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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네 도시로 보는 중앙아시아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9 - 포스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영화 ②
관리자(2013-06-05 10:14:33)

타지키스탄 영화는 독립 이후 다른 나라와 사뭇 달랐다. 1991년부터 수도 듀샨베에서 오래 끌어오던 파업이 동족살해의 내전(1992~1995)으로 확대되면서 타지키스탄의 영화산업은 완전히 중단상태를 맞았다. 그리고 전쟁의 타격으로 유능한 감독들은 이주민이 되어 여러 나라로 흩어지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국제무대에서 크게 성공한 타지키스탄 영화는 거의가 이민 감독들의 작품이었다. 마이람 유수포바의 <황색들판의 계절>과 바흐치야르 후도이나자로프의 <형제>(1992)가 대표적인 예인데, 두 작품은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타지크필름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1949년생인 유수포바 여감독은 정확히 말해서 독립세대의 감독은 아니다.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30편이 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1989년에 단편 <창문>으로 극영화에 관심을 돌렸고 1991년에 첫 장편 <황색들판의 계절>을 만들었다. 이들 장·단편은 이삼 년 뒤 타지키스탄에서 일어날 정치적 지각변동을 미리 내다본 작품들로 평단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장편을 말하면, 산속의 들판에서 양치는 두 소년이 마을 입구에서 신원불명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며, 시체의 매장을 놓고 종교적 시각 차이로 전 마을이 한동안 들썩거리다가 결국 그곳의 전통 장례식에 따라 동네 남자들은 시체를 관에 넣은 다음 공동묘지에 파묻는다. 유수포바 감독은 ‘세상의 중심: 중앙아시아 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진의는 매장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태도나 신 또는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마을에 나타난 이방인 시체는 사람 속에 남아있는 인간애를 밝혀내기 위해 설정됐는데 사실 이 영화가 나올즈음에는 독립에 대한 환상은 이미 끝났었다”라며 영화의 모티브에 대한 설명을 했다.유수포파 감독은 <황색들판의 계절>을만든 뒤 모스코바에서 이민생활을 하고있었는데, 나는 2007년 모스코바 영화제에 참석하는 기회를 이용해 아비케이바의 소개로 그를 영화제의 카페에서 잠깐 만났다. 그에게 프린트의 대여 문제를 물어보자 자기가 갖고 있는 프린트를쓰라고 했다. 나는 유수포파 감독의 연출의도를 살리기 위해 <황색들판의 계절>과 <창문>을 한 프로그램으로 묶어상영하고 싶다고 하자 찬성했다.바흐치야르 후도이나자파로프 감독은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각본을 쓰고 영화제작을 하다가 80년대 중반에 단편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장편이 나온 시기는 1992년으로 그는 내전이 벌어지자 바로 독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형제>의 테마는 세대간의 소외와대립 그리고 모국의 산천에 대한 깊은정감과 애착이다. 전자는 20대의 형이 가난한 고모집에서 살고 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른 도시에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의사 아버지를 찾아가는 로드무비이며, 후자는 형제가 아버지 한에게 가면서 기차여행을 통해 겪게 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다채로운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타지키스탄의 평론가인 사둘로 라치모프 박사는 ‘타지크 영화’라는 글에서 “<형제>에서 감독은 도시의 젊은 세대가 겪을 수 있는 세대간의 대립 문제를 주제로 다룸과 동시에 타지키스탄을 횡단하는 철도여행을 통해 동족의 삶과 문화의 의미를 돼새김질한 것”이라고 평했다. <형제>의 프린트문제 때문에 후도이나자파로프 감독의 독일 사무실에 여러 번 연락을 했지만 매번 헛노릇이었다. 그러다 2008년 2월베를린 영화제서 타지키스탄의 ‘키노서비스사 & 듀샨베 비디오’의 책임자를 만나봤으나 타지키스탄 아키브에 프린트가 없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결국 전주영화제서는 클레이만 박물관장의 협조로 후도이나자파로프 감독이 모스코바 영화박물관에 맡겨놓은 프린트를 쓸 수 있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영화계는 독립 이후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 오랫동안 정지 상태에 머물러있었다. 독재자 사파르무라드 니야조프 대통령은 서구문화의 영향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관현악, 오페라, 발레 등을 배척했다. 그뿐 아니라 옛 소비에트 연방의 영화를 금지시킴과 동시에 90년대 이후에 나온 자국의 영화마저도 극장상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영체인 투르크멘필름 스튜이오는 그 자리에 새로 만들어지는 고속도로 때문에 1996년에 폐지되는 불행을 맞았다.

사실 내가 애초에 뽑은 영화는 코자쿨리 날리에프 감독의 1900년작 <만크르트>였다. 만쿠르트는 국민의 정체성 상실의 비극적인 과정을 다룬 영화이며 투르그메니스탄 말로 ‘좀비’라는 뜻인데,트르크메니스탄 쪽과 접촉하기가 어렵고 복잡해 무라드 아리에프의 <대지진의 밤>을 대신 프로그램에 올렸다. 그것도 2003년 프리부룩 영화제에서 ‘중앙아시아 회고전’를 주도했던 스위스 여자친구 마르티나 모틴의 도움을 받아 가능했다. 감독이 맡겨놓은 프린트를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알리에프감독은 <대지진의 밤>이 금지되자 미완성의 작품을 들고 러시아로 이주하고 8년(1996~2004)에 걸쳐 첫 극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1948년 수도 아쉬가바트에서 일어나 대지진을 극적 배경으로 지진으로 고아가 된 소년과 전통가치관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 할아버지가 폐허의 절망적인 현실에 굴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2006년 모스코바 영화제 동안에 알리에프 감독을 만나려고 여러 곳에 물어봤다. 하지만 아무한테서도 시원한 대답을 받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모스코바 필름박물관장 나움 클레이만이 수소문한 끝에 모스코바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작업 중이던 그를 찾아냈고 모스코바에서 나와 만나게 해줬다. 알리에프 감독은 내가 마르티나의 협조로 그의 영화가 전주영화제서 상영 될 거라고 말하자 “너무 힘들게 만든 영화였다”며 씁쓸히 웃으면서 모국의 참담한 현실을 한탄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가장 오랜 영화의 전통을 가진 나라다. 수도 타쉬켄트는 이미 초창기에 일부 소비에트의 대중적인 영화의 촬영소였을뿐만 아니라 1968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영화를 위한 ‘타쉬켄트 국제영화제’를 일년에 두 번씩 열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 이슬람 카리모프 첫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 영화계는 점점 폐쇄적으로 되어 갔다. 특히 1996년의 ‘민족주의 노선’ 선포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영화는 완전히 정부의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바뀌고 제작에서 배급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관련된 모든 건 정부에서 통제하고 관리했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옛 소비에트와 서구영화의 수입을 금지하고 그 대신에 영화인들에게 발리우드 형식의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권장했다. 카리모프의 목표는 국내영화의 시장 확립에 성공한 인도의 영화산업체계를 자국에도 설립해 우스베키스탄이 중앙아시아 영화의 중심지가 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독립 이후 영화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카자흐스탄을 바짝 따라붙을 정도로 대중영화 제작에 힘을 쏟았다. 참고로, 특별전에 들은 우즈베키스탄 영화 2편의 프린트는 정부소속의 ‘우즈베키노’에서 받아썼으며 이 조직체의총책임자는 한국계의 세르게이 김이었는데 현지에 직접 가보진 못했다.우즈베키스탄의 주요 감독 유수프 라지코프의 1998년 작품 <연설가>는 시대의조류를 민감하게 반영한 걸작으로, 감독은 우즈베키스탄 전통사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여성들의 끈끈한 공동체정신을 높이 찬양함과 동시에 소비에트의 지배세력이 중앙아시아에서 어떻게형성되어갔는지를 신랄하게 파헤친다.지방 지주인 이스칸더는 부인 셋과 행복한 삶을 누리다가 소비에트의 새로운‘여성해방 운동’의 정책으로 큰 위기를맞는다. 여성에게는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 금지되고 남성에게는 일부일처 가족제도가 강요되는 새로운 상황에 부딪치자 그는 어느덧 소비에트 정책을 선전하는 연설가로 뒤바뀌고는 ‘동방의 해방여성’을 표방하는 혁명가를 네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그러나 그녀는 공산당정책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감옥에서 아들을 낳는데, 이스칸더는 공산당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주저하지만 그의 세 부인들은 어린 아이를 정성껏 기른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들이 나중에 영화의 화자로 나타나 할아버지 이스칸더의 기회주의를 비웃고 조롱한다. 영국의 영화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글‘상상의 공동체’에서 “소비에트의 ‘휴드줌(얼굴을 가리는 베일)’은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적 성공이었으나 중앙아시아 지역인들에게는 강간이나 다름없는,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사건이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2천년대에 우즈베키스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는 엘킨 투이쉐프 감독이 2005년에 만든 <틴에이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20살 위인 라지코프 감독의 <연설가>와 많이 닮아있다.<연설가>에서 주인공은 소비에트 권력에 저항은커녕 전통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들에게 순종하는 비굴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고 <틴에이저>의 10대 소년은 할머니, 어머니, 누나, 여동생과 살면서 여성세계에 지겨움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래 기다리던 아버지가 나타나지만 그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부인이 불임증이라는 이유로 집을 떠났던 남자였을 뿐이었고 그의 출현으로 세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일하는 병원에서 데리고 온 고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런뒤 10대 소년은 어머니가 혼자서 힘들게 이룩한 ‘여성왕국’이 자신의 진짜 뿌리라는 걸 깨닫고 집안의 여성들과 가까워진다. 키르기즈스탄은 독립 이후 10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연출을 시작한 젊은 감독들의 영화는 전 중앙아시아에서 미학과 철학 차원에서 가장 뛰어난 ‘해빙기의 영화’로 평가 받았다. 소비에트 문화에 대한 저항과 서구화의 추구를 동시적으로 시도했던 카자흐스탄 영화와는 달리 키르기즈스탄 영화는 과거를 되돌아볼 틈새도 없이 재빠르게 전통문화로의 회귀를 꾀했다. 이들은 60년대에 키르기즈스탄 영화의 밑바닥을 다듬은 톨로무쉬 오케에프, 제나디 바자로프, 발라트벡 샴쉐프의 작품들에 심취됐으며, 특히 톨로무쉬의 <어린 시절의 하늘>은 “키르기즈스탄 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은 불후의 명작”으로 젊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악탄 아림 쿠바트(본명은 악탄 압디칼리코프)는 독립영화 세대의 대표적 감독으로 1993년에 만든 그의 첫 영화 <그네>는 자전적 3부작의 1부 작품이다. 중앙아시아의 독립 세대 감독들 대부분이 모스코바 국립영화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했던 반면 그는 국내 예술학교를 나온 뒤 스튜디오의 세트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단편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그네>는 키르기즈스탄이 소비에트 연방에편입되던 시기를 시대배경으로 소비에트 문화에 침범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일상생활을 재현한 흑백미학의 담백한 성장영화다. 아비케에바 평론가는 “악탄감독은 처음부터 민족의 뿌리와 전통 또는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민족적인 색체를 강하게 띄운 <그네>는 키르기즈스탄 동시대 감독들을 충격받게 하기 충분했으며 영화계 전체에 자극제가 됐다”고 호평했다. 그런데 <그네>는 74분의 중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재로 주목받는 어네스트 압디자파로프 감독의 20분짜리 단편 <버스 정거장>을 <그네>에 묶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93년에 제작된 <버스 정거장>은 영원히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버스정거장의 시민들과 버스정거장 옆을 도로를 휙휙 달리는 자동차들의 행렬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사무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키는 뛰어난 무언의 흑백영화다.

마라트 사루루 감독은 철학전공의 시나리오 작가로 연출은 80년대 말에 시작했다. 그는 악탄과 함께 키르기즈스탄의 가장 유명한 감독에 속하며 세 번째 영화인 <실크로드의 형제들>을 2001년에 만들었는데, 여니 독립 영화에 비해시기적으로 늦은 편이지만 초기영화의 특수성을 담은 내용 때문에 프로그램에 넣어진 것이다. <실크로드의 형제들>의 극적 구조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나눠져있다. 첫 번째 ‘금계’(꿩과 비슷한 금색의 새)는 겨울잠에 빠져든 숲을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깨우는 부분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대한 ‘실크로드’는 불행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일어나는 혼동과 광란이 겹치는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오미르바에프의 영화 <카이라트>, 후도이나자로프의 <형제>에서 기차는 사라지는 옛 세대의 상징으로 떠오르는데 <실크로드의 형제들>에서도 기차는 쓸모없는 과거의 소비에트 사회를 가리키는 알레고리로 쓰여졌다. 키르기즈스탄의 영화평론가인 굴바라 톨로무쇼바는 글 ‘마라트 사루루의 예술세계’에서 “<실크로드의 형제들>에서 감독은 지나간 20세기와 다가오는 21세기의 접합점을 묘사하고 있다. 기차는 재생가능성이 없는 소비에트 체제이며 기차 안의 악당으로부터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는 예술가는 현대판의 ‘함으레트’이다. 그는 숲의 아이들과 만나 정처 없이철도를 따라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데, 사루루 감독은 이들을 ‘진정한 정신적 유목민’으로 부른다”고 썼다. ‘실크로드의 형제들’은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의 합작이며, 유라시아 영화제서만난 제작자 사인 가브둘린은 “중앙아시아 특별전은 의미 있는 행사이기 때문에 프린트 사용에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며 프린트를 빌려주고 사루루 감독이 출간한 사진 책자 ‘침묵의 경험’을 선물로 줬다.

키르기즈스탄은 내가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징기스 에트마토프가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07년에 키르기스탄의 첫 영화제 ‘10인 풀러스’에 초청되면서 드디어 8월에 수도 비쉬켁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2006년에 유라시아 영화제서 만났던 키르기즈스탄의 영화평론가 굴바라 톨로 무쇼바가 초청헤 갔던 것인데 ‘10인 풀러스’는 영화제라기보다 일종의 워크숍에 가까웠다. 비쉬켁은 40도를 넘는 한여름이어서 행사를 치르기엔 너무 더웠다. 그러자 영화제 측에서는 행사장소를 이식-쿨 호수가로 옮겼다. 비쉬켁에서 차로 4시간쯤 걸리는 이식-쿨 호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아름다운 호수로 소비에트 시절에는 주로 러시아인들이 즐겨 찾던 휴가지였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콘도들이 텅텅 비어 행사를 치르기에 알맞았다. 7일간 열린 ‘10인 플러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영화학도들로 행사기간 내내 들끓었다. 그밖에 중앙아시아의 영화인들도 많이 참가했으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아 이상했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경제적인 문제로 두 나라 사이에 알게 모르게 마찰이 많은 듯했다. 아무튼 일주일 동안 나는 내 프로그램 영화의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각지역의 평론가들을 만나고 되도록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들의 모임에도 적극 참여했다. 무엇보다 악탄, 압디자파로프 감독들을 직접 만나 프린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말썽 많던 아카에프 대통령의 정부가 2005년에 ‘튤립 혁명’으로 무너진 뒤 키르기즈스탄의 영화산업은 파탄 직전에 놓여있었다. ‘10인 풀러스’에 발제자로 초청된 영화계의 대표자들은 거의 정지상태에 빠진 영화계의 장래를 놓고 걱정을 했는데, 경제적 빈곤이 어느 정도인가는 ‘톨로무쉬 제작소’의 여편집장의 말에서도 그냥 감지됐다. 그는 벼룩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낡아빠진 편집기를 가리키면서 “저게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편집기인데 고장이나면 고칠 돈이 없다”며 한탄을 했다. 톨로무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60년대 <어린 시절의 하늘>을 만든 키르기즈스탄의 명감독으로 그의 제작소는 독립 이후 ‘톨로무쉬 기념관’으로 바뀌어 일부는 감독들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다.그 중에는 악탄 감독도 들어 있었는데 그때 그는 프랑스의 제작자의 협조로 새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 영화는 3년 후 <빛의 도둑>의 이름을 달고 2010년에 로카르노 영화제서 국제초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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