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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간첩의 신체를 빌어 탄생한 히어로, 가족 가치를 수호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경태 영화평론가(2013-07-03 22:35:11)

서사적 결핍을 뛰어넘는 흡입력
장철수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놀라운 속도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뿐만 아니라 평단의 반응도 전반적으로 냉담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원작 웹툰의 방대한 분량을 담아낼 수 없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에 따른 서사적 불완전성이다. 그로 인해 각 등장인물들에 대해 충분한설명을 할 수 없어 그들의 변화하는 행동에 대한 설득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 영화는 이러한 서사적 결핍을상쇄하고도 남을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다행히도(!) 흠집 없는 서사적 완결성을지닌 영화라고 해서 흥행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며, 반면에 영화 속의 다른 요소들이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면 비록 서사에 균열이 있더라도 관객들은 기꺼이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는 간첩의 신체를 빌어 탄생한 히어로들이 가족을, 그리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진심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형 히어로들
북한의 남파특수공작 5446부대의 최고 엘리트 요원인 ‘원류환(김수현)’은 남한에서 2년째 동네바보로 위장한 채 슈퍼집에서 일하며 당의 작전지시를 오매불방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고위간부의 아들이자 특수부대에서 원류환과 자웅을 겨루던 실력자 ‘리해랑(박기웅)’이 남한으로 내려와 로커 지망생으로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에 합격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끝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역대 최연소로 남파된 공작원인만큼 실력이 출중한 ‘리해진(이현우)’은 고등학생으로 분해 이들과 합류한다. 이들은 모두 어린나이에 특수공작부대에 들어와 가족을 담보로 목숨을 건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서 살아남은 최고의 인간병기이다. 북한의 특수부대는 열악한 환경과 비과학적인 훈련법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신체적/지적 능력을 키우는데 있어 보다 효율적인 공간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북한은 남한에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 즉 순전히 ‘인력’에 의해 후천적으로 초능력자가 양산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세계로 거듭난다. 그들은 가장 한국적인 특수성 속에서 탄생할 수 있는 한국의 ‘엑스맨’이자 ‘슈퍼맨’이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듯이 북한은 공작원을 철저하게 세뇌시켜 확고부동한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 있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 ‘한국형 히어로’들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고뇌하며 흔들리는 영웅의 초상이 덧씌워진다. 마치 돌연변이인 ‘엑스맨’이 자신의 초능력을 숨기고 평범한 인간들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것처럼, 원류환과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역할에완벽하게 빙의된 채 ‘일반인’처럼 살아간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이웃이 간첩일 수 있다면, 그들은 또한 밤마다 옥상 위를 마구 뛰어다니고 뛰어난 감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예축하는 초능력자일 수도 있다. 여기서 그들이 정말 들켜서는 안 되는 신분은 간첩이라기보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들인 동네바보/로커 지망생/고등학생이라는 가짜 신분이며 남한의 그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육체적/지적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슈퍼맨’처럼 낮에는 평범한 동네주민으로 밤에는 악당을 처리하는 히어로로 살아간다. 원류환은 실종된 꼬마를 찾기 위해 동네를 누비며, 흠모하던 여인을 성추행하는 그녀의 직장상사를 응징하고, 무명의 재즈 뮤지션에게는 미국으로 입양된 딸의 주소가 적힌 쪽지와 비행기값을 손에 쥐어준다. 히어로의 신체가 간첩의 그것을 압도한다.

삶의 의미, 가족
이들이 지닌 히어로의 신체는 (유사)가족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탈이념적 가치관이 덧붙여지며 그 매력을 배가시킨다. 가족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이념을능가하는 가치로서 이들의 행위에 있어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하며 북한의 자결 명령에 불복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원류환이 북한에서의 혹독한 훈련과남한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의 안위때문이다. 그리고 리해진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조장 원류환에 대한 동경으로 삶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는다. 그를 지키기 위해 목숨조차 포기하는 리해진의 태도는 의무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에 기원한다. 그는 조장을 지킨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을 지킨 것이다. 끝으로 리해랑은 남파에 앞서 조원들의 가족들을 수용소에서 모두 풀어주면서 가족의 가치를 수호한다.그런데 이들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의 투항도 거부하면서 이념 대립으로 자신들을 파국으로 몰고 온 원흉인 북한과 남한을 모두 부정한다. ‘인생 뭐 있어? 즐기다 가는 거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무정부주의적쾌락과 허무주의적 죽음충동에 휩싸여 있는 리해랑의 태도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선택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의 악순환을 끊고 의미있는 삶/죽음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탱했던 삶의 순수한 목표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이들에게 두려운 것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지켜왔던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원류환이 죽음의 문턱에서 슈퍼 아주머니가 쥐어준 통장을 보며 오열하는 것은 그 의미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특정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허상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가족과도 같은 동료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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