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2.11 |
클래식 뒷담화
관리자(2012-11-05 15:29:55)
롤러코스트 인생을 산 음악계의 스타, 리스트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 19세기는 유럽음악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는 베토벤을 시작으로 멘델스존, 쇼팽, 슈만, 바그너, 브람스, 베르디, 푸치니, 차이코프스키까지 위대한 음악가들이 줄지어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죠. 이들은 때로는 서로에게 배우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유럽을 풍요로운 음악의 시대, 예술의 시대로 가꾸어 갔습니다. 19세기 유럽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시작한 근대세계가 열리는 시대로 클래식 음악의 주 소비자가 귀족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주인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음악의 소비시장이 이전 시대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이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을 받아서 사는 처지에서 스스로 자기 음악의 소비자들을 찾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새롭게 음악시장의 소비자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이전 시대에 자신들이 모셨던 귀족들의 삶을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처럼 음악가를 후원하고, 음악회를 자주 열거나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교양수준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음악가들이 아주 쉽게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죠. 이런 환경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음악 시장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음악가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경쟁과정에서 이른바 스타 음악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 스타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년~1886년)입니다.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쇼팽을 제치고 피아노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하이든과 친분이 있던 아마추어 음악가로 아들에게 피아노를 직접 가르쳤는데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고고 헝가리의 시골에서는 아들을 대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하던 일을 접고 비엔나로 이사를 갔습니다. 비엔나에서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12살인 1822년 12월에 데뷔했습니다. 이 무렵 리스트는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등쌀에 시달렸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전 유럽을 돌면서 피아노의 신동으로 불리던 리스트를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혹사시켰던 것입니다. 182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연주에 지친 리스트는 모든 연주활동을 접고 오랜 칩거생활에 들어가 새롭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1832년에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공연을 본 후 파가니니 같은 연주자가 되겠다며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답니다. 천재적인 재능과 피땀 흘린 연습은 리스트를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다 리스트는 훤칠한 키와 흰 얼굴, 매력적인 푸른 눈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등 꽃미남스타일로 어디서나 눈에 띠는 미남이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언변에도 뛰어나 어디서나 좌중을 이끄는 재미나는 사람이었으니 스타로서의 자질을 완벽히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괴상한 외모와 악마적 신비주의로 유럽을 휩쓸던 바이올린의 천재 파가니니와 달리 리스트는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화술, 그리고 무대에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수에 찬 표정을 짓는 등 여성팬들의 마음을 흔드는 퍼포먼스로 자신의 스타성을 한껏 부각시켰습니다. 그러니 많은 여성들이 리스트를 사모하고 그의 팬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유럽 순회연주를 하노라면 엄청난 여성팬들이 몰려 들어 가는 곳마다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팬들은 리스트의 손수건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그의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잘라 가기도 할 정도였다니 오늘날의 아이돌그룹과 비슷했나 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인기 때문에 ‘리스토매니아’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니 그 인기가 대단했던 것이지요. 이때부터 리스트는 유럽 사교계에 수많은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여성팬들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성팬들과의 염문을 즐겼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스위스로 도망간 백작부인과 동거하며 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다시 백작부인으로부터 도망나와 당대 최고의 무희였던 여성과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했으며, 또다시 남편과 아직 이혼하지 않은 비트겐슈타인의 공주와 결혼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이 결혼은 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무효가 되었습니다. 리스트는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가톨릭신자였기에 교황청의 결론에 따라 동거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런 문란한 애정행각 때문에 리스트는 자신이 리스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프란츠 세르바이스라는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를 아느냐는 질문에 리스트는 ‘그 청년의 어머니와는 편지만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편지로도 아이가 태어나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세속에서의 온갖 즐거움을 누리던 리스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음악적 감성이 없는 대중들에게서 얻는 인기란 덧없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순회연주에 지치기도 해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비록 문란한 생활 중 얻은 자식이었지만 큰 딸의 죽음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리스트는 심한 마음의 고통을 앓았는데 이를 그동안 지켜 온 가톨릭 신앙에 의지하여 이겨냈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통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리스트는 3년간 공들인 끝에 마침내 55세가 되던 해인 1865년에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제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던 곡들 대신 교회음악 작곡에 심취했습니다. 리스트가 사제로 변신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리스트의 문란한 생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비웃음거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중에는 리스트의 둘째 딸 코지마도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생애의 마지막을 바로 둘째 딸 코지마와의 갈등 속에서 보내게 됩니다. 스위스로 바람나 도망온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코지마는 리스트가 애지중지하던 제자 한스 폰 뷜로(당시 유명한 지휘자로 베를린 필의 초대 지휘자입니다)와 1857년에 결혼했습니다. 결혼 초 남편에게 헌신적이었던 코지마는 1862년 바그너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인 한스 폰 뷜러가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했는데 이때 코지마와 바그너가 만나게 되었답니다. 리스트, 뷜로, 바그너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 세 사람이 얽힌 희대의 불륜 드라마는 당시 최고의 스캔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 된 셈이죠(사실은 바그너도 당시 부도덕의 화신으로 불릴 만큼 여성편력이 심했던 인물입니다. 이 사건은 바그너의 불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리스트는 분노하며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지만 바그너와 코지마는 결혼도 하기 전에 3명의 자녀를 낳았고 마침내 1870년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리스트와 코지마의 전 남편 뷜로는 바그너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코지마와도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리스트는 생애의 끝자락에서 딸 코지마와 화해를 했지만 그 끝은 더 비참했습니다. 바그너의 아내가 된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페스티발 운영을 책임지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바그너로서는 코지마가 최고의 반려자였습니다. 사상이나 관점이 비슷했고, 무엇보다도 코지마에게는 뛰어난 경영능력이 있었으니까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페스티발은 코지마에 의해 빛이 났습니다). 리스트는 바그너가 사망한 후인 1886년 코지마가 책임지고 있는 바그너 페스티발에 찾아갔습니다. 코지마는 근처의 여인숙에 리스트를 묵게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미 쇠약하고 건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던 리스트는 그곳에서 그만 폐렴에 걸렸습니다. 리스트가 폐렴에 걸려 고생하자 코지마는 자신만이 아버지를 돌볼 수 있다며 그 누구도 리스트를 돌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소식을 듣고 찾아 온 리스트 제자들의 병문안마저 막고 리스트를 거의 방치상태로 놓아두었습니다. 리스트 제자들의 거센 항의가 있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리스트는 그 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리스트는 죽기 전 장례식은 치르지 말고 사제의 옷을 입혀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미 신교도로 개종한 코지마는 구교도인 아버지의 유언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가톨릭교인들은 임종시 종부성사를 하는 데 코지마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 그것도 가톨릭 사제가 된 아버지를 위해 사제를 부르지도, 종부성사를 볼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옷을 입혀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도 무시한 채 리스트의 시신을 자기가 살고 있던 바이로이트에 묻었습니다. 바이로이트는 리스트가 죽을 때까지 저주했던 바그너의 터전으로 결국 리스트는 영원히 바그너의 명성에 가려 그 빛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