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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 |
클래식 뒷담화
관리자(2012-12-06 16:47:00)
세종대왕, 우리 음악의 기틀을 만들다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는 정치의 계절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후손들의 존경을 받는 좋은 왕이나 지도자들은 모두 백성과 국민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 역시 오랫동안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이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음악학자들은 역대 지도자들 중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 음악을 통해서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 애쓴 최고의 지도자로 누구를 꼽을까요? 답부터 말씀 드리면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웠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으며,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당대의 학문을 집대성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우리나라 음악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이랍니다. 우리나라 음악사에 있어 세종대왕의 업적은 짐작하는 바 이상입니다. 세종대왕은 중국의 글자와 다른 우리만의 글자, 한글을 만들었듯이 중국의 음악과는 다른 우리 음악의 기초를 다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우리의 고전음악(국악)을 정악(正樂)과 민속악(民俗樂)으로 구분합니다만 세종시대에는 아악(雅樂)과 향악(鄕樂)으로 나누어 불렀습니다. 아악은 본래 공자의 예악 사상에 바탕을 둔 비 대중적인 음악으로 중국의 송나라에서 들어 와 주로 궁중의 각종 행사에서 주로 쓰였으니 요즘 식으로 구분하자면 클래식 음악에 가깝습니다(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묘제례악입니다). 아악이 좀 더 넓은 의미로 쓰이면 당악(唐樂)을 포함하는 데 당악이란 중국의 당, 송시대, 즉 중국의 민속악으로 고려시대에 많이 수입된 대중음악인데 차츰 이 음악도 궁중음악화되어 비대중적인 음악으로 바뀌었습니다. 향악은 아악을 제외한 음악으로 우리나라의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고 전승되어 온 음악으로 대중음악에 가깝습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조선은 나라의 기틀을 유교에 두고 모든 것을 중국의 기준에 맞추어 이를 따르고자 애쓰던 시대였습니다. 음악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음악은 예술(藝術)이라기 보다는 예(禮)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여서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규율이 엄격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규율은 유교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중국의 예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것이 아주 못마땅했나 봅니다. 세종실록 49권에는 세종대왕이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는데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옳겠는가”하고 지적합니다. 이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개국한 이래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음악이 이미 갖추어져 있사오나 오직 민속노래들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이 마련되어 않으니 실로 마땅치 못하옵니다. 이제부터 각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를 막론하고 오륜에 합당하여 족히 권면할만한 것과 간혹 짝없는 사내나 한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칙에 벗어난 것일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내어 매년 세 말에 올려 보내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세종대왕은 중국말을 사용하는 것이 못마땅하듯 중국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못마땅하여 우리의 음악을 샅샅이 조사해서 정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를 정리한 사람이 바로 박연과 맹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향악의 최고 권위자로 꼽혔던 맹사성과는 달리 박연은 유교의 예법을 숭상하여 중국의 아악을 더 상위개념의 음악으로 생각했던 사대적 음악관을 가지고 있어 세종대왕의 뜻과는 좀 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상소를 올려 세종대왕과 언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오히려 그런 박연을 설득하며 중국 중심의 음악사상을 벗고 우리 음악을 자주적인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으로 재정리하는 새로운 임무를 계속 맡겼습니다. 세종대왕은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재위 7년인 1425년(29세)에 우리 음악의 기준이 되는 율관을 제작합니다. 율관이란 음높이가 변하지 않고 정확히 정해진 음정을 만들어내는 12개의 관을 말하는 데 이로서 12개의 음정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현재 피아노를 보면 흰 건반 7개, 검은 건반 5개 해서 한 옥타브가 12개의 음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을 서양에서 정확한 음정으로 정리한 것을 평균율이라고 합니다. 이 평균율 체계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1581년,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센체 갈릴레이가 유사한 체계를 제안한 기록이 최초이고, 중국에서는 1596년 주재육이란 사람이 이 체계를 언급한 것이 최초라 하니 세종대왕은 그보다 150년이나 앞서 있습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음정의 기초가 되는 율관을 만든 후 이에 맞추어 중국에서 수입해 쓰던 편경과 편종(아악연주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악기로 고려시대에 송나라에서 수입하여 왕실제사 때나 궁중행사에 사용하였습니다)을 직접 우리 힘으로 만들어 박연에게 이를 이용하여 우리 음악을 바로잡고 다시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종대왕의 음악적 재능을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편경을 새로 만들어 연주를 하는데 그 연주를 듣고 난 후 박연에게 “지금 소리가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을 만들어 서로 음을 비교할 수 있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다만 이칙(12율 중 9번째 율)이 약간 소리가 높은 데 그 연고가 무엇 때문인가”하고 물으니 박연이 자세히 살펴본 후 “음을 내는 돌이 미처 기준만큼 깎이지 않아 그러하다”라고 아뢰었다(세종실록 59권)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이를 보면 세종대왕은 요즘 말로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또 세종대왕은 음악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새로운 악보 쓰는 법(기보법)을 창안합니다. 이것이 서양의 오선지가 도입되기 전까지 국악에서 쓰였던 정간보입니다. 당시의 기보법은 음의 높낮이만 표시하는 것이었는데 세종대왕은 우물 정자 모양으로 칸을 나누고 음의 높낮이와 함께 음의 길이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기보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동양최초의 업적인데 한글창제에 버금갈만한 독창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용비어천가가 세종이 조선왕조의 창업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외에도 외래 음악인 중국의 음악과 우리나라 고유의 세종대왕은 외래음악과 우리나라 고유 음악인 향악을 바탕으로 궁중의 잔치 때 쓰는 음악인 정대업(종묘제례악으로 세종 29년(1447년)에 선조들의 무공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세종이 직접 창제)과 보태평(종묘제례악으로 세종 31년(1449년에 선조들의 문공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세종이 예부터 전례되는 고취악과 향악을 바탕으로 만듬)을 만들었고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아악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여민락(임금의 나들이나 궁중잔치에서 연주하던 아악곡으로 지금은 가사없이 연주곡으로만 사용)을 작곡하였습니다. 1998년, 당시 중앙대학교 박범훈 교수가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세종대왕이 불교음악인 범패를 직접 작곡했다는 기록을 발견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국대 도서관에서 세종12년 병조정랑이던 김수온이라는 사람이 지은 ‘사리영웅기’(세종 31년 왕명에 따라 인왕산에 불당을 건립하면서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의 원문을 발견하고 이를 해석하던 중 ‘12월 6일 불당 낙성식을 하면서 그날 연주될 음악을 세종대왕이 직접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세종대왕이 직접 작곡한 범패 7곡의 이름과 가사가 실린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세종대왕이 이렇게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愛民精神)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백성에게 도움이 되고 나라에 이로운 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덕목일텐데 이번 대통령 후보들 중 그런 덕목을 가진 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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