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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 |
[아름다운 당신] 부안 농부 김인택
관리자(2012-12-06 16:46:12)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문동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그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의 궤적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가르침이다. 웬만한 고준담론보다 의미 있는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이야기다. 가을이 서둘러 자리를 뜬 부안 주산면 들녘, 이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농사꾼’ 김인택씨의 이야기가 그랬다. 올해 51세인 ‘농사꾼’ 김인택은 부안군 주산면 화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주산(舟山)면은 서로는 변산반도, 남남으로는 줄포가 연해 있고 남동으로는 정읍 영원면과 고부면에 맞닿아 있는 들판지역이다. 주산이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소주마을이나 대주마을, 율포 등 배나 포구와 관련된 마을 명칭이 많아 곰소만이 지척인 주산면 일대가 과거에는 배가 드나들던 바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인택씨도 그 유년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 기억이 비만 오면 참게가 우리집 마당까지 올라왔었어요. 바닥물이 동진강까지 계속 올라왔었으니까.” 비록 바다 일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집마당에서 참게를 볼 수도 없지만 그에게 고향 주산은 아련한 바다와 같은 곳이다. 농사가 싫어 도망치던 사람, 유기농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해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하고도 20대 중반까지는 계속 부산에서 지냈다. 부산 사투리가 묻어나올 법도 하지만 오리지널 전라도 말씨를 쓴다. 부산에서 보낸 15년가량의 세월은 그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당시 부산이 학생 써클문화가 활성화되었던 덕에 중3시절 문학써클에 들어가 까뮈의 이방인을 집중적으로 탐독했고, 사르트르의 실존 문제를 화두로 부여잡고 씨름했다고 한다. “동양적 사고방식과 서양적 사고방식이 너무 다른 거예요. 그 때 아마 거기서 감수성을 많이 키운 거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기 오기 전까지는 계속 활동을 했으니까요. 오솔길이라고. 그 때 당시 다독을 한 거 같아요.” 학생시절의 문학써클부터 오솔길 활동까지 그가 키웠다는 감수성은 다름 아닌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시각이었을 것이다. 세상과 사물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줄 아는 태도 말이다. 김인택씨는 농사를 짓기 전에는 오히려 농사지으라면 도망 다니던 입장이었단다.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농사일을 해도 되겠다는 작심을 하게 되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병약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농사를 짓는데 자꾸 사람들이 아파할까?” 그가 신참 농꾼 시절부터 유기농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농약에 의존하는 기존 농법은 농사꾼의 몸을 해친다는 것. 하지만 당시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취급을 받았단다. 통일벼 생산의 역군이 되어야 할 농부들이 소출도 얼마 되지 않는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국가시책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인택씨는 ‘빨갱이들’을 수소문한 끝에 변산의 정경식씨라는 유기농 고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수가 알려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농법이었다. 농사의 법(法) 즉, 농사의 가장 근원적인 철학을 알려준 것이다. “농사기술은 거의 알지 못하고, 원칙만 알려주는 거에요. 철학인 거죠. 불편하지만 않게 자연하고 공생하려고 노력해야지, 자연을 극복해보겠다 그러면 버려버린다는 거예요” 고향 일에 청춘 좀 바치면 어떠랴 집 바로 맞은편에서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석산개발로 신음하는 배멧산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유기농 철학에 눈뜨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김인택씨는 마을 선후배들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석산개발을 저지해보기로 작정하고, 1999년에 배멧산살리기운동본부라는 거창한 이름의 단체를 결성했다. 회원은 3~4명에 불과했지만 포부는 다부졌다. “젊은데 청춘 좀 바치면 어떠냐. 우리 면의 상징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또 있을 것 같은데.” 이후 회원들은 구전되는 얘기와 마을 사람들의 어릴 적 기억을 바탕으로 고인돌이나 돌방무덤 같은 유적들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배멧산을 이 잡듯 돌아다녔다. 문화재보호법 상 유적이 발견되면 일대의 개발행위가 제한된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적조사와 더불어 주민들의 뜻을 모으기 위해 면민의날 행사 때 공무원에게 면박을 당하면서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운동본부는 ‘주산을사랑하는사람들’로 다시 한 번 개칭했고, 최근에는 더 큰 동력을 만들기 위해 주산면의 16개 자생단체를 모아 ‘배멧산보존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서명운동도 다시 시작해 작년 한해 1,004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주산면의 거의 모든 자생단체와 1천 명이 넘는 면민이 참여했으니 신음하는 배멧산을 살리기 위해 면민 전체가 나선 셈이다. 노력 끝에 신규로 석산개발 허가를 내주려는 것을 두 건이나 막아냈지만 더 큰 사단이 나고 말았다. 2003년, 부안군수 김종규가 주민들이 반대하고 부안군의회에서도 부결시킨 핵폐기장 유치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김인택씨는 5년 동안 생업인 농사를 포기하면서까지 핵폐기장 문제에 뛰어들었다. “생계를 포기했죠. 포기 안하면 못해요.” 생계를 포기할 것까지는 없지 않았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반핵의 중심이 뭐냐면 민주주의 훼손이라는 거요. 우리가 일하라고 뽑아준 사람이 우리 얘길 안들었다는 거예요. 이게 전체적인 주민화합의 원동력이 된 거예요, 사실은. 민주주의 훼손을 끝까지 복원시키겠다는 거지요.” 언론이나 외지에서는 2004년 2·14 주민투표로 모든 게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2008년까지 저항을 이어갔다고 한다. 핵폐기장은 막아냈지만 주민 수십 명이 구속과 부상을 당한 상처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고, 훼손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치회복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눈 돌리다 반핵을 외치면서 생업까지 포기했지만 유기농철학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핵을 부르짖으며 내세운 가치를 농사꾼으로서 실천하기 위한 대안을 쉬지 않고 모색했다. “반핵을 얘기할 때 참 난감하더라고. 반핵 하는 사람들이 재생가능한 에너지 활용을 못해. 말로는 하는데.” 그래서 찾은 게 유채재배를 통한 바이오디젤 연료였다. 유채를 수확해서 식용유를 만들고 쓰고 남은 폐식용유를 농기계를 돌리는 데 쓰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정부에서 바이오디젤용 유채재배 시범사업이 추진되고 있던 터였다. 김인택씨는 군청 공무원을 설득한 끝에 신청을 하고 선정까지 됐지만 정부의 사업방침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논에서 사람이 먹지도 못하고 유채를 수확해서 바이오디젤 연료로 쓰겠다는 거예요. 그럼 우린 농사꾼이 아니다. 하지 말자 했죠.” 먹고 나서 생긴 부산물로 다른 일을 도모해야 하는데 먹는 과정을 생략해버림으로써 농사꾼의 정체성을 거세해 버린, 이를테면 주객이 전도된 사업이었다. 결국 정부가 시범사업으로 공모한 유채재배는 김인택씨의 의도대로(?) 실패했다. 대신 그는 친환경영농법인인 주산사랑영농법인을 주축으로 학생들에게 바이오디젤의 가치를 알리는 체험행사를 추진하는 한편, 친구들에게 자신의 쌀을 판매한 금액에서 떼어 모교인 주산초등학교에 유채식용유를 제공하기 위한 무료급식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유전자 조작이 없는 유채식용유를 제공함으로써 어린 학생들의 급식 질을 높이고, 쓰고 남은 폐식용유는 바이오디젤 연료로 쓰는 에너지 순환모델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유기농 철학의 결정판, 석유없이 농사짓기 2009년부터 시작한 ‘석유 없이 농사짓기’는 김인택씨가 다듬어온 유기농철학의 결정판이다. ‘농약 없이’가 아니고‘석유 없이’라고 하니 다소 생소했지만 취지와 방식은 명쾌했다. 농약을 치지 않는 것은 물론, 농기계도 바이오디젤이나 바이오에탄올 연료로 가동한다는 것. 기존 유기농법에서 한 단계 진일보한 그만의 농법인 셈이다. “석유없이 농사짓기는 혼자만 하고 있죠. 회원들하고 얘기했는데 이게 매일 기록을 해야 돼요. 농사짓기도 바쁜데 언제 기록을 하냐는 거예요.” 기록은 실험으로 치면 경험적 과정에서 나온 데이터를 수집하는 행위다. 데이터를 축적해야 소출도 늘릴 수 있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석유 없이 농사짓기에 동참하지 않는 회원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뜻이 상대방의 마음에 닿기 힘들다는 것은 고향으로 내려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터득한 인지상정이다. 배멧산의 깎인 속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김인택씨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폭약과 중장비로 할퀴어진 배멧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그가 맞닥뜨려야 하는 배멧산의 상처를 가까이서 보니 고군분투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집안을 살펴보자니 집광판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화정마을이 전 가구가 참여한 전국 유일의 에너지자립마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있었다. 두 달 전기세가 3천 원도 안 된다고 하는데, 방폐장 때문에 접었던 농사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추진한 사업이라고 한다. 갑자기 이 사람 뭔가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게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발길을 돌리려 하니 집에 온 손님이라고 호박고구마 한 박스를 내주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겸연쩍어서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루 위의 ‘自樂堂’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훈장이셨던 조부님의 아호란다.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집. 주산면 들녘을 뒤로 하고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내심 궁금했다. 농사꾼 김인택씨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할까? 그리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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