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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2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첫날밤을 거부한 차이코프스키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2-05 10:36:40)

신혼 첫날밤,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밤이 끔찍했던 사내가 있습니다. 바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 I. Tschaikowsky 1840∼1893)입니다. 그의 첫날 밤은 왜 끔찍했을까요?

차이코프스키는 37세가 되던 해 10년 연하의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했습니다. 먼저 상대에게 다가간 사람은 밀류코바였습니다. 밀류코바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는데 차이코프스키를 열렬히 사랑하여 몇 번이나 짝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아파트에서 은밀히 만나자고 간청했습니다. 마침내 차이코프스키는 약간은 스토커적 성향을 보이는 밀류코바의 간청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에는 서로 다른 꿍꿍이가 있었습니다. 밀류코바는 어느 정도 차이코프스키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했지만(밀류코바가 차이코프스키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미 작곡가로서 명성이 높던 차이코프스키를 유혹해 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차이코프스키의 사연은 더 복잡했습니다.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스캔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스캔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젊은 여성이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요구하자 잠자리를 하지 않는 형식적인 부부관계, 남녀관계를 떠난 친구로서의 관계만 유지하자는 조건을 달아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여성과의 결혼생활을 통해 숨겨보자는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밀류코바는 결혼만 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지요. 첫날 밤 밀류코바는 당연히 잠자리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자리를 거부했고 호텔을 도망치듯 빠져 나와 차라리 죽겠다며 강물에 뛰어들기까지 했습니다.

밀류코바는 문란할 만큼 성에 대해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그녀는 바람을 피워 자녀를 3명이나 출산했습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를 잠자리로 끌어 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합니다. 아내의 끈질긴 잠자리 요구에도 차이코프스키는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완강히 저항했으니까요(아내와의 잠자리가 두려웠던 차이코프스키는 가짜 전보를 동생에게 부탁한 후 전보를 핑계로 집을 나가 파리로 도망치면서 별거에 성공했습니다). 결국 밀류코바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잠자리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절망과 증오에 휩싸인 나머지 히스테리성 발작이 잦아졌고 마침내 정신분열증을 앓다 사망하게 됩니다.

차이코프스키는 확실히 동성애자로 모스크바 게이클럽의 멤버였습니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은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1월 추운 러시아에서 콜레라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콜레라는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콜레라로 사망한 경우에는 시신을 소독처리하여 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차이코프스키는 사망 직후 시신이 공개되었고 많은 조문객들이 시신에 입맞춤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으로 차이코프스키의 사망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1978년 러시아의 음악학자인 알렉산드라 오를로바가 새로운 사실을 공개합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가 아닌 사적 재판에 의한 명예로운 자살로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예민하고 가녀린 성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소년기를 보낸 법률학교에서 동성애적 성향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법률학교는 귀족이나 힘있는 가문의 소년들이 다니는 학교로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고 내성적이고 겁많은 소년, 차이코프스키는 쉽게 동료들의 상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여성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여성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남긴 일기를 보면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면 큰 두려움을 가졌다고 합니다(딱 한번 결혼을 꿈꾸었던 여성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고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어떤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남성에게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누이의 아들, 즉 자신의 14살짜리 어린 조카를 사랑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일기에 보면 이 조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그들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이어갔는데 이 조카 역시 35세의 나이로 자살하고 맙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적 성향은 차츰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황실 측근인 귀족 스텐보크 페르모르 공작의 조카와의 염문설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린 공작이 차이코프스키를 법원과 황제에게 고발하는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나섰고 이를 전해들은 법률학교 동기들이 자신들의 과거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차이코프스키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러시아 정교의 영향 때문에 동성애란 매우 신을 모독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사형 또는 유배형에 처해질 만큼 부정한 행동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대법관, 검찰부총장 등 러시아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던 법률학교 동기들이 차이코프스키의 명예도 지키면서 자신들의 과거도 덮을 수 있는 방법으로 차이코프스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차이코프스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건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사실에 근접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가 끓이지 않는 물로 약을 먹은 후 바로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것이 공식 기록인데 어릴 적 사랑하는 어머니를 콜레라로 잃은 차이코프스키는 항상 콜레라를 조심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주장으로는 차이코프스키가 자살한 것은 맞는데 그 원인이 동성애가 아니고 오랫동안 플라토닉 러브를 해온 후원자 메크 부인의 절교 선언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유한 미망인, 메크 부인과 평생 서로 만나지 않고 편지교환만 한다는 조건으로(실제로 그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가벼운 눈인사만 한 채 끝내 서로 모른 척했다고 합니다) 14년간 1,100통의 편지를 교환하며 교제해 온 메크 부인이 어느 날 파산했다며(거짓말이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절교하자 그 배신감과 증오로 지병인 우울증이 도져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곡 6번 <비창>이 초연에서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하자 참담한 마음에 우울증이 심해져 비창 초연 8일 만에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에는 그가 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 상태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울증과 신경쇠약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감정적으로 기복이 심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역시 어떤 때는 매우 수준 높은 걸작이 나오는가 하면 매우 경박하고 수준 낮은 작품이 나오기도 할 만큼 기복이 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차고 화려하며 정열적인 작품을, 어떤 때는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감상적인 작품을 써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비창>에 대해 뮌헨의 한 정신과 의사는 입원 환자들에게 <비창>을 들려주면 환자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자살충동을 느끼곤 한다고 지적하면서 차이코프스키 역시 정신질환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하자 황제는 물론 러시아 국민들 모두가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 그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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