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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 |
[연중기획] 공간 2 - 집 3
관리자(2012-12-06 16:45:25)
삶의 방식 바꾸는 존재로서의 집짓기 강미현 건축사무소 ‘예감’ 대표 어렸을 때 누에를 키워본 적이 있다. 깨알 같이 작은 알에서 태어난 누에는 네 번의 탈피를 통해 성장한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 같던 누에는 사력을 다해 집을 짓는다. 자신의 창자를 아려가며 하얀 명주실을 뽑아 고치를 짓고 스스로를 가둔다. 고치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만의 시간을 견뎌내며 누에는 나방이 된다. 땅을 기어 다니던 애벌레에서 하늘을 나는 존재로서의 나방으로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무엇보다 알-애벌레(4번의 탈피)―번데기(고치)―나방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이 흥미롭다. 더구나 각각의 과정마다 누에 옆에는 ‘집’이 함께 했다. 자신의 존재가치 탐구를 집짓기를 통해 열중했던 것이다. 작은 누에도 이렇게 자신의 삶과 가치를 찾아 집을 짓는다. 집이란 그런 존재다. 나와 하나 된 삶을 담는 집 사람의 집짓기도 그러하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집짓기는 똑같은 틀로 찍어낸 공산품 같다. 특히 아파트의 경우 입주자 공고가 나기 전부터 집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 삶을 담아 짓는 것도, 삶을 꿈꾸며 짓는 것도 아닌 어떻게 하면 프리미엄이 붙어 재산가치가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있다. 남들보다 학군이 좋은 위치에, 더 넓고, 크고, 화려한 아파트를 비싸게 샀다는 행위에 안도감과 자부심까지 느낀다.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까지도 결정되는 모양새다. 삶을 위해 존재하던 집이 소유를 위해 존재하는 부동산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가계대출이 증가하고 하우스푸어가 되는 등 집 때문에 행복하지 않는 모양새가 계속된다. 이제는 집짓기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다. 집짓기는 삶의 태도이며 자신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를 스스로에게 묻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오지산골에서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법정스님. 스님은 흙방을 고치며 “한 평 반쯤 되는 방에서 방석 한 장 깔고 앉아 있으니 새로 중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거치적거리는 것 없어 홀가분해서 좋다”며 잔잔한 삶의 여백을 음미했다. 수행자의 집에 대한 스님의 당부는 저서<오두막 편지>에 담겨있다. “전기를 설치하면 같이 오는 가전제품이 많으니 자제하고 전화, 수도마저도 설치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또한 소란스러울 것을 우려해 집의 찻잔은 세 개가 넘지 않길 당부했다. 처음 세속의 집을 등지고 출가할 때의 그 첫 마음을 잊지 말고 두 칸 흙집이 질박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모습이길 바랐다. 스님은 집을 짓는다는 것이 몸과 생활도구만 옮겨가는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와 습관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생활을 위한 방편만이 아니며, 집짓기는 현재 진행 중인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집짓기는 집을 소유하려 갈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담기 위해 집과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다. 즉 존재하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이다. ‘집의 기억’을 공유하는 집짓기 내가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식간에 관광지가 되어버린 회사 밖 풍경 때문이었다. 평일에도 몰려드는 사람들과 한옥마을 곳곳의 도로공사로 인해 평화롭던 일상이 산산조각 났다. 낮 시간이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짜증 섞인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낮선 사람들의 고함소리들…. 더 이상 일에 집중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일상의 소중한 시간을 좋지 않은 감정으로 낭비하기 싫었다. 그렇게 집짓기는 시작 되었다. 집짓기의 시작은 터를 잡는 일이다. 처음 염두에 둔 곳은 한옥마을에서 몇 채 안 되는 2층 양옥집이었다. 그곳에 서 바라본 한옥마을은 참 근사했다. 미래를 꿈꾸며 몇 번을 다녀온 그곳이 다른 이에게 매매가 되며 마음을 접었다. 근교로 나갈 생각도 있었으나 부지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의 집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주택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노후화된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눈에 반했다. 어디에도 흔하게 있는 빨간 벽돌의 일상성도 좋았고 무엇보다 나와 나이가 같은 집이다. 이후 틈틈이 집을 들락거리며 방울토마토를 심기도 했다. 철거는 구조적인 문제를 수용해 보강을 하지 않을 정도로만 했다. 이 집을 살다간 사람들의 추억을 최대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이 작은 집에서 3세대가 생활을 했으니, 4명을 기본가족으로 5년에 한 번씩 집주인이 바뀌었다고 어림잡아 계산해서 96명의 사람들이 이 집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추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집짓기는 ‘느림’을 원칙으로 했다. 건축가인 나로서도 왜 집을 짓는지, 나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 집을 통해 내 삶과 우리(사무실 가족)의 삶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지 등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집짓기를 통해 차근차근 자아를 정립해가고 있다. 이 집은 실험공간이다. 건축가의 공간이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건축의 요소들을 스스로 체험한다. 최종 목표는 목표가 아닌 삶의 성취를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건축이다. 첫걸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벗어던지는 일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있어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집짓기 동안에도 ‘지인’이라 불리는 ‘남’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업하는 사람이……. 빨리 신도심으로 와야지 불편해서 어떻게 거기 있어”라는 점잖은 충고부터 “거기 못사는 동네 아냐”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마음먹으니 좋은 것들이 더 많다. 골목이라 걷는 느낌이 좋고, 지척이 산이라 공기도 좋고 졸졸 흐르는 산성천 또한 멋스럽다. 무엇보다 남들 보라고 만든 사무실이 아니니 시간 날 때마다 직접 공사를 진행하며 재료의 성질을 파악한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이 맨 날 공사장느낌이라 아예 ‘공사 중’으로 콘셉트를 정했다. 주택가로 정체불명의 사무실이 옮겨오니 이웃들은 신기해한다. 간판도 없이 매일 들락거리는 우리들을 관찰하는 눈길이 느껴진다. 우리가 처음으로 한 일은 골목 담장을 헐어내고 이웃과 즐길 수 있는 뜰을 만들었다. 담장이 없어지니 이웃과 자연스런 눈인사가 가능하다. 뜰의 꽃이 시들해지면 누군가가 물을 준다. 어느 날은 못 보던 꽃들이 심어있기도 한다. 사무실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도 이웃은 생선머리를 담아주며 정을 나눈다. 이렇게 이웃과 더불어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곧 도시재생의 기초 돌을 놓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집짓기의 궁극적 목적은 건축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나는 집짓기를 통해 소중한 것들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았고, 매 순간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음이 고마웠다. ‘집은 한 존재가 걸어가야 하는 무수한 길들을 풀어놓은 시발점이면서 동시에 모든 길들을 수렴하는 종착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평론가 엄경희의 말처럼 나의 집짓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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