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3.4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깨져버린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7 -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영화들 3
임안자(2013-04-05 11:59:09)

2007년에 내가 전주영화제서 네 번째로 준비한 특별전은 체코슬로바키아 영화였다. 흔히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60대의 반체제 문화운동을 바탕으로 태어난 영화들이었는데, 알다시피 1968년 프라하에 불어온 자유의 봄은 소비에트 군대의 잔인한 침입으로 두 달도 못 가서 무참히 끝났다. 하지만 그 무렵에 나온 사회비판적인 영화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영화사의 ‘기념비적 수작’으로 높이 평가되면서 80년대 말 냉전이 끝남과 함께 차츰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2차 대전 뒤부터 한 국가로 존재하다가 1993년에 체코 공화국 그리고 슬로바키아로 갈라졌는데, 내가 스위스 바젤의 시네 클럽에서 처음으로 ‘프라하의 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기는 90년 중반이었다. 그때 이리 멘젤, 베라 치틸로바, 밀로스 포만 감독들의 압도적인 걸작들이 소개됐으며 90년 말경에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서 멘젤 감독과 치틸로바 여감독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이들 작품에 더욱 빠지게 됐다. 그러다가 2006년 특별전을 만들 생각으로 체코의 국립영화아카이브와 접촉을 시도하여 그쪽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아카이브의 해외담당자인 카렐 지마와 나는 몇달 동안 메일을 통해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프로그램에 오를 영화 13편을 뽑았는데 지마는 “한국과는 처음”이라며 열심히 내 일을 도와줬다. 그런 뒤에도 나는 현지 평론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의 자오라로바 집행위원장과 문학·영화 평론가 테레자 브드르코바와 토의를 한 끝에 13편 중에 여덟 편을 골랐다.

그러나 내 프로젝트는 한 순간에 모두 깨지고 말았다. 체코 영화 특별전에 대한 언론발표가 나가기 조금 전에 서울 아트센터에서 먼저 ‘체코의 누벨바그’프로그램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전주영화제가 열리기 두 달 전이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자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쪽에서는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지방보다 서울의 행사에 매체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을 게 뻔하기 때문에 체코 영화 특별전을 해 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미리 넘겨짚고는 내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쪽으로 일찍 결정을 내렸다. 과거에도 특별전 때문에 크고 작은 문제와 자주 부딪쳤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박살 난 일은 그게 처음이었기에 물론 실망스러웠다. 한데, 막상 아트센터의 프로그램 뚜껑을 열어봤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말은 ‘체코 누벨바그’였으나 주제에 들어맞는 영화는 두 세편뿐이었고 나머지 대여섯은 누벨바그와 상관 없는 최신영화들이었던 데다 작품수준도 예상이 어긋났다. 그래서 나는 혹시 아카이브에서 협조를 했는가 싶어 카렐 지만에게 물어봤으나 그는 “체코 대사관의 문화참사관이 대사관에 저장된 프린트 몇개를 가지고 아트센터의 프로그램을 추진한 듯한데 완전히 아마추어 수준이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행사를 취소하도록 권고했으나 그냥 진행되는 모양이다”라며 마뜩지 않은 듯한 대답을 했다.그런데 지마와 연락이 있고 나서 조금뒤에 체코대사관의 문화참사관으로부터뜻밖에 메일이 왔다. 그는 “카렐 지마한테서 당신의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아트센터 프로그램이 허술한 걸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체코 영화를 위하여 애초에 계획한대로 당신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좋겠다”며 미안해했는데한번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리 멘젤 감독이 애초 약속한대로 전주영화제에 참가하여 그나마 위로가 됐다. 멘젤은 ‘프라하의 봄’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그는 전주영화제 인디비전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았었고 그와 더불어 그의 명작 세 편이 소개됐는데 <가까이서 본 기차,1966>, <전신줄 위의 종달새>, <거지의 오페라>들이었다. 그 밖에도 그는 4월 28일 오후 2시부터 메가박스 8관에서 열린 한국영화학교 국제학술 세미나에 참석하여 ‘60년대 사회풍자 코미디의 시선’의 주제로 한국의 영화학자들과 함께 세시간에 걸쳐 토론시간을 가졌다. 한편, 앞에서 말한 세 영화의 상영은 서울 백두대간 영화관의 전 책임자 이광모 감독이 개인적으로 모집한 프린트를 빌려줌으로 가능했으며 멘젤 감독은 영화제의 행사가 끝난 뒤 이 감독의 초청으로 서울의 백두대간 영화관에서 서울지역의 관객과 조우했다.

터키 영화의 깜작 특별전
터키 영화의 프로그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특별전이 깨진 뒤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아주 짧은 시간에 서둘러 준비한 또 다른 특별전이었다. 전주영화제의 개막식을 코앞에 두고 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필요했고, 그래서 쓸만한 방법을 찾던 중에 2002년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서 봤던 터키의 ‘최우수터키영화 10편’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2002년은 마침 내가 준비한 한국영화회고전이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서 소개되던 때라서 터키 영화와 나란히 진행됐었는데, 시간부족으로 10편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전부터 알고 있던 일마즈 귀니, 외메르 카부르, 누리 빌게 제일란 세 감독의 영화는 챙겨 봤다. 그리고 터키영화 상영관에서 프로그램을 주선한 ‘앙카라 영화협회’의 아흐메드 보이시오구루 회장과 바자크 엠르 여부회장을 만났다. 이들은 한국 사람만큼이나 정이 많아 첫 만남임에도 나를 오랜 친구처럼 반가이 받아들였다.터키 영화 쪽으로 마음이 돌려지자 나는앙카라 영화협회 사무실에 전화를 하여바작에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말한 다음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소개된 프로그램을 나에게 넘겨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바작은 두말 없이 “회장에게 물어보긴 하지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는데 실지로 아무 문제없이 나는 이들의 프로그램을 고스란히넘겨받을 수가 있었다. 다만 열 편 중에두 영화는 프린트의 파손과 배급권 때문에 빠지게 됐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여덟 편만 받기로 했다. 비록 몽땅 넘겨받은 프로그램이었지만 이미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서 우수성을 인정 받았던 터라영화의 질적 수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앙카라 영화협회서 프린트 대부분을 직접 보내주는 바람에 터키 영화의 특별전은 아주 편하고손쉽게 이뤄졌다. 그런데다 2007년은한국과 터키의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해였던 지라 시기적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터키의 영화사를 빛낸 영화들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절충지대다. 그 같은 지리. 문화적 조건은 영화문화의 조기적 발전을 부추겨 이미 19세기 말기에 외국 영화들이 수입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이 끝나던 1920년에 터키 영화산업은 자립할 정도로 발전했다. 정확히 말해, 1914년 이래로 21세기 초까지 6천여편의 영화가 터키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중 4천 5백여 편이1960년에서 1986년 사이에 나왔다. 그리고 60년대에 이르러 터키 영화는 대중으로부터 가장 인기를 끌었던 오락으로 떠올라 터키의 오락영화 생산지인 ‘예실캄’은 60대 인기 스타를 중심으로 연간 300편에 달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제작품의 저질성과 스튜디오의 부족 그리고 또 제작기술의 후진성등으로 터키 영화계는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다가 90년부터 재질 있는 감독들이연출을 맡으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2007년 전주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는 60년 초부터 90년대 말 사이에 나온여덟 편이며 그 중에 여섯 편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상영기회를 가졌다. 여덟편 영화는 메마른 여름, 희망, 신부, 양떼, 마더랜드 호텔, 순수, 작은 마을, 태양으로의 여행, 이었으며 지금부터 이들을 연대 에 따라 하나씩 소개하려 한다.1964년에 나온 <메마른 여름>은 터키영화의 ‘감독 시대’를 창출한 메틴 에르크산 감독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서 처음으로 대상을 받음으로 터키 영화를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한몫을 했으며 ‘국민 영화’로 불릴 만큼 대중의 높은 인기를 누렸다. <메마른 여름>은 50년대 아나톨리아 지방을 배경으로 옛적부터 농부들이 공동으로 써왔던 동네에 하나 밖에 없는 물줄기를 주인공 오스만이 사유화함으로써 살인적인 싸움에 휘말리는개인의 이기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를 다룬 영화다. 터키의 영화 평론가이며 엡디테페 대학의 영화과 조교수인 아일라 칸부는 60년대 ‘메마른 여름’과 비슷한 영화가 더러 있었지만 시골 지역의사회적 조건과 권력관계 그리고 마을의대부분 땅을 차지한 고위층의 관리통치로 인한 지역의 불편등한 경제체제를 예리하게 파헤친 점에서 ‘메마른 여름’은동시대의 작품들에 비해 단연히 뛰어나다”고 평했다.

70년대는 텔레비전의 확장과 제작비의 증가로 영화계가 침체기에 빠졌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젊은 감독들이 영화계에 들어오면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주로 노동자층의 가난과 농부들의 도시로의 이민 등 그 당시 터키사회에 먹구름처럼 떠오르는 문제점을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1970년의 <희망>, 1973년의 <신부>, 1979년의 <양떼>가 대표적이 예다. 특히 터키영화의 전설적인 스타 배우 일마즈 귀니가 연출한 <희망>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다같이 크게 주목을 받은 7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영화는 가난한 서민층의 목을 죄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당함과 그런 사회에서 자유의 선택은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어차피 기회는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이 주어지는 불평등한 현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일마즈 귀니를 “클린턴 이스트우드와 제임스 딘 그리고 체케바라를 합쳐놓은 인물같다”고 했는데, 그는 감독 이전에 주로 깡패영화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마초형의 배우로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터키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로 기록에 남겨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터키 사회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쿠르드족의 출신으로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건 연출을 맡으면서였는데, <희망>이 인기 속에 상영되고 숱한 상을 받았음에도 당국으로부터 ‘전복적인’ 영화로 간주되어 한동안 상영이 금지됐던 것은 그의 크르드 출신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귀니 감독은 이런저런죄명을 쓰고 여러 번 감옥에 갇혔었고1982년 그는 감옥에서 <욜>을 만들었다. 1980년 군부의 쿠테타로 더욱 쪼들리는 크드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줄거리로 한 <욜>은 감독이 직접 각본과 콘티를 쓰고 연출은 귀니 감독의 지시에 따라 그의 조감독 세리프 괴렌가 대리 연출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자 귀니 감독은 감옥을 몰래 나와 프린트르 들고스위스로 갔다가 파리에서 편집을 마친다음 칸 영화제에 출품하여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 밖에 70년대의 주요 쟁점은 농촌의 폐허현상과 빈곤으로 인한 농민들의 집단이주 그리고 도시 노동자층의 가난이었다. 외메르 뤼트피 아카드 감독의 영화 <신부>는 농촌에서 살던 한 가족이 이스탄불로 삶의 터를 옮긴 뒤 대도시의 현대문화에 어쩔 수 없이 흡수되어가는 이질적 현상을 여성의 시점에서 조명됐다. 그리고 제키 왹텐 감독의 <양떼>는 터키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가부장제도가 현대화의 물결에 힘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민속학적으로 그린 것으로 각본은 일마즈 귀니 감독이 섰다. 줄거리는 전통적인 종교적 축제시기를 앞두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아들은 약간의 돈을 벌기 위해 양떼를 몰고 먼 도시를 향해 떠난다. 하지만 아버지를 도와주어야 할 아들이 기차에서 만난 도시 여자와 사라지자 망연자실한 아버지는 양떼를 지킬 겨를도 없이 서글프게 울부짖으며 아들 찾아 헤맨다.

1980년에 터키 영화계는 군부의 세 번째 쿠테타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 동안 비교적 자유로웠던 사회비판적인 표현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그 결과 자기검열에 묶인 감독들은 사회성보다는 사생활의 삶에 관련된 영화 쪽으로 기우뚱했다. 그런데다 제작환경 또한 군정의 반문화적인 영화정책으로 말미암아 피해가 심하여 일년에 많아야 대여섯 영화를 만들 정도였고 그마저 관객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음으로 대부분의 극장은 할리우드의 오락영화들로 붐볐다.그런 시기에 1986년에 나타난 외메르 카부르 감독의 <마더랜드 호텔>은터키 영화에 창작의 전환기를 마련한 걸작으로, 삶의 불가사의함, 기억과 현실시간의 엇물림, 환상과 현실의 뒤바뀜등 카브르 영화 특유의 걸출한 형식미가독특하다.마더랜드 호텔은 주인공 남자의 직장임과 동시에 삶터다. 그는 군정시대의 어둡고 살벌한 바깥과 거의 접촉을 끊은채 외롭게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호텔에서 머물던 여인을 남몰래 좋아하면서 그때까지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는듯하던 그의 세계는 차츰 현실과 환상이뒤엉키면서 혼돈에 빠지게 되고 여인이나타나지 않자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 카브르의 작품에 대해 뉴욕 앤솔로지 필름아카이브의 관장 로버트 할러는 “시간 그리고 비밀은 그의 모든 영화의 핵심이다. 그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정확하게 묘사하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우리에게 남는 건 수수께끼이며 비밀이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왜 주인공(들)이 그 같은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이 질문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90년대는 카브르 감독의 뒤를 이은 젊은 감독들의 영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누리 빌게 제이란, 제키 데미쿠부즈, 에심 우스타오굴루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들의 작품은 터키 영화를 밖으로 알리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됐다. 특히 누리 빌게 제이란은 오늘 터키영화의 제일인자로 꼽히는 감독이다. 1997년에 나온 첫 작품 <작은 마을>은 70년대 시골에서 3세대가 한 집에서 살면서 엮어지는 대가족의 일상적인 에피소드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4계절에 변화에 따라 바뀌는 극적 구조는 4막으로 나눠지며 사춘기에 든 소녀가 화자로 떠오른다. <작은 마을>은 현대화의 물결이 아직 미치지 못한 시골의 전원적인 아름다움과 농업지대 특유의 경제적 후진성이 공존하는 곳으로 마치 저물어가는 농경사회의 상징처럼 보이며 가족과 고향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마음과 시선은 그의 뛰어난 연출의 간결미를 통해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 밖에, 제이란 감독 특유의 연출법으로 간주되는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주제 그리고 저 예산의 제작방식은이미 첫 작품에서 시도됐다고 말할 수있는데, <작은 마을>은 여동생의 일기<옥수수 밭>을 감독이 각색했으며 그에부모와 친척들이 연기를 하고 친구가 조명을 맡는 등 전적으로 집안에서 구어낸 저 예산의 작품이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제작자인 제키 데미쿠부즈 감독은 주로 현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실업자나 죄수 또는 방관자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으며 두 번째의 작품 <순수>도 그렇다. 주인공 유수프는 10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지만 세상에 별볼일 없는 그는 계속 감옥에 남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우구르는 그가 갇혀있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그를 기다리고 우구르를 죽도록 사랑하는 베키는 유스프가 나타나자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택한다. 그러자 유수프는 베키의 자리를 이어받아 우구르와 여인의 딸을 데리고 떠돌이 삶을 한다. 터키 영화의 특별전을 대표하여 전주영화제에 참석했던 평론가 피라트 유셀은 <순수>에 대해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지키기 위해 밖의 모든 애착을 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이 택하는 외곬 삶은 그들 본디의 마음 또는 정체성에 직결되는 생존적 방법이다”라고 평했다. 여기서 한미디 덧붙이면, 데미쿠부즈 감독은 전주영화제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느닷없이 조산을 하는 바람에 오지 못하고 그 대신에 평론가 피라드 유셀이 왔었다. 예심 우스타오글루의 1999년 영화 <태양으로의 여행>은 어느 일간지의 기사를 감독이 각색한 것으로 비전문 배우들의 어눌한 연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키슬로프스키 감독의 오랜 촬영감독이었던 자세크 페트리키의 뛰어난 촬영술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신사실주의 형식의 뛰어난 수작이다. 터키에서 활동하는 열여 명 여성감독 가운데 국제적의 인지도가 가장 높은 우스타오글루 감독의 영화는 80년대 일마즈 귀니 감독의 사망 이후 지하로 사라졌던 크르드 민족에 대한 터키 정부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시 여론화 시킨 화제작이며, 숱한 국제영화제서 상을 휩쓸면서 ‘2천년 유럽의 최우수의 영화’로 뽑히는 영광을 끌어안았다. 영화는 시골 출신 메메트와 베르잔이 이스탄불에서 밥벌이를 하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쿠르드 출신에 대한 터키사회의 불공정한 차별대우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고향이 다르다 뿐 둘은 다같이 터키의 시민인데도 마메트는 자주 크르드인으로 잘못 찍혀 경찰의 조사를 받고 감옥에 갇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원인은 그의 검은 피부색 때문인데, 마메트의 운명은 검은 피부는 곧 쿠르드족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터키 사회의 반인류적인 정책이 낳은 비극적 희생자들의 상징이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이자면, 터키 특별전이 열리기지 전에 나는 앙카라 영화협회의 친구들로부터 팩스를 받았다. “터키 정부정부에서 태양으로의 여행을 프로그램에서 빼라는 연락이 왔는데 터키 대사관을 통해 연락을 받은 것 같다”며 친구들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태양으로의 여행>은 이미 국제적으로 다 알려진 영화인데다 프랑스의 개인배급사에서 프린트를 받아쓰는데 터키 정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터키 정부에서도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서 그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해 터키 정부는 스스로 검열의 나라임을 밖으로 드러낸 셈이다.

전주영화제의 특별전을 떠나서 하고 싶은 말은, 터키 영화는 21세기를 맞으면서 일종의 르네상스시기를 맞는 듯 했다. 2006년 터키영화의 국내 시장의 점유율은 60%에 달했고 할리우드의 영화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영화들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영화제서 수상하는 영화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오랫동안 금지됐던 이슬람 주제의 영화들도 심심찮게 나타나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겨 터키 영화의 전망은 아주 밝아 보였다.이 글은 2007년 터키 영화 특별전을 힘껏 도와준 앙카라협회의 아흐메드 보이시오글루 회장과 바작 엠르 부회장에 우정의 표시로 바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