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대학교 도서관에 꽂혀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독일에 처음 유학 가서 받은 문화충격 두 가지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 문제였다. 그때는 독일도 우리처럼 분단국가였다. 그리고 거기도 우리처럼 종종 간첩단 사건이 터지곤 했다. 당연히 반공주의가 지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고, 서독의 사회학자 하버마스의 책을 소지해도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대학 입구에서 학생들이 큰 소리로 정부를 비판하며 신문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신문에는 빨간 글씨로 마르크스주의 그룹(Marxistische Gruppe)이라는 제호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개가식 중앙도서관과 학과 도서관에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 꽂혀있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있는 사회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서독에서 마르크스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기피하고 배제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한 사람의 경제사상가이고, 정치사상가였다. 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 연구를 이어갔고, 그의 사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얘기하는 주제였다.
독재의 정당화에 이용된 철학
일반 시민들은 철학사상에 대해 섬세하게 알지 못한다. 어렵기도 하고, 또 별로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기본 생활이 안정되면 사람들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관심 갖는 만큼 조금씩 수준이 높아진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서울과 대전에서 한 학기 시간 강의를 한 후 전북대 교수공채에 응모한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격동기였다. 그 때 민주화운동에 열중하던 청년들은 마르크스 사상을 단순화시켜 암기했고, 혁명을 일으켜 민주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자유를 말살한 군사독재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처절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단순명료한 혁명 사상으로 무장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파시즘 통치로 분류되는 유신과 5공화국의 정신적 지배 기제는 이데올로기 비판 교육이었다. 정치학 교수들과 철학교수들이 대학과 언론에서 이데올로기 비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친 것이다. 전문가인 교수들이 동서양 철학사상을 단순화시켜 군사독재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것은 너무도 잘못된 일이었다. 그들은 유신 이데올로 그들이었고, 전문지식을 엉뚱하게 잘못 사용한 어용학자들이었다. 철학자들은 그러한 이념비판 교육을 대학에 제도화시킨 연세대 이규호 교수가 철학자로서 가장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는 독일에서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이고, 서양철학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용어는 곧 자본주의 이념 비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세계적으로 사회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를 정반대의 의미로 전도시켜 제도화했던 것이다. 그건 너무도 무지한 사람이나 할 법한 일이었는데, 전문가인 그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철학자의 영혼을 팔아먹은 행위와 다름없었다.
아직도 우리는 충격적 상황 속에 있다
어버이연합 회원 쯤 되나? 60대 초반 남자가 핏대를 세우며 말한다. 조중동 TV가 전국방방곡곡에서 대선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나의 말에 대해 “조중동은 빨갱이야!” 어? “거기도 노조가 있잖아!” MB정권 5년 동안 우리의 정신문화 수준은 서북청년단이 설치던 65년 전으로 후퇴한 느낌이다. 앞으로 5년 동안 그것은 더 악화될 개연성이 크다. 전체 국민들 숫자에 비해 그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장악한 권력과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숨 쉴 곳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