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교과서에는 음악가들의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노라면 사진이 참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베토벤의 사진은 뭔가 고집도 있어 보이면서 꼭 다문 입에서는 굳센 의지가 느껴졌구요. 파리한 얼굴과 가녀린 눈빛의 쇼팽사진에서는 여성스러운 섬세함과 좋지 못한 건강상태가 느껴졌지요. 그런데 저는 여러 사진들 중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흰 수염으로 가득한 브람스 사진을 보면 마음씨 좋고 인자한 할아버지에게서나 느껴지는 기분좋은 따스함을 느끼곤 했답니다(실제로 브람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질을 하나로 융합해 내면서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간 창조적인 인물입니다. 요즘 같은 창조사회에 딱 맞는 사람이죠? 브람스가 활동하던 시절은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의 뒤를 이어 바그너, 리스트, 베를리오즈 같은 최고의 낭만주의자들이 활동하면서 낭만주의라는 음악적 양식이 만개한 19세기 중후반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인간의 감성을 현란한 음악적 기교를 통해 다채롭게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음악적 과장이나 의미없이 형식을 넘나드는 무정형적인 음악들도 많이 등장했습니다.이런 시대에 브람스는 낭만주의와는 배치되는 고전주의적 수법을자기 음악의 기본원리로 삼았습니다. 고전주의 음악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낭만주의와는 다르게 감정의 절제와 흔들림없는 균형, 그리고 규칙과 형식에 입각한 음악적 전개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음악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가 바로 베토 벤입니다. 베토벤은 인간을 음악에 담아낸 훌륭한 음악가였습니다.하지만 그는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숭고한 정신세계를 잘 짜여진 형식에 기초하여 전개해낸 인물입니다. 브람스는 이러한 베토벤의 음악적 장점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중시했던 바흐와 베토벤을 음악적 아버지로 삼아균형과 절제의 형식에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몰두했습니다(그래서 그는 베토벤을 계승한 유일한 인물로 불렸고,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는 브람스와 바흐, 베토벤을 묶어 음악의 3B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즉 고전주의적 형식을 바탕으로 낭만주의적 음악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음악적인 결과를 놓고 보면 브람스는 매우 창의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 다소는 낡아보이는 고전적인 수법을 다시 동원해 음악적 세계를 펼쳐갔던 것을 보면 브람스는 규범이나 가치관에 있어서 상당히 고전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브람스는 64년을 살면서 딱 두 여자만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브람스의 첫 사랑은 아가테 지볼트라는 소프라노 성악가였습니다. 브람스는 그녀에게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고 하니까 많이 좋아했던가 봅니다. 두 사람은 무려 9년간 사귀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음악계에서는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다. 이제 곧 결혼할 것이다라는 말이 퍼져나갔습니다. 이러 소문이 퍼지자 브람스는 겁이 났습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자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브람스는 아가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구속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당신에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기 싫다. 그냥 사귀기만 하자는 말인데 이런 편지를 받은 여자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것도 9년씩이나 사귄 사람이 말입니다. 아가테는 바로 절교를 선언했습니다(이때가 1958년, 브람스 나이 25세 때의 일인데 이때 이미 브람스의 마음에는 다른 여인, 뒤에서 얘기할 클라라 슈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 일로 브람스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자책감도 들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이 27세 되던 해인 1860년에 정식으로 발표된 현악 6중주곡입니다.이 작품 중 2악장을 ‘브람스의 눈물’이라고 한답니다. 이별 뒤에 겪은 공허한 마음을 담아낸 것이라는 이 악장은 어둡고 슬퍼서 영화나 드라마 삽입곡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좀 웃기는 것은 브람스가 이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41세 생일선물로 헌정했다는 것입니다). 브람스가 평생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15살이나 연상인 클라라 슈만입니다. 클라라 슈만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브람스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음악적 후원자였던 로베르토 슈만의 아내였습니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브람스가 20살이 된 1853년이었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무명의 신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아힘의 권유로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브람스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감탄한 슈만이 ‘음악신보’에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브람스를 극찬하는 글을 올리면서 브람스가 주목받도록 해주었습니다(사실은 슈만을 만나기 전에 브람스는 리스트를 먼저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리스트와는 뭔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슈만을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슈만부부는 브람스를 한 달간이나 자기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음악적 교류를 나누었습니다(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매일 같이 브람스의 작품에 대한 찬사가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이 기간동안 슈만부부와 브람스는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깊은 연민과 연정을 느끼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년 후 정신병을 앓던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브람스와 클라라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소식에 브람스는 한달음에 달려 클라라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클라라는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7번째 자녀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브람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깊은 충격을 받은 클라라를 혼신의 힘을 다해 위로했습니다. 그녀를 위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을 작곡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했던 곡의 주제를 이용하여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해 축하해 주기도 했습니다. 또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클라라와 함께 연주회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후 브람스의 삶은 클라라를 위한 삶이 되었습니다. 20세에 클라라를 만나서 64세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려 45년을 독신으로 살면서 클라라를 사랑하였지만 스승인 슈만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항상 한발짝 떨어져 주변에 머물면서 클라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런 브람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낭만주의가 극성인 시대로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사회적 제약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브람스는 자신의 경계를 지켜냈습니다. 1895년 클라라가 사망했는데 안타깝게도 브람스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며 클라라의 죽음을 애석해하던 브람스도 시름시름 앓다 11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런 브람스의 사랑을 담아낸 소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스와즈 사강이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입니다. 브람스처럼 14살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1961년 안소니 퍼킨스와 잉그릿드 버그만 주연의 ‘이수(離愁)’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흔히 사랑을 ‘배타적 소유관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니것, 내것하며 빼앗고 뺏기고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브람스는 소유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그래서일까요? 천상병시인이 가장 좋아했던 음악이 브람스의 음악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