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전주국제영화제 3
관리자(2012-12-06 16:47:38)
낯선 세계와의 조우, 마그렙 특별전
시민에 가까워진 전주영화제
전주영화제는 2005년 6회를 맞으면서 설립시기부터 써왔던 ‘자유, 독립, 소통’에 ‘시민과 함께하는 영화제’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하나를 더 붙였다. 어느 영화제든 당연히 시민과 함께 하는 행사가 돼야겠지만 그 말을 특별히 강조했던 데는 과거 눈에 띄게 낮았던 시민들의 참여율에 대한 어떤 새로운 처방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민병록 집행위원장은 전북일보의 영화제 특보를 통해 “지난 5년 동안 전주영화제는 대외적으로 정체성이나 프로그램에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영화가 어렵고 홍보부족으로 대중의 참여를 끌어내는 데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며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대중성’의 영화제에 방점을 찍었다. 시의 중심지 고사동이 ‘영화의 거리’로, 영화관의 주변이 다양한 음악과 춤꾼들의 무대로 꾸며진 것도 ‘축제의 집중도를 높여 시민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큰 변화였으며 새로운 시도’였다. 물론 대중성의 강조는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났다. 정수완 프로그래머와 2004년 영화제를 떠난 김은희를 뒤이은 유운성 프로그래머는 “소재, 주제, 형식 면에서 과거보다 편안한 영화의 편수를 늘림으로 대중성 영화가 많아졌다”고 선언했는데 ‘단편영화’와 ‘영화보다 낯선’ 부문들이 줄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보다 낯선’ 부문의 경우는 편수가 적어진 대신에 실험영화의 대가들이 초대됨으로 오히려 이 부문의 수준을 한층 더 높였다. 그리고 과거 너무 많은 영화를 초대하여 심한 체증에 시달리던 걸 생각하면 2005년에 상영작이 100편 가까이 줄어든 것은 적절한 처사였다. 그 대신에 2005년에는 디지털 영화의 수용도를 부쩍 늘였는데 디지털 영화 발굴과 후원에 앞서왔던 전주영화제의 특성과 떼놓 고 생각할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비쳤다. 어쨌든 2005년의 전주영화는 좀 더 안정되고 세련된 모습으로 떠올랐고 그건 높아진 매체의 관심과 표가 매진되는 분야가 넓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관객평론제도는 관객의 시각을 반영화는 창구로서 참신했다.
전주영화제에 가담한지 2년이 되던 2005년 나는 프로그래밍 면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일했다. 예를 들어, 그 해 경쟁에 오른 10편 가운데 <앙 가르드, 독일>, <추수기, 러시아>, <스키조, 카작스탄>, <카사불랑카에서는 천사들이 날 수 없다, 모로코> 4편과 ‘시네마스코프’ 부문의 <나의 개 봉봉, 아르헨티나>, <다윈의 악몽, 오스티라아>, <피델 카스트로를 찾아서, 미국>, <살바도 아이엔데, 프랑스, 멕시코 스페인>은 내가 추천한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국제평론협회의 총무였던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풀라코프를 국제경쟁 부문 ‘인디비전’의 심사위원으로 데려오고 동시에 ‘발굴영화’의 2호인 마그렙 영화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아랍권 영화를 찾아간 이유는
‘쿠바영화’ 특별전은 내가 전주영화제에 가입하면서 구상한 ‘발굴 영화’의 첫 프로그램으로써 영화계와 일반 관객으로부터 모두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첫 시도의 대성공에 힘을 얻은 나는 곧 쿠바영화 못지 않게 새롭고 낯선 마그렙 지역의 영화의 눈을 돌렸다. 마그렙(Maghreb)은 아랍어로 ‘해가 지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아프리카의 북부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아가 이에 속하며 모두 이슬람 문화권을 공유하고 있다. 솔직히 그 이전에 마르렙 영화를 볼 기회는 별로 없었으나 80년대 중반 스위스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나세르 케미르 감독의 <사막의 방랑자들>과 90년 중반에 다시 본 그의 <비둘기의 잃어버린 목걸이>는 오래 전 책으로 읽었던 ‘천야일화’를 떠올리게 하는 영상적 신비의 극치였다. 케미르는 실지로 70년대 초에 튀니지의 메디나 지방에서 활동하는 ‘천야일화’의 해설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해설을 수집하면서 그에 영감을 얻어 4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1975년 그는 파리에 ‘천야일화’의 해설자들을 위한 아틀리에를 만들고는 ‘천야일화’ 해설의 부흥을 일으켰으며 1982과1988년에는 파리 샤이오국립극장에서 각각 한달 동안 스스로 ‘천야일화’의 해설자로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아무튼 케미르 작품을 본 뒤부터 나는 튀니지 영화에 떨쳐버릴 수 없었던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됐고 1994년 칸 영화제서 다시 ‘황금 카메라’의 심사대상으로 올라있던 무피다 틀라틀리 여감독의 <궁전의 침묵>을 심사하면서 다시 튀니지 영화의 매력에 깊이 끌렸다. 파리의 영화학교 IDEC에서 편집을 전공한 틀라틀리 감독의 첫 작품인 ‘침묵의 궁전’은 50년대 중반 프랑스로부터 튀니지가 독립되기 직전 친 프랑스 파의 베이 왕가의 궁전에서 노예로 묶여 사는 여성들의 삶을 바탕으로 격변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그린 아랍지역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여성영화였다. 안타깝게도 수상에 미치지 못하고 ‘특별 언급’으로 끝났지만 이 영화는 내가 마그렙 영화를 구상하는데 케미르 작품과 함께 절대적 동기가 됐다.
그 밖에 미국의 ‘9.11’사태를 다룬 영화 <11.09.01>도 시기적으로 내가 마그렙 영화 특별전을 짜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프랑스의 알랑 브리걍이 제작하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11명의 감독들이 공동으로 만든 이 영화를 2002년 9월 4일 쥬리히의 프레스 시사회에서 보고 나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바로 씨네21에 글(2002.9.17-10.1. 370호)을 썼는데, 한마디로 이 작품은 ‘9.11’사태를 빌미잡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이슬람 국가들을 공격하는 부쉬 정부에 대한 세계 영화인들의 강력한 항의와 비판이었다. 그 같은 반 아랍문화의적 분위기가 퍼지는 시기에 나는 2005년의 캐탈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전주영화제가 북아프리카의 먼 곳에 관심을 돌린 것은 2001년 9월11일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뉴욕 공격은 서구와 아랍문화의 전면 충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걸 빌미로 최근 서구에서는 아랍의 전 지역이 마치 테러리즘의 온상처럼 취급하면서 이슬람 종교나 문화에 대한 불신과 차별대가 심해지고 있으며 아랍문화가 꽃피운 인류의 귀중한 보물들이 미국의 최신 무기에 무더기로 파손되어가고 있다. 이런 수난의 시기에 아랍권의 문학, 음악, 연극, 영화들이 최근 유럽의 곳곳에서 비상한 관심과 호응을 받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찌 보면 아랍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 말로 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싶다. 마그렙 특별전은 그런 뜻에서 계획됐고, 한국에서 아직까지 마그렙영화 회고전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도 고려 했다…”.
카르타고 영화제에서 찾은 영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알고 있는 마그렙영화는 튀니지 영화 몇 편하고 90년대에 봤던 알제리영화 한 두 편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지에서 오는 용감이랄까, 나는 마그렙 특별전을 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2004년 칸 영화제에 민병록 집행위원장을 비롯하여 정수완과 김은희 프로그래머와 함께 참가했다. 아랍영화 전문가인 스위스 친구를 통해 칸에 가면 마그렙 지역의 영화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걸 들었던 데다 틀라틀리 감독이 온다는 소식도 받아놓은 터였다. 틀라틀리 감독은 <궁전의 침묵>를 계기로 알고 지나는 사이었다. 칸에서 나는 프로그래머들과 하루에 네다섯 영화를 봤는데 하루는 틀라틀라 감독을 통해 마케트 상영관 밖의 커피점에서 알제리 출신의 부부 감독을 만났다. 알고 보니 내가 본 알제리영화 두 편 가운데 하나인 <시타델, 1988>의 감독 모하메드 추이크흐와 그의 부인 야미나 추이크흐 여감독였다. 마침 프랑스에서 새 작품을 만들고 있던 이들은 내가 마그렙영화 특별전을 만들고 싶다는 소리를 하자 “아주 반가운 소식이”라면서 나에게 바로 그들 옆에 앉아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튀니지의 제작. 배급사 시네텔레필름 유로메디아툰의 대표 아흐메드 바하에딘과 카르타고 국제영화제의 여집행위원장 나디아 아티아였다. 추이크 부부 감독은 “아시아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카르타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나를 영화제에 초대하라”는 부탁까지 했다. 그러자 시네텔레필름의 대표가 먼저 나서서 “내가 초대한다”고 하면서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줬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는 영화제 조직위원회의 하나인데다가 튀니지 영화계의 거물에 속했는데 본디 마그렙은 아랍어 지역이지만 프랑스 식민주의 영향으로 불어에 익숙하여 우리는 불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2004년 카르타고 영화제(Carthago Film Festival)는 튀니지의 수도 투니스에서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열렸다. 바젤에서 튀니스까지는 비행기로 두어 시간, 10월 1일 이른 오후에 나는 카르타고 공항에 내렸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화제 직원의 안내로 내가 머물 아부-나와스 호텔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 곳에는 영화제의 임시 본부와 영화의 견본시장 등이 들어있어 튀니지에 처음 길인 나에겐 아주 편리했고 무엇보다 아랍과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의 영화인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됐었다. 그러나 조직과 정보 면에서 허술했다. 개막식에 가려던 나는 셔틀버스가 없다는 정보를 받지 못해 한참 헤맨 뒤에야 급히 택시를 타고 갔다. 개막식 장소는 ‘스포트 궁전 엘 멘자흐’였는데 저녁 8시로 잡힌 행사는 9시가 훨씬 지나서야 시작됐다. 사전 설명이 없으니 기다리는 이유를 알 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데에 습관이 된 듯이 서두르지 않고 군데군데 모여서 크게 떠들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있던 모로코 감독 하산 벤잘룬은 나를 향해 “프랑스의 귀빈이 탄 비행기가 연착한 모양이다”라며 그도 지루함을 참느라 애를 썼다. 그런데, 그 기다림 때문에 나는 벤잘룬 감독과 말을 나누게 됐고 또 나중에 벤잘룬 감독의 도움으로 모로코 영화계와의 접촉이 아주 쉽게 이뤄졌으니 기다림은 오히려 나에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드디어 개막식은 9시 반쯤에 시작됐고 국내외 귀빈들의 길고 긴 축사가 끝난 뒤에 레바논의 여감독 란다 사할 사박의 <연>이 화면에 떴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둘로 갈라진 마을의 한쪽에서 사는 드루즈 가족사를 통해 삶과 죽음 사랑 그리고 이스라엘 침범의 불합리성을 담아낸 뛰어난 작품이었다. 한때 중동의 주요 감독의 하나였던 사박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이 영화는 2003년 베니스영화제서 ‘은사자상’을 받은 받았다.
카르타고 영화제는 튀니지 정부의 문화부에서 1966년 아랍과 아프리카 영화의 발전을 위해 설립한 것으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을 통 털어 맨 처음 생긴 영화제며 시리아 다마스쿠스 영화제와 번갈아 행사를 치러왔다. 2004년에 제20회를 맞는 영화제는 설립시기에 생긴 경쟁부문에다 세 개 부문을 더 늘렸는데 장편과 다큐멘터리 비경쟁의 ‘국제부문’, 시나리오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프로젝트 아틀리에’, 다큐멘터리. 픽션의 ‘비디오 경쟁부문’이었고 그에다 시청각 제작품을 위한 4일간의 ‘국제시장’이 새로 생겼다. 그 밖에도 프로그램 몇 개가 더 있었고 그 중에는 10편으로 짜진 ‘모로코영화 오마즈’ 프로그램도 들어있어 샅샅이 봤으나 선뜻 끌리는 영화가 없어 실망했다. 모로코 영화는 2003년 칸영화제서 칸에서 본 파우지 벤사이디의 <천월>정도였기 때문에 10편 영화를 다 본 뒤에 나는 ‘시청각 제자품 마케트’로 갔다. 그리고 마케트에서 나는 ‘모로코 영화원’ 국제담당의 나싸디 압델라티프 대표를 만났다. 그는 내가 모로코의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자 마케트에 진열된 비디오를 함 묶음 주면서 시사실로 안내했다. 하지만 거의가 오락영화 수준이어서 거기서도 허탕쳤다. 그런 사이 나는 어느 날 호텔 로비에서 벤잘룬 감독을 다시 만났다. 내가 카르타고 영화제에 온 목적을 알고 있던 그는 나를 보자 모로코인 한 사람을 소개했다. 소개를 받은 그는 막 ‘모로코 영화 센터’의 부위원장으로 부임된 문화기자 출신 모하메드 바크림이었다. 벤잘룬 감독은 바크림에게 나를 마라케쉬 영화제에 초청하여 영화선정을 도와주라고 부탁을 했는데,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그 때 알게 된 바크림의 도움으로 두 달 뒤에 모로코를 방문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 영화제에 가기 전에 이미 나는 앞에서 말한 <궁전의 침묵>과 <사막의 방랑자들>을 프로그램에 넣을 생각이었다. 모두 4편을 고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두 편이 더 필요했는데 카르타고 영화제에 두 편을 찾았다. 누리 부지드 감독의 <재의 인간, 1986>과 마흐무드 벤 마흐무드 감독의 <인디언 썸머, 1999>이었다. 전자의 경우를 말하면, 튀니지에서 내가 만난 평론가들은 모두 <재의 인간, 1986>를 추천했다. 하지만 오래 전의 영화라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틀라틀리 감독의 친구인 한 제작자의 알선으로 어느 날 ‘영화제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부지드 감독을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부지드 감독은 내 사정을 미리 들었었는지 <재의 인간>의 비디오를 주면서 그 자리에서 그는 영화의 사용을 허락했다. 나는 그의 친절에 고마움의 표시하는 듯에서 전주영화제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서슴없이 참가하겠다는 대답을 주었다. 부지드 감독의 첫 작품<재의 인간>은 아랍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으로 간주됐던 억압적인 부권제도, 금지된 유대인과의 우정, 동성애자 문제에 과감히 도전함으로 튀니지아 영화의 방향을 180도로 바 꿔놓은 혁명적인 걸작으로 카르타고 영화제는 아랍 나라들의 심한 항의와 보수파 매체들의 상영금지 요구를 물리치고 그에게 1986년 대상 ‘금 타닛(Tanit)’을 안겨줬다. ‘타닛’은 기원전 카르타고 제국시대부터 전설로 전해오는 ‘달의 여신’을 뜻하는 아랍어이다.
그리고 <인디언 썸머, 1999>는 튀니지의 국제적 명성의 제작자인 하산 달둘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는 케미르 감독의 <사막의 방랑자들>의 제작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먼저 나에게 <인디언 썸머>를 추천했다. 영화의 제목은 석류가 익는 초가을에 갑짜기 불어닥치는 폭풍을 상징하는데, 영화는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딸을 아랍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강제 귀국을 시키는 아버지와 아프리카의 문화를 몸으로 익힌 딸과의 문화적 충돌을 통해 80년대 말경 튀니지 사회의 정체성 상실 문제를 가시화했다. 이 영화는 토리노 영화제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와 벨지움에서 영화를 공부한 마흐무드 감독의 <천과 하나의 목소리>는 수피즘 음악의 다큐멘터리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