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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4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미운 오리새끼, 백조되어 날다 - 초연에 실패한 명작들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4-05 11:58:24)

어떤 작품은 첫 공연부터 관객의 뜨거운 찬사를 받는가 하면 어떤 작품은 첫 공연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곤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초연 연주회는 기분좋은 설렘과 가슴 콩닥거리는 두려움이 교차하는 날일 겁니다. 음악사에 기리 빛나는 위인들의 작품 중에도 초연 연주회에서 뜨거운 맛을 본 작품들이 있습니다. 특히 그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는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데도 말입니다.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 <운명>은 서양음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금도 자주 연주되는 곡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초연에서 크게 실패하였습니다. <운명>은 작곡자인 베토벤의 지휘로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운명> 외에도 제6번 교향곡 <전원>도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연주회는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유는 이날 연주된 곡들이 너무 많아서 관객들을 질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날 연주회는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교향곡 두 곡과 피아노협주곡 등 모두 7곡이 연주되었습니다.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것이지요. 더욱이 이날 피아노 협주곡의 연주자로 예정된 피아니스트는 연습이 부족해서 베토벤이 대신 피아니스트로 나섰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지휘하랴 피아노치랴 정신이 없었겠지요. 결국 연주회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으로 인해 빈을 넘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작품 중 초연에 실패한 작품은 또 있습니다. 베토벤은 딱한 편의 오페라만을 남겼는데 <피델리오>라는 작품입니다. <피델리오>는 <운명>교향곡보다 3년 앞선 1805년 11월 20일 역시 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피델리오>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해내는 아내의 이야기로 베토벤이 너무나 공들여 만든 작품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좋지 못했습니다. <피델리오>의 공연을 알리는 광고가 처음으로 나간 그 다음날 나폴레옹의 군대가 쳐들어와 빈에 입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공연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군대에게 점령당한 빈 사람들은 오페라 공연이나 즐길 처지가 아니었고 공연장은 프랑스 장교들로 가득찼습니다. 문제는 이 프랑스 장교들이 독일어를 전혀몰라 <피델리오>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피델리오>는 딱 이틀 공연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어 이후 10년 동안 세 번이나 작품을 수정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 결과 <피델리오>는 손꼽히는 오페라작품이 되었답니다.

오페라 중에는 유독 초연에 실패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졌을 베르디의 19번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도 초연에서는 관객들의 비아냥을 들어야 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는 폐병에 걸린 거리의 여인이 순수한 청년과 사랑을 나누지만 청년의 앞날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후반부 여주인공의 노래는 비련의 여주인공답게 슬프고 동정심을 자아낼 만큼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초연 당시 폐병으로 쓸쓸히 죽어가는 여성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뚱뚱하고 건강해 보이는 소프라노가 여주인공을 맡았습니다. 그녀가 폐병으로 쓰러져 힘겹게 눈을 감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감동하기는커녕 비아냥거렸습니다. 더욱이 다른 배역들도 감기, 연습부족 등 컨디션 난조로 최상의 공연이 되질 못했습니다. 화가 난 베르디는 1년 2개월 후 다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때 여주인공은 깡마른 소프라노였습니다.이 보다도 이 오페라는 거리의 여인, 즉 매춘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서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내용이라는 이유로 검열에 걸려 무대에 올리지도 못하고 사장될 뻔했습니다. 이처럼 주인공들이 사회 밑바닥 인생이라는 이유로 초연에서 비판을 받은 또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입니다. <카르멘>은 당시 유럽사회의 최하층 빈민인 집시여인이 주인공입니다, 비제는 이 오페라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생동감 넘치는 선율로 화려한 음악의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초연에서 큰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우선 오페라의 주요 고객이었던 프랑스의 상류층들이 바람기가 다분한 집시여인이 주인공인데다 그 내용이 저속하다며 신랄한 비판을 해댔고, 음악 비평가들마저 바그너의 음악을 흉내낸 것 같다며 혹평을 했습니다. 비제는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석달 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이제 파리에서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오페라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오페라 중 초연에 실패해서 작곡가가 돈을 물어낸 경우도 있습니다. 베르디와 쌍벽을 이루는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19세기말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군 장교와 일본 기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나비부인>은 1904년 2월 17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당시 푸치니는 내놓는 작품마다 성공하여 흥행이 보증된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푸치니가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소문이 돌자 공연기획자들은 서둘러 선금을 주며 잇달아 공연날짜를 잡았습니다. <나비부인>이 초연되는 날 객석은 만원이었고 입장료 수입은 초연 공연 역사상 최고 기록을 갱신했을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객석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야유가 터져 나왔으며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초연 이후의 모든 공연들은 취소되었고 푸치니는 공연기획자들로부터 받았던 선금을 모두 되돌려 주어야만 했습니다. 공연이 실패한 이유는 2막이 1시간반이나 이어져 그 구성이 매우 지루했고, 동양적 선율과 기모노 같은 낯선 의상의 등장 등 그동안 보아왔던 오페라와는 매우 달랐기때문입니다.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푸치니는 작품의 일부를뜯어고쳐 3개월 뒤 다시 무대에 올립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초연에 실패한 후 작품을 개작해서 대성공을 한 또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최고의 발레음악으로 꼽히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그렇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2월 20일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3년 후인 1880년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지만 두 번 다 참담할 정도로 실패하였습니다. 이 공연이 실패한 이유는 먼저 당시 발레음악은 무용을 하기 위한 반주음악처럼 이해하기 쉽고 춤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었는데 이 작품은 무용곡을 넘어 음악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수준 높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의상이나 안무, 무대장치 등이 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한동안 묻혀 있다가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후 우연히 이 작품을 발견한 볼쇼이 극장측이 1894년 차이코프스키 추도공연에 2막만 공연하여 큰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인 1895년 정식으로 4막 전 공연이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 열성 팬들끼리의 다툼으로 초연이 엉망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1816년 2월 20일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 이곳에서 로시니는 17번째 오페라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보내는 등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당대의 거장이었던 조반니 파이지엘로라는 작곡가의 팬들이었습니다. 당시 파이지엘로의 나이는 76세. 그 역시 34년 전 똑같은 내용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발표했던 것입니다. 파이지엘로의 팬들은 당시 23세의 로시니가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무대에 올리려 하자 파이지엘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훼방을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쥐 때문이었습니다. 1막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무대에 쥐가 한 마리 타나났고 이 때문에 장내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그때까지 객석에서 화를 참고 있던 로시니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공연은 참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로시니는 이 작품을 계속해서 무대에 올렸고 마침내 파이지엘로의 작품보다 더 인정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도 초연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초연에서 실패했다고 버려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위대한 작곡가들은 우리에게 실패는 끝이 아니라 또다른 기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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