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 |
[연중기획] 공간 2 - 집 5
관리자(2012-12-06 16:45:57)
날아갈 수도 걸어갈 수도 없는 세상
이세영 편집팀장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잘 안나요. 하얀 빛이 번쩍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어요. 이틀 동안 돌아다녀서 처음 사람을 봤어요. 여기가 어디에요? 죽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요? 그럼 저도 죽은 건가요? 그렇군요, 죽은 거군요. 죄송해요, 제 소개도 안했군요. 저는 고도치구요, 한 살하고 육 개월이 지났어요. 당연히 육 개월이 지난 걸 이야기해야죠! 우리 동네에서는 육 개월이 지나면 한 살을 더먹었다고 하는 걸요. 일 년이 막 지난 동생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당연하죠, 미안해해야 되요. 어쨌든, 두 살이되면 먹을거리를 스스로 구해야 되요. 곧 있으면 추운 겨울이 오니까 많이 먹어야 하죠. 해가 마을 동쪽 제일 큰 나무 밑동에 있을 때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마을을 나섰어요. 집을 나서기 하루 전에 마을 형이 알려줬어요, 마을과 큰 나무를 중심으로 해가 지는 쪽으로 가면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좀 멀지만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정말이죠, 나를 거짓말쟁이로 보는 거예요? 그건 정말 실례라고요. 아무튼 알려준 길로 한참을 걸었어요, 해는 이미 제일 큰 나무 꼭대기에 걸렸죠. 마을에서 이렇게 멀리 나온것은 처음이라 무서웠지만 거의 다와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죠.뭐라구요?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엄마아빠 생각이 나서요. 걱정을 많이 하실 텐데, 달이 뜨기전에 돌아간다고 했었거든요. 많이 기다리실 거예요. 안울어요! 한 살하고 육 개월이 지난 대장부라고요. 울긴 누가울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뭘 물었었죠? 아, 왜 그렇게 멀리나갔냐고요? 당연한 거 아녜요? 마을 근처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멀리 나갈 수밖에요. 우리 마을에 쉰 명도 넘게 살아요. 나이 드신 분들이 가까운 곳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니 저처럼 젊은이들은 멀리 나가야 돼요. 엄마아빠들은한 살이 안 된 애들 것까지 구해야 하니 더 힘들어 해요. 마을 할아버지 이야기로는 옛날에는 먹을 것이 많았대요. 큰나무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첩첩산중이었대요. 매나 독수리 같은 새들만 조심하면 무서운 것도 없었고 산 한 개가 우리 마을이라 먹을 것도 지천이었대요.
산을 깎고 나무를 베어 만드는 마을
그러니까요, 좋은 시절이었대요. 그런데 우리 아빠 젊었을 때부터 상황이 바뀌었다나 봐요. 산 밑으로 인간들이 살기 시작했어요. 인간을 직접 본건 아녜요. 그냥 마을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 해줬어요. 어느 날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노란 괴물들이 들어오더니 나무를 다 베어내고 산을 깎았대요. 인간들이 마을을 만들었다나봐요. 인간들이 돌아다니면서 주변에서 먹을 것도 줄고 다른 마을이 없어지면서 우리 마을로 이사 오는 고슴도치들도 늘었대요. 집을 짓는데 왜 산을 깎고 나무를 베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큰 나무에서 큰 바위까지가 그냥 우리 마을이고 땅을 빌려 쓰면 되는데 말이에요. 인간들은 자기 생각만 하는 것 같아요. 지난번엔 멧돼지 가족도 살던 곳에서 쫓겨 왔고요, 고라니 아줌마도 집을 빼앗기고 산 속으로 옮겨왔대요. 인간들이 산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에서 쫓겨나는 가족들이 점점 늘어나요.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고, 먹을 것이 사라지고, 다 인간이 오면서부터 일어난 일이예요. 인간들이 정말 미워져요. 인간은 다 그런다고요? 아저씨는 인간이니 이해가 되겠지만 전 전혀 알 수 없어요. 이야기가 딴 데로 샜네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그렇죠, 형이 알려준 곳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절벽이 새로 생겼더군요. 칡 줄기를 타고 간신히 밑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그 곳은 더 이상했어요. 시커먼 돌들이 어마어마하게 깔려있고, 하얀색 줄이 끝도 모르게 처져 있었어요. 분명 눈이 오기 전에는 이런 게 없었단 말이에요. 인간이 만든 게 분명해요. 검은 돌들이 깔린 건너편에 먹을 만한 것들이 있을 법했어요.
인간만 다닐 수 있는 길
무서웠지만 건너려고 하는 순간, 천둥을 치며 달려오는 괴물이 있었어요. 바로 내 코앞을 지나쳤어요. 조금 있었더니 조금 작은, 빨간 괴물도 지나가고, 검정 괴물도 지나갔어요. 다행히 저를 보지는 못했나봐요. 잡아먹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거든요. 예? 그게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라는 거라고요? 인간들이 타고 움직여요? 인간은 다리가 없나보군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괴물은 아니었군요. 한참 괴물, 아니 자동차가 오지 않는 때를 기다렸어요. 용기를 내서 길을 건너기 시작했어요.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 인 것만 같았죠. 그리고 어느 순간, 커다란 경적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렸을 무렵엔 모든 게 멈췄어요. 하얀 빛을 타고 온 곳이 아저씨를 만난 여기예요. 여기에는 저처럼 영문을 모르고 온 친구들도 많아요. 고라니, 너구리, 노루, 토끼 셀 수도 없었어요. 저처럼 한 순간에 이곳으로 온 거죠. 나이가 지긋하신 분도 만났는데, 그 분은 하루에도 몇 번을 저처럼 도로를 건넜대요. 산 허리가 뭉텅 잘려 갈 길이 없어졌거든요. 토끼가 해준 이야기는 더 슬퍼요. 중간까지 건넜는데, 중앙분리대라고 하는 큰 벽에 막혀 다시 돌아오다 죽었대요. 한 친구는 하늘을 날다 자동차에 치었대요. 어휴, 다 이야기 하려면 끝이 없을 거예요. 하늘을 날다 죽다니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걸어도 안되고, 날아도 안되는 이런 세상이 어딨어요. 저희는 어떻게 살라는 거죠? 우리들이 다닐 길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도 인간들은 길을 더 늘기리만 한대요. 자기들만 사는 세상인줄 아나 봐요. 휴~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냥 답답해서 해본 소리였어요. 누가요? 저를 왜 부를까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아저씨도 잘 지내세요. 그럼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