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 |
[보는 영화, 읽는 영화] 피에타
관리자(2012-11-05 15:32:27)
폭력의 언어로 구축된 판타지의 세계
김경태 영화평론가
솔직히 말해, 나는 김기덕의 자폐적인 세계가 그저 불편했다. 현실의 끈을 쉽사리 놓아버리는 그의 영화들은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내가 그 영화를 바로 보는 방식의 문제였다. 사회 밑바닥에서 전전긍긍하는 그의 영화속 주인공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당연하듯이 현실 원리에 대입시켜 바라봤고 바로 거기서부터 그의 영화는 삐걱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김기덕은 애초부터 현실 원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가장 비루한 삶을 전유한 판타지 영화에 가깝다. 그는 과잉된 자의식에 도취된 자폐증 환자라기보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만의 언어로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경험하는 ‘오타쿠’일지 모른다.
일례로, 김기덕 감독의 <비몽>(2008)은 이러한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란(이나영)’과 ‘진(오다기리 조)’은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 즉 그 역을 연기하는 배우 각자의 ‘모국어’로 말하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는 그들의 현실 언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반증한다. 그 말인즉슨, 김기덕 감독의 영화 속 세계에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신, 그가 구현한 판타지의 세계에서 핵심적인 발화 수단은 폭력이다. 현실을 사생하는 대신 자신만의 가장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폭력의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의 언어를 학습해야만 한다.
고유한 호흡과 리듬 안에서 반복되는 폭력의 연쇄는 마침내 폭력을 현실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언어로 잉태한다. 폭력이 현실의 층위에서 떼어져버린 순간, 그 폭력의 잔혹함은 다른 공기를 마시고 다른 빛깔을 띠게 된다. <비몽>에서 진은 몽유 증상을 보이는 란이 자신이 꾸는 꿈대로 행동하는것을 알고는 잠들지 않기 위해 고문에 가까운 자해를 한다.뺨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머리를 바늘로 찌르거나 급기야는 머리를 끌로 긁어 피를 흘린다. 잠을 쫓아내려는 의지를 피학적인 고행이라는 과잉된 폭력의 언어로 표현하는는 것이다. 진한 커피를 마시거나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을 수도 있고, 찬 공기를 마시며 가벼운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가 구축한 폭력의 언어에는 없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피에타>는 이러한 폭력의 언어화가 정점을 찍은 영화이다. ‘강도(이정진)’는 사채 빚을 갚을 여력이 없는 채무자들의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한 뒤 보험금을 받아내는 일을 한다. 그런데 감독은 강도의 폭력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많은 장면이 기계음과 비명 등의 사운드로 대체되어 있다. 훼손된 신체에 대한 클로즈업도 없다. 이처럼 폭력의 사실적 묘사에 무관심한 것도, 그 폭력이 이미 현실적 차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폭력의 역할과 파장도 다르다. 강도에 의해 손이 절단되거나 다리가 부러진, 즉 신체가 훼손된 이들이 가지게 되는 이름은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병신’이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이다. 신변비관으로 자살을 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구걸을 하는 것.
강도에게 자신이 그의 친모라고 주장하는 ‘미선(조민수)’이 찾아온다. 미선은 자신이 친모임을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강도의 집안에 들어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머니다운 행동으로 친모로서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강도는 미선에게 친모임을 증명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과 같은 의학의 언어에 의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대신 혐오스러운 극단적 행위를 참고 견뎌야만 한다. 강도가 건네는 허벅지 살점을 받아먹고 근친 강간의 위협도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게 온 몸으로 증명하고 나면, 그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부모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진정한 반전은 조민수가 복수를 위해 생모로 위장한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도 그녀를 끝까지 진짜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강도의 태도에 있다. 나아가 채무자 중 자식을 위해 스스로 손을 절단하거나 미선처럼 죽은 자식을 좇아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도착적 모성/부성’이 탄생할 수 있는 것도 폭력이 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폭력의 발화는 ‘자살’이다. 김기덕의 세계에서 폭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언어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기덕이 폭력의 언어로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감독은 누군가의 50년 가까운 삶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을 갈아엎는 돈, 즉 자본에 대해 비판한다. 그‘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돈에 대한 혐오감은 미선과 강도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 돈은 ‘3달 만에 이자가 원금의 10배가 되는’ 무서운 자가 증식력을 지닌 괴물이다.
영화 초반부, 미선의 아들이 휠체어에 앉은 채 목에 체인을 감고서 행한 자살은 그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최후의 투항이다. 그리고 애초에 갚을 생각도 없이 돈을 빌려 마음껏 쓰고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사람에게, 자살은 돈에 대한 조롱이다. 반면에, 스스로 몸을 던진 미선이 강도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주는 고통이었다.이들의 죽음은 퍼즐 조각처럼 강도에게 돈/자본에 맞서기 위한 단서들을 던져줬다. 그래서 강도의 자살은 한 발짝 더 전진한다. 트럭 밑에 체인으로 스스로를 묶어 선명한 핏자국을 도로에 새기며 죽어가는 강도의 자결은 속죄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돈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처절한 저항의 몸부림이다. <피에타>가 속죄와 구원의 영화라면 그 대상은 바로 돈/자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