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 |
연중기획 - 공간 2
관리자(2012-11-05 15:27:46)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던 어느 건축가의 선물
임주아 기자
정기용의 무주공공프로젝트로 본 키워드는 바로 ‘자연’이다. 정기용이 설계한 무주의 모든 건축물들은 자연 아래 자유롭지 못했다. 풍광을 가리지 말아야 했고, 숲과 나무를 해치지 않아야 했고, 논과 밭을 그대로두어야만 했다. 자연의 삶에 또 다른 삶을 앉히는 일. 그것은 어떤 것보다 자연스러워야했다. 공간재생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얻은 무주공공프로젝트. 보여주는 건축이 아닌 읽히는 건축으로서 사명을 다한 정기용의 건축학개론. 그가 감응한 건축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자연과 삶과 도시재생 : 등나무운동장
등나무운동장은 건축가 정기용이 “무주에서 10여 년 동안 한 일 중 가장 인상 깊고 감동적이며 나를 많이 가르치기도 한 프로젝트”라 말할 정도로 애정을 쏟은 곳이다. 관중석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등나무집인 원호모양의 파이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등나무의 줄기가 파이프를 감아 하나가 된 것이다. 240여 그루의 등나무가 운동장을 감싸고,튼튼한 등나무집이 나무를 받치고 있는 운동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등나무운동장이 마치 비밀의 숲 같다. 논과 밭 사이, 농가와 집 사이, 공장과 상가 사이, 있는 듯 없는 듯제 소명을 다한다. 가만히, 동네를 안아준다.
군수는 군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설운동장에 주민들을 초대하지만 주민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마을 어르은 군수는 본부석에 앉아있고 주민들만 땡볕에 서있으라고 하는 게 무슨 경우냐 호통친다. 공설운동장에 등나무 그늘을 만들기로 결심한 군수는 240여 그루의 등나무를 운동장 주변에 남몰래 심어놓는다. 그러나 다시 고민이다. 일 년도안 된 등나무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자랐던 것이다. 군수는 정기용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등나무집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등나무집이 식물의 모습과 흡사하도록 설계하려 애썼다.그는 먼저 등나무가 스탠드 위로 자랄 수 있도록 나무의 성장 방향을 원호로 만들었다. 원호의 끝은 시선과 햇볕의 관계를 고려해 가장 적절한 위치에 꼭짓점을 정했다. 스탠드 제일 뒷 열에 앉은 사람들도 저 잔디밭이 잘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콘크리트 슬리브였던 본부석 지붕은 막구조물로 바꿨다. 위압적인 본부석을 바꾸어보려는 그의숨은 의도다. 등꽃이 만발하는 5월, 주민들은 삼삼오오 등나무운동장을 찾는다.
주민의 필요를 채우는 공간 : 안성면사무소
그가 안성면사무소를 짓기 전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동네 사람들을 은밀히 만나는 일이었다. 면사무소를 짓는데 어떤 기능이 들어갔으면 좋겠냐고 묻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목욕탕’이나 지어 달라 한다. “봉고차를 빌려 대전까지 출장 목욕을 다녀온다”는 주민들. ‘우리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반성하는 건축가. 그렇게 면사무소 안에는 대중목욕탕이 들어서게 된다. 면사무소 목욕탕은 대중목욕탕과 별 다른 점이 없었다.욕탕의 폭이 좁긴 했지만 몇 사람이 들어가기엔 충분했고, 앉아서 씻을 수 있는 세면공간도 넉넉했다. 락커룸과 운동기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욕탕 외부를 보니 면사무소 안에 있는 목욕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남탕과 여탕을 홀수 짝수 날짜로 나누는 것과 입욕권이 단돈 천원이라는 것이 안성면사무소 목욕탕만의 매력이다. 주민들의 요구에 성실히 응답한 공공건축으로서의 의무, 그리고 공공기관도 쓰는 사람이 원한다면 목욕탕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공간재생의 힘. 안성면사무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공공기관이라 해서 ‘폼’ 잡을 필요 없다는 것과 그것을 삼가는 것이야말로 공공건축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 모범사례가 되었다.
사람과 자연과 관계맺기 : 버스정류장
이 땅 어느 곳에 가도 버스정류장은 판에 박은 듯하다. 벽돌로 에워싼 감방 같은 정류장이거나 철골 위에 알록달록한 페인트가 칠해진 정류장이 그것이다. 정기용은 버스정류장을 기다림의 장소를 넘어 ‘관계맺기’의 공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무주 설천면, 안성면, 부남면에 버스정류장을 지었다. 창은 사각으로 크게 뚫고, 에둘러진 벽들을 허물었다. 열린 공간을 통해 주변의 경관이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오게 했다. 버스정류장과 자연의 관계맺기다. 벌판에 당당하게 서 있는 외벽은 의자가 되었다. 다른 버스정류장의 일자형 의자와는 다르게 ‘ㄴ’자 모양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기다. 건축가 정기용의 동료들은 무주 공공프로젝트 중 버스정류장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정기용은 <감응의 건축>에서 “그것은 아마 건축가들만 볼 수 있는 시선이 작동해서이며, 건축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을 이 작은 버스정류장에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적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버스정류장은 정기용이 고민했던 원형과는 달랐다. 누군가 손을 본 흔적이 역력했다. 의자는 일자형으로 바뀌고, 창은 유리로 막히고, 열린 공간으로 구상했던 벽채는 철제섀시로 둘러져 있었다. 버스정류장은 25센티미터의 벽채만 남고 모든 것이 바뀌어있었다 사람과 자연과 버스정류장이 맺었던 관계는 끊어졌다. 안성면과 부남면의 버스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무주군관계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편의상 바꾸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