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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일렁이는 슬픔 아래, 끈끈한 온기의 연대
가족의 나라
송경원 영화평론가(2013-04-05 11:59:18)

이름없이 짓밟힌 꽃들의 이야기
국가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이다. 하지만 무릇 힘이란 관성의 지배를 받기 쉬운 까닭에 조금만 방심해도 폭주하기 쉬우며 최소한을 유지하는 데 의의가 있는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은 종종 쉽게 그 선을 넘어 개인 혹은 가족의 권리를 침탈하곤 한다. 우리는 대개 그것을 역사라는 이름 밑에 묻어왔다. 거대한 역사의 그늘 밑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짓밟혀 피 흘리며 널려 있는 무수히 많은 이름 없는 꽃들이다. 아니 그 꽃들에는 이름이 있다.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 그리고 당신. 누구나 그 꺾인 꽃이 될 수 있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의 나라>는 바로 그 꽃들의 눈물에 관한 영화다. 수없이 이야기 되고 영화로 만들어졌기에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 아직 아무도 모르는 가족의 이야기이자 지금 이 순간 한 번 쯤 당신과 나눠봐야 할 눈물의 기억이다.

25년의 이별
1997년 여름 날, 도쿄에 사는 리애(안도 사쿠라)의 가족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25년 전 대북 송환 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넘어갔던 리애의 오빠 성호가 뇌종양 치료 차 일본에 방문한 것이다. 일본 사회 내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재일동포들은 우수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북한 측의 제안에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적극 동조하였고 그건 리애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일본과 북한 적십자간의 북송협정이 체결된 이래 20년 동안 9만명 이상의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했고 귀국자들 대부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집안의 기둥인 오빠를 보내고 금의환향을 기다렸던 리애의 가족들 역시 그 때로부터 무려 25년 동안 생이별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대북 송환이란 재일동포들을 처리하기 위한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사업이었기에 한 가족은 그렇게 국가의 입맛대로 생이별을 감수해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병때문이라곤 하지만 그런 오빠가 돌아온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25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족과 재회한 오빠 옆에는 항상 감시자 양 동무(양익준)이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빠 역시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다. 공유할 수 없는 세월에 무게에 숨이 막혀 올 무렵 다시금 성호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진다.

살기 위한 이해의 몸짓
재일동포의 수난사는 그간 몇 편의 영화를 통해 국내 관객들에게도 제법 알려졌지만 그 속살을 깊이 파헤쳐 들어가기엔 여전히 민감하고 어려운 소재다.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의 다큐멘터리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가족사를 조명했던 양영희 감독은 <가족의 나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사적인 가족사를 조명한다. 단 이번에는 극 영화의 형식을 빌어 감정의 진폭을 좀 더 크게 만들었다. 감독 스스로의 경험담에 바탕을 둔만큼 때론 세심하고 때론 과감하게 사건의 중심지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그러다 불쑥 내미는 질문들, 문득 스쳐지나가며 카메라에 담긴 가족들의 표정에 이 영화의 본질이 있다.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눈물, 그 조차 펑펑 터트리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을수밖에 없는 답답함. 그 모든 슬픔은 가족이란 얇은 꺼풀로 덮여 있다.가족이란 무엇일까. 국가란 무엇일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질문하다답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해답은 각자의 몫이고 영화는, 영화 속인물들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강렬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은 리애가 북한 감시자 양 동무(양익준)에게“당신이나 그 나라나 다 싫어!”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마저양 동무의 한 마디 “그 나라에서 나나 당신 오빠가 평생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 묻힌다. 그간 양영희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선명하게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체제의 비판이나 이런비극을 만들어낸 상황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이해의 몸짓에 가깝다. 국가, 체제, 이념, 그런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슬프고 답답해. 자연인 차원에서의 울부짖음. 하지만 그 슬픔에는 잘못된 체제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분노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상황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회한이 깃들어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어진 정서적 연대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분명하다. 그 이념이 무엇이든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제로 한 가족을 갈라놓은 것은 엄연한 폭력이며 악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잘못된 지점을 파헤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잘못이란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리애와 리애의 가족들이 선택한 최대한의 저항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모순투성이의 현실이지만 한 순간도 빛 바라지 않는 선의.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차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명제와 ‘우리는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미워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묵묵히 껴안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의 나라>가 조명하고 있는 가족의 실체다. 가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이해까지 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목적을 공유하는 집단도 아니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강제적으로 갈라놓을 수 없다. <가족의 나라>가 드러내는 것은 비극적 상황 그 자체라기 보단 그럼에도 이어지는 가족이란 이름의 정서적 연대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 필요한 건 핏줄이지만 가족을 가족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공감과 연대의 마음이다.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공감할 수는 있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모두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함부로 꺼내어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 연대. 그 끈끈하고 강인한 연대가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나아가게 만든다. 역사가 아무리 거대한 군화발로 짓이기려 해도 끝끝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뜨거운 어떤 것. 정(情), 한(恨), 흥(興)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어주는 끈끈하고도 질긴 감정의 파도. 일렁이는 슬픔 아래 도도히 흐르는 슬픔은 흘러내리는 눈물보다 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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