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골대의 크기를 알아야 축구를 잘하는 것일까
몇 해 전, 아이가 중2 때의 일이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방에 들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곁눈질을 해봤다. 아이는 노트에 2.44 곱하기 7.32라는 숫자를 깨알같이 쓰고 또 쓰면서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게 뭘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아이는 축구 골대 길이하고 높이라고 했다. 체육시험 문제에 나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노트에는 가로 1.525m, 세로2.74m, 높이 76cm라는 숫자도 있었다. 그것은 탁구대의 크기라는 것이다. 참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러한 축구골대의 규격을 알아야 축구를 잘 하는 것일까. 또 탁구대의 크기를 알아야만 탁구를 잘 칠 수 있을까.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아이를 뉴질랜드로 조기유학을 보내고 3년 동안 기러기 아빠가 된 적이 있다. 순전히 다른 아이들이 조기유학을 가기 때문에, 애 엄마가 가야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6개월쯤 지나서 여름휴가 때 나도 뉴질랜드에 가서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방문해 보았다. 교실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한 학생의 아빠가 온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한가지씩 준비해오라고 하셔서 나를 위한 파티를 열어준 것이다. 나는 짧은 영어로 감사의 말과 함께 내 아이와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그때 본 뉴질랜드 학교의 체육시간은 그저 노는 것이었다. 승마, 골프, 럭비 등등 자기가 원하는 종목을 선택해서 푸른 잔디밭에서 그저 열심히 뛰어노는 것이 전부였다. 럭비골대의 규격이 얼마인지, 골프 홀의 지름이 몇센티인지 알 필요도, 테스트 할 필요도 없이 재미있게 노는 것이 체육시간이었다. 아이는 3년의 뉴질랜드 생활동안 정말 한국에서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얼굴엔 웃음이 넘쳤고,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는 듯했다. 아이가 3년의 뉴질랜드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공부도 관심이 없었고 모든 일에 풀이 죽어있었다. 그러는 아이에게 나는 ‘왜 공부하지 않느냐’고 화만 냈다.그러나 그 체육시험 공부를 하는 아이를 보고 난 다음부터는 그러지를 못했다. 내가 학생이라도 그런 공부를 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컨버전스시대에 맞는 교육을 대통령이 바뀌었다. 바뀌는 대통령마다 첫마디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창의적인 교육으로 바꾼다고 한다. 아마 그 말이 10분의 1이라도 실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교육이 아직도 이 모양일까. ‘학교 2013’이라는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였을까.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학문간의 경계도 없어지고 언제 어느 순간 세상을 바꾸는 스마트폰 같은 기기,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아직도 문과, 이과가 나뉘고 국영수 세 과목의 성적이 인생을 좌우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5년만 더 살았더라면 삼성전자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질문에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과연 이건희회장의 리더십이 스티브잡스의 컨버전스 능력을 따라갈 수 있을 지, 국영수의 성적으로 SKY를 나오고 삼성에 입사하여 이건희회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한국의 최고 엘리트들이 말랑말랑한 애플직원들과 인류의 생활을 바꾸는 ‘Innovation’의 경쟁을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바뀌어도 대치동 학원가는 밤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모든 교육의 최고가치는 몇 개의 명문대학에 맞춰져 있고 문과는 오직 경영대, 이과는 오직 의대에 그 목표가 맞춰져 있다. 그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졸업하고도 젊은이들은 끝없이 노량진 공무원시험준비학원으로 몰리고 KAIST를 졸업하고도 의대공부를 다시 하는 졸업생들이 늘고 있는 현실을 어디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날 새벽, 부산에서 서울 오는 KTX를 신규편성해서 응시자를 실어 나르는 이 코미디 같은 세상을 어디서부터 바꾸어야 할까.
‘성공에 대한 가능성’을 평준화하는 것부터
나는 그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능성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대학을 나와야 고등학교를 나오는 것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부모들은 무조건 대학진학을 고집한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와야 지방대학보다 대기업에 취업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서울의 중하위권대학의 입학점수가 지방 국립대보다도 더 높다. 의사자격증을 따는 것이 KAIST를 졸업하고 연구소에 취직하는 것보다 더 인생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에 의대쏠림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벤처기업을 창업하는 것보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것보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 더 안정적인 인생을 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공무원시험 재수생이 수십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등학교를 나와도 대학졸업자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대학진학을 고집할까. 지방대를 나와서 벤처기업을 창업해도 공무원보다 더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서울의 명문대를 고집하고 공무원시험에 올인할 것인가. 새로운 대통령은 이 ‘가능성의 논리’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교육부터 바꾸었으면 좋겠다. ‘생각해놓은 것’을 배우기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교육으로, 1등을 따라가기만 하는 교육이 아니라 1등의 영역을 창조할 수 있는 교육으로 말이다.
‘교육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두 잊은 뒤에 남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조금은 그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처럼 대기업에서도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고졸자들이 대졸자들보다 능력에 따라 연봉을 더 받을 수 있는 인사시스템이 나와야 한다.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인 폭스바겐의 베이징지사장이 독일의 고졸출신이라는 기사를 봤을 때의 충격이 상식이 되어야 한다. 또 공무원만 되면 안정적인 인생이 보장된다는 철밥통의 신화를 깨야한다. 공무원, 선생님의 세계에서도 능력이 없으면 퇴출될 수 있다는 기업의 논리가 적용된다면 그토록 공무원이 되기 위해 새벽 4시에 임시 편성된 KTX에 그토록 몸을 실으려 할까. 의대만 들어가면 의사시험 100%합격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깨져야 하고, 의대보다는 공대생이 더 성공할 수 있는 생각하는 엔지니어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학교교육을 바꾸어야 한다.
학문 간의 영역이 파괴되고, 파괴된 곳에서 어마어마한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컨버전스 시대에 맞추어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 ‘생각의 발견’을 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축구골대의 규격을 알아야만 내신성적이 좋아지는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하는 힘’으로 평가되는 학교를 하루 빨리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상상력의 천재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 떠오른다. ‘교육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두 잊은 뒤에 남는 것이다’ 라는 역설의 정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