도한다기보다는 포럼을 통해서 어떤 담론을 만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현 시대를 읽는 것을 좀더 전문적으로 해야 한다, 라는 것에 방점을 맞췄어요. 내부에서 토론을 하면 그것을 표현하는 사업을 해야 하지 않겠냐, 시대를 읽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문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람’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하는 모든 것들이 문화고 사람과 그 사람 행위를 하는 것이니까요. 지금 비평과 담론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문화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 지점, 80년대에 지역을 선도해 왔던분들은 문화라고 하는 민주적인 의미를 강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통로가 희미해진 겁니다. 전체적인 사회적인 민주화가 진행이 되면서 혼란을 겪었고 그때 대표적으로 계셨던 분들은 관에 많이 흡수 돼 계십니다. 지금은 관 밖에서 비판 한다기보다 관안에서 정책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되나, 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치열한 자세나 이런 부분부터 다시 고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관안에 계신 분, 밖에 계신 분은 밖에 계신 분대로 역할이 새롭게 형성되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회 |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문화연구 창에 고형숙 팀장도 오셨는데요. 미술 얘기도 잠깐 듣고 갑시다.
고형숙 | 미술 분야는 지나친 호평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시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술은 작품을 관찰하기 보다는 평을 쓰는 분들이 학연이나 지연에 연관 돼있고, 작가 자체가 평을 받고자 할 때는 자신에게 긍정적인 써주길 원하는 사람에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전에 같은 경우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었지만 갈수록 개인적인 성과가 그것이 자기의 결론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장르를 떠나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문화를 관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현상만 보는 거죠. 관객 몇 명이 왔고, 그런 것들.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또 자기 스스로 관찰의 대상이 됐을 땐 호평이든 혹평이든 관대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한다 생각합니다. 비평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게 아니기 때문에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장르를 넘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 | 강성민이 쓴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란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학계를 문화예술계로 바꾸면 정확히 다 맞습니다. 첫째 ‘스승 비판 금기’, 두 번째가 ‘전공 불가침 금기’, 그리고 ‘동종 업계 간에 서로 봐주기’, 마지막으로 ‘보수와 진보의 문제’ 이 정도만 해도 오늘 할 얘기가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형숙 | 전시를 하면 좀 암묵적인 약속이라 해야 되나? 서로 전시에 가도 작품에 대해서는 잘 얘기하지 않아요. ‘열심히 했어’, ‘잘했어’ 하는 말 이외에 별다른 평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동종업계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되게 모호하게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모호한 긍정이나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고요. 제가 학교다닐 때 서로 작품에 대해 비판하자는 수업을 했었는데요. 굉장히 내부적 반발이 많았습니다. 좀 평가 받기를 거부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요. 미술 분야는 그런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형로 | 예를 들면 대사습놀이이라든지 상을 받았다 하면 개인의 상이 아니라 선생님의 상이 됩니다. 내부적으로 알려진 건 기사 한줄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상품을 팔고 그걸 선생님께 돌리는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직접 국악에 밥을 먹고 사는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눈치를 볼 일도 없지만 그만큼 스승이 절대 시각이 되면서 내부적으로 어떤 판소리에서 오히려 바디를 옮길 때 역적 소리를 듣고. 옛날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요. 지금도 잔재나 뿌리가 제가 경험해본 것, 주위사람들 봤을 때도 지금도 없지 않아 있는데 그런 건 세대교체를 통해서 소멸되리라 생각합니다. 문화 운동이라든지 포럼이라든지 대외적으로 접근 방식에 있어서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그런 힘들을 역량을 모을 때 불가항력적인 것들도, 조금씩 무너질 거라 생각합니다.
사회 | 말씀 하신 것처럼 존경의 마음으로 드리면 상관이 없겠지요. 그런데 그게 관례화 되면서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하는 게 문제죠. 그게 도제형식의 스승관계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부모자식처럼 가깝고 그런 권위도 있고, 그렇게 때문에 그만큼 가부장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극판은 어떻습니까?
홍석찬 | 아까 사회자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중에서 ‘전공불가침’의 경우는 이야기할 기회도 안줍니다. 그리고 문진금 같은 기금들의 정책이 어느 시기에 방향이 많이 달라졌는데 그것이 우리 비평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문진금을 받으면 성과가 이제 관객수나 지표, 성과물로서 보도자료 비평에 관한 리뷰나 복사해서 내야 되는 상황이니까요. 먹고사는 문제에 관련돼 있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말을 쉽게 못합니다. 그래서 동종업계 봐주기 같은 것이 암묵적으로 진행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뻔히 알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 공연을 하면 반성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전북연극협회의 자문단과 고문단으로 구성된 평가단을 만들어 실제로 공연평하는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을 리뷰로 쓰는 거죠. 실천이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지켜나가면 문화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회 | 조금씩 우리가 건들기 힘든 부분까지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서 아까 제가 잠깐 언급 했던 보수와 진보 문제를 한 번 얘기해 보죠.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북예총과 전북민예총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두 단체의 구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현 시점에서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반문하게 됩니다. 사례를 들어서 한 번 논의를 진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예술인복지법에 관한 건대요. 여기 계신 분들의 개인적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이수영 | 불합리한 조건들도 있지만 사실 반드시 필요하다고봅니다.
홍석찬 | 작년 12월부터 시행 됐죠. 형편이 어려운 예술인이 아플 때 진료를 해주고 지원을 해주는 경우를 겪었기 때문에 적극 환영해야 마땅한데요.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어떤 이익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장기적인 고민은 없다고 봅니다.
이형로 | 작년인가 많은 예술인에게 설문조사가 왔었죠. 3일에 걸쳐서 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술인을 노동자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인지가 쟁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저 생계비를 시급 오천 얼마라고 하는데, 과연 예술인들이 시급 오천 원으로 자기 예술활동을 계량화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형숙 | 요즘은 예술인이 너무 많잖아요. 기준은 모호하긴 한데 저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 | 문제는 ‘왜’냐는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문학계만 보면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대한민국에서 백명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죠. 이 분들도 복지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이분들은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술을 하던 하지 않던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보편복지의 혜택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예술인만 따로 복지법을 만들어서 보호해야 하는가요? 보평타당한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더 어려운 문제가 또 하나있습니다. 예술인을 어떻게 규정하고 누가 규정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사실 예술인을 규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묘한 게 내부에서 예술인복지법을 실제로 추진하는 집단은 예총 같은데, 가끔이라도 표면으로 담론화 하는 집단은 민예총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김미진 | 아까 예술인들을 가난한 이미지로 만드느냐고 하셨잖아요. 그런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러다보니까 민예총에서 주장하는 게 그쪽 아니야? 이렇게 흘러가는 거죠. 그리고 이 법안이 최고은 작가로부터 나왔잖아요. 그 사람 성향이 그쪽 아니야? 또 이런 얘기가 나오다 보니까 마치 민예총이 법안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만들어졌을 때 그만큼 파이를 가져갈 수 있는가를 판단하면 됩니다. 더 발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 대처할 수 있는 단체가 훨씬 유리하고 사실은 주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 | 예술인복지법에 대해서 민예총 내부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죠. 이 법안이 실행되면 권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인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거고, 그 규정에 의해서 복지 대상이 되냐 안 되냐가 결정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런 문제를 민예총 내부에서조차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김미진 | 만나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다들 예전 이십대 삼십대 때야 챙길 가정도 없고 다들 열심히 토론도 하고 이념싸움도 했겠지만 이제 개인화가 됐잖아요. 집에서 혼자 SNS 하면서 혼자 얘기하고 누구의 답변을 듣지 않고 그런 문화영향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수영 | 전북예총과 전북민예총이 정책적으로 가장 다른 게 뭐냐, 예총은 사실 문화의 민주화 정책을 앞장서서 말했던 곳이고 고급문화 저변확대를 시키는 인식이 강했잖아요. 거기에 비해 민예총은 사실 문화 민주주의를 외쳤던 곳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운 동적인 부분과 예술을 결합해서 많이 갔고, 문화 민주주의 정책을 대표하는 예총과 민예총 담론이 계속 쭉 갔어야 했는데 민예총이 어느 순간부터 문화 민주주의 정책을 끌고 가는 담론들을 놓쳐가는 거죠.
김미진 | 정책 하는 사람들과 가깝기 때문이죠.
사 회 | 이런 과정을 보면서 최소한 여기선 일반적 통용되는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진짜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예총과 민예총이 보수와 진보의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고 정책을 제안하거나 예술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자리에서 더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도립미술관장 사태를 보면서 느낀 건데요. 아직도 전북의 문화판에는 뒷담화나 민원제기와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현안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많이 생기곤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바람직한 공론화, 또는 담론화는 아닌 것이지요. 각자 해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홍석찬 | 작품로 활발한 평가받는 곳이 연극 쪽인데, 시상제도가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부분에서는 암묵적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일종의 지역 안배를 하거나 적당한 나눠주기 식 같은 겁니다.
김미진 | 그런데 최근 우리지역 예술판을 보면 괜찮은 자리에 외부 사람이 많이 와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선 왜 얘기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역축제 공연에 불만을 얘기하면서 기사 좀 쓰라하시는데 정작 본인들한테 인터뷰를 청하고 글을 청탁하면 안 받아주시더라고요. 이걸 가지고 폐쇄적이다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것을 떠나 지역문화의 핵심 자리에 외부 문화 인력들이 와 있는 것에 대해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홍석찬 | 그런데 초빙을 하는 주체들이 예술가들이 아니고 예산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됩니다.
고형숙 | 외부의 시각도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단체나 시설이 많이 생겼고 인력이 부족하다해서 많이 늘긴 했지만 그 인력들이 문화운동을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김미진 | 내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는 지적을 하면서도 공개적인 담론이 안 되고 뒤에서만 얘기가 나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 부분입니다.
이수영 | 그런 부분을 만나서 얘기해야 하는 겁니다. 지역에 누군가 오면 서로 이런 이야기들을 해야 하는데, 담론이 안 되고 뒷담화가 되는 거죠. 판을 잡고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형숙 | 문화예술이 아무래도 공기금을 받으니까 뒤에서 더 눈치를 보게 되는 거죠.
김미진 | 지역에 후원받을 데도 없고 그래서 비평을 못하게 되는 거고요.
이형로 | 그래서 사회적기업이나 문화협동조합이 필요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홍지서림 내에 전북작가들의 코너가 있다던가, 하나의 음악사에 전북작가 음악인들이 공연한 앨범을 따로 코너로 만든다던가 하는 것들이요. 제주도에 가면 제주 고유의 특산품을 사고하는 것처럼 전주에 오면 전주비빔밥도 중요하지만 그 지역의 예술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게 특산품이죠. 그런 것들을 시의 도움을 받아서 의무적으로 만들면 좋을 것같습니다. 동문사거리가 예산적으로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 같은데 작가들이 기반이 될 수 있는 네트워크라든지 프로세스를 형성하면 좋지 않나 싶습니다.
사 회 |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가고 있는데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이야기로, 대안이 무엇이 있을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형숙 | 지역 문화예술에 대해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북문화예술계는 별로 욕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적당한 규격 안에서 문진금 받고 적당히 적당히 이런 분위기입니다. 욕망히 사라진 것은 이 판에 자율성이 떨어졌고 비판 문화도 떨어진 탓입니다. 공기금에 신경을 쓰지만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지역의 공이익은 받고, 평가는 외부로 나간다던가 하는 것을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홍석찬 | 좋은 작품을 만들고 내부에서 평가도 합니다. 좋은 작품 만들기 위해서 평가를 하는데 이게 한계가 있습니다. 단점이 하나나 두 개, 또 다른 관점이 나올 수가 없어요. 다른 예술 장르라 하더라도 ‘저 사람은 나와 같은 관점으로 보고 있구나’하고 공유를 하고 있을 때, 요즘 시기에 맞는 협업이라는 형태로 진행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관점들이 다양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관점을 위해서는 그것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비평가들이 발품을 털어서 다른 지역에서 예술가들은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외롭지만 그 고민들을 해줄 때 우리도 ‘홍지서림 한 코너에도 작가들의 것을 모아놔야 겠다’ 이런 고민이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수영 | 오늘 좀 장르별 패널이 오셔서 장르비평으로 많이 흐른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와 유리됐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비평 따로 사회비평 따로는 아닌 것 같아요. 오늘 사회비평적인 고민을 이야기 하려다가 깊게 못 들어간 느낌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아까 고 선생님이 욕망이라 표현하셨는데요. 예술이 지금 시대에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정말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십년 이십년 전에 비하면 많은 이들의 문화적 수준이 올라갔다, 어떻게 예술이 그 역할을 해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그렇게 쭉 고민해온 사람이 관에 들어갔다면, 정책에 휘둘리는 게 많이 있는데, 흡수되신 분들은 그 안에서 대안적인 모습을 해야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도 광주사례를 들으면서 큰 아태전당 같은 큰 전당이 들어올 때 시민단체에서 굉장히 강한 거버넌스를 요구하면서 지자체에, 그것을 광주에 특성에 맞게 변화시킨 사례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전주는 과연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 큰 시설이 들어올 때 전주 사람들은 뭘 요구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깨면서 저희가 이런 자리가 자꾸 만들어져야 되는데 되는데 하면서 잘 안됐던 것을 마당에서 만들어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것들을 얘기만 하지 말고 실제 얘기들이 자꾸 만들어져서 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거버넌스 제안들도 하고요. 바로 대안을 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창하고 이공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판과 판이 자꾸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김미진 | 개막식에 가서 공연 하시는 분 보거나 공연장에 갔는데 그림 그리는 작가들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서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모습이 응원하게 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예술인들이 지역 언론 활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 플레이라고 하지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역문화발전에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면, 자신 개인적인 이익만 취하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지역 언론이든 마당에서 나오든 문화저널이든 지역 매체들에 애정을 가지고 같이 만들어 가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 지역에 열 네 개쯤 매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질적으로 언론의 역할을 하는 것은 2~3개 정도밖에 안된다고 봅니다. 문화저널이 오는 11월이면 창간 26년을 맞는다고 합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역사에 기록될만한 지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초창기 역할과 지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텍스트 중심의 지면인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쪽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문화저널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화저널 또한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지면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활동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아까 이야기 나왔던 협동조합이랄지 새로운 자발적 모임을 통한 작은 실천의 모임도 많이 생겨났으면 합니다. 비슷한 수많은 어떤 과정들이 쌓이고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언젠가 이런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이 비평의 어떤 토양이 기름져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