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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대타로 등장해 스타가 된 음악가들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7-03 22:34:38)

스포츠 경기를 보다보면 중요한 순간에 대타가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보곤 합니다. 이때 대타가 제 역할을 해내면 짜릿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요. 클래식 음악에서도 대타가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스포츠 경기의 대타와 클래식 공연에서의 대타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대타를 전문으로 하는 전문 선수가 있지만 클래식 공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명 연주자가 다른 이의 대타로 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대타는 무명의 연주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또 하나 다른 점은 스포츠 경기에서는 대타의 등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조차도 작전의 한요소이지만 클래식 공연에서는 대타의 등장을 바라는 관객은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그럼에도 클래식 공연에서 대타가 등장하는 일은 주로 오페라 공연에서 많이 생겨납니다. 오페라 공연은 많은 연주자들이 참여하는데 한 사람의 컨디션이 나쁘다 하여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대역을쓰곤 합니다. 실제로 많은 스타들이 다른 사람의 대역으로 무대에섰다가 기회를 잡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신인들이 이런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라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1923~1977)를 꼽는 분들이 가장 많을 겁니다. 마리아칼라스는 대타로 무대에 섰다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그리스계 이민자의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매우 어렵게 음악공부를 이어갔고 이탈리아로 건너 와 지방 소극장을 전전하며 무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 칼라스에게 행운이 찾아옵니다.당시 오페라계를 주름잡던 최고의 프리마돈나는 레나타 테발디(1922~2004)였습니다. 레나타 테발디는 참으로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소리로 엄청난 팬을 거느린 당대 최고의 디바였습니다.1950년, 레나타 테발디는 세계 3대 오페라극장인 라 스칼라좌의아이다 공연에서 주인공 아이다로 출연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공연 며칠 전에 쓰러지고 맙니다. 이미 전석 매진으로 표가 팔려나간 터이라 극장 측은 급히 대역을 찾았습니다. 이때 대역으로 출연한 이가 마리아 칼라스입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레나타 테발디의 목소리에 비해 거칠고 힘이 넘치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는다소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는 레나타 테발디가 표현하지 못했던 아이다의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드라마틱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연기력 때문에 거친 목소리가 빛을 발했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관객을 완벽하게 사로잡았고 스타덤에 오르며 그 길로 라 스칼라의 전속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1951년에는 레나타 테발디와 같은 조건으로 한 무대에서 노래를부르게 되는 지위까지 올라섰습니다. 이후로 이 두 사람은 누가 더뛰어난 소프라노인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1950년~60년대는 바로 이 두 소프라노가 지배하는 2대 프리마돈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 20세기 최고의 테너는 누구일까요? 여러 사람이 거론될 수 있겠지만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를 빼놓을 수 없죠. 파바로티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후원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했지만 미래를 확신할 수 없어 초등학교 보조교사와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여기저기 오페라의 단역으로 출연하였습니다(심지어는 출연 예정인 가수가 시간이 늦어 제 시간에 못 오면 긴급 땜빵 가수로서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1961년 고향인 이탈리아 중북부지역 모데나의 작은 극장에서 라보엠의 로돌프 역으로 정식으로데뷔했습니다. 이 공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이 공연에서 파바로티가 부르는 ‘그대의 찬손’을 유투브(http://youtu.be/G890jG02RbI)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뒷부분에서 보통 테너와 위대한 테너를 가르는 기준처럼 사용되는 high C(높은 도)와 그에 감탄하는 청중들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하지만 시골 극장에서의 성공이 곧바로 행운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지방 극장을 전전하면서라보엠의 로돌프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1963년 런던의 코벤트가든 극장에서 긴급 호출이 왔습니다. 당대 최고의 테너였던 주세페 디 스테파노가 독감으로 로돌프역을 못하게 되자 대역 출연을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파바로티는성공가도를 걷게 되었습니다.

파바로티 못지않게 유명한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역시 대타로 출연하여 행운을 잡았습니다. 도밍고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지만 멕시코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1961년 멕시코시티 가극장에서 바리톤가수로 데뷔했고 1962년부터는 이스라엘의 국립오페라단 등 변두리 극장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68년 기회가 왔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으로 출연요청이 온 것입니다.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이었는데 뛰어난 기량을 펼쳐 이 공연으로 세계적인 테너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다양한 오페라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가진 테너가 되었고 전세계 오페라 무대와 음반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지휘자 중에서도 대역으로 스타가 된 지휘자들이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카라얀과 쌍벽을 이뤘던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이 그랬습니다. 1943년 어느 날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독일에서망명한 유대인 지휘자로 당시 67세의 관록이 넘치는 거장 브루노발터(1876~1962)였는데 공연 직전 고열에 시달리며 병석에 누었습니다. 시간에 쫓긴 뉴욕필은 공연 당일 오전에 뉴욕필의 부지휘자(실제로는 보조지휘자였습니다)였던 25세의 햇병아리 번스타인에게 지휘를 부탁했습니다. 레퍼토리는 슈만의 ‘맨프레드 서곡’, 헝가리 출신 미국 작곡가 로자의 신곡,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 등으로 낯설고 쉽지 않은 곡들이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지휘자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없이 그대로 무대에올라갔다. 하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공연은 CBS가 미국전역에 생중계하였는데 다음 날 모든 일간지 문화면에서 망명한 유럽의 거장 대신 미국에서 성장한 ‘made in USA’의 젊은 거장이 탄생하였다며 대서특필하였습니다. 1년 후 번스타인은 피츠버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또다른 지휘계의 거장 토스카니니(1867~1957) 역시 대역으로 지휘대에 올랐다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토스카니니의 지휘자 데뷔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본래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습니다. 1886년 6월 30일 그가 속한 오케스트라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악단과 지휘자간에 불화가 심했고 가수들 또한 파업을 선언해 원래 지휘 예정이었던 레오폴도 밍게스가 지휘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휘자로 카를로 수페르티라는 사람을 섭외했는데 이 사람마저 막이 오르기 전에 악단과 언쟁이 벌어져 화를 내며 홀을 떠나버렸습니다. 급히 수습에 들어간악단 측은 부지휘자 아리스티데 벤츄리를 지휘대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중들이 음악이 엉망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야유를보내왔습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악단은 공연을 중단하고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공연 때마다 모든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토스카니니를 지휘대에 올려 연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지휘라고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토스카니니의 데뷔 무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무대에서 토스카니니는 거침없이 악단을 리드해갔습니다. 1막이 끝나자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내왔습니다. 브라질에서 느닷없이 지휘자로 데뷔한 토스카니니는그 해 이탈리아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고 지휘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일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이것이기회가 될지 아니면 위기가 될지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오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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