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 |
연중기획 - 공간 1
관리자(2012-11-05 15:27:36)
다시 살아나는 도시, 답은 이미 그 안에 있었다
한규일 기자
도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하나의 넓은 면이다. 이 거대한 면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힘이 필요하지만 이런 힘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뉴욕의 작은 쌈지공원들은 도시 전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뉴욕의 삭막함을 덮는 쌈지공원
미국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5번대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여섯 블록을 가면 성 토마스 교회맞은편 명품 숍이 즐비한 빌딩들 사이에 페일리 파크라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삼면이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390㎡의 공간에는 전면에 2층 높이의 인공폭포가 있고 좌우 벽면은 담쟁이가 뒤덮었으며 열 그루 정도의 아카시아 나무가 심어진 사이사이로 간이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1966년 만들어진 이 공원은 도심 쌈지공원의 시초로 여겨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뉴욕을 대표하는 공원은 센트럴 파크로 3.4㎢ 넓이를 자랑하지만, 뉴욕시 공원에 따르면 뉴욕에는 그 외에도 페일리 파크와 같은 소규모 공원과 놀이터, 휴게공간이 170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뉴욕에 이렇게 많은 쌈지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공간들이 고층빌딩의 고도제한을 완화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고층빌딩 즐비한 도심 곳곳의 쌈지공원들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삭막한 도시에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초록빛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페일리 파크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6번대로를 따라 내려가면 차로 10분 거리에 소호(Soho : South of Houston)가 있다. 패션의 메카로 유명한 소호는 대공황 이후 황폐해진 거리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들어와 작업실을 차리면서 형성된 예술의 거리다. 예술가들의 뒤를 따라 자연스레 갤러리와 부티크들이 모여들어 지금은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의 예술과 패션을 선도하는 중심지가 됐다. 예술가들이 외벽이나 간판을 캔버스 삼아 그린 멋진 벽화들이 아직도 남아 있고 샤넬, 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들이 입주해 있어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다.
문화와 예술 탄생하는 도시의 새 모습
뉴욕의 사례처럼 쌈지공원은 작은 면적에 불과하지만 곳곳에 위치한 그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면서 그물처럼 엮여 도시 전체를 덮는 영향력을 미친다. 쌈지공원이라는 공간 자체는 고정되어 있지만 도시민들의 끊임없는 이동으로 공간의 영향력은 더욱 확산된다. 사람들은 멀리 있는 센트럴 파크에 가는 대신 가까이에 있는 작은 쌈지공원에서 만족스러운 휴식을 누리고, 그만큼 주관적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다. 도시재생이 반드시 대규모의 사업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의 시작이다. 오히려 작은 규모의 사업을 여러 곳에 분산하는 것이 친근감과 만족도를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 이후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작은도서관 사업도 그 좋은 예다. 여기에 문화와 예술이 접목되면 도시재생 사업은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도시는 상권 또는 주거지가 형성되어 발전하다가 노후화, 경기침체 등의 이유로 쇠퇴하여 슬럼화된다. 낡은 도심은 다시 재개발, 재건축 등을 통해 활성화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 뉴욕의 소호는 도시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주기를 보여주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소호는 재개발, 재건축 대신 문화와 예술을 투입했다. 소프트웨어인 문화와 예술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도시재생을 해낼 수 있는가를 소호는 보여줬다. 서울, 부산, 통영 등 국내 여러 도시에 있는 벽화마을로부터 일본의 요코하마, 영국의 게이츠헤드 등 문화와 예술로 도시가 재생되고 활성화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가능할까
기존의 도시재생 방법은 낡은 건물들을 깨끗이 철거하고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재개발·재건축이다. 그 방향은 항상 더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를 지어 연면적을 높임으로써 더 많은 수익을 얻는 것이었다. 경제적 논리로 본다면 당연한 방법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새로 짓는 아파트의 가격이 비싸 원주민이나 기존 거주자들의 재정착이 매우 어렵고, 주변의 부동산까지 덩달아 들썩이게 만들어 투기를 조장하기도 한다. 주민들의 삶과 문화는 이쯤에서 사라진다. 공동체는 재개발의 여파로 분열하고 정든 땅을 떠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재개발지역의 문화와 역사의 단절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서서히 도시의 소비적 문화를 이식시킨다. 이에 대응하고자 정부에서는 2007년부터 도시재생사업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재생방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선진국의 몇몇 사례들을 단순히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도심을 압축도시(compact city)로 조성하는 것과, 지방 중소도시의 도심에 대한 자력수복형 도시재생이 그것이다. 압축도시란 문자 그대로 도심 토지의 집약적·복합적 이용률을 더욱 높이면서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도시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다소 복잡하고 상반된 개념을 모아놓은 모양새인데, 일부 도시계획·건축 전문가들은 압축도시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시행된 고도의 재개발·재건축 기법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인구가 감소해 도시의 성장은 한계에 이르고 우리나라는 이미 도시화가 90% 이상 진행됐기 때문에 도심의 밀도를 높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력수복형 도시재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도시재생을 이끌어갈 수 있는 내부의 에너지와 외부의 시스템을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여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도시재생사업단은 2010년까지 5차 년도에 걸쳐 쇠퇴한 상가 및 노후 주거지구 재생기술, 도시환경 녹색재생기술 등의 도시재생 기법·기술을 연구·개발해왔다. 그 결과를 시험하는 테스트베드(TB, test bed)로 전주와 창원이 선정되었고 지난해부터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주시의 재생사업 대상지역은 노송동, 인후1·2동의 주거지구와 중앙동, 진북동의 상가지구다. 노후시설의 개보수 등 하드웨어에서부터 교육·문화·복지 등 소프트웨어까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업이 추진된다. 주거지구에서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더불어 주민학교>나 마을동아리, 주민들 스스로 만드는 <천년사랑축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상가지구에서는 상인동아리나 <장나래>와 같은 지역 활성화 프로그램이 이뤄지고 있다. 전주TB 도시재생지원센터 오정섭 사무국장은 “지역자력형 도시재생사업은 지역주민과 상인, 지자체 그리고 지역의 전문가들이 함께 협력하고 노력하여 점진적인 방식으로 정비를 추진해 나가는 사업으로, 마을이 활기차게 살아나고 계속해서 번영할 수 있게 할 것”이라며 “전주시가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법 제정이나 시범지구 지정 여부와 관계없이 전주의 도시재생사업은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시가 어떤 형태의 도시재생사업을 하게 될지는 전주TB 도시재생지원센터의 성패와 직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간, 공공 그리고 주민참여
지난 9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전주한옥마을(이하 한옥마을)에서 열린 도시재생 국제학술세미나에서, 한옥마을이 지역의 역사 문화적 자산을 기반으로 도시재생 성공 모델을 이루어낸 사례로 발표됐다. 기존의 자원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환경을 정비하고 역사·문화·예술 콘텐츠를 담기위해 노력한 결과, 한옥마을은 400만 관광시대를 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공 사례가 맞다. 하지만 여기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한옥마을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한 공예가는 주말에 은행로에서 열리는 아트마켓을 예로 들어 전주시의 편의주의·성과주의 행정을 비판한다. 그는 “한옥마을만의 순수 수공예 작가들이 참여하던 아트마켓이 초기에 월 1회 열렸는데, 관광객들의 반응이 좋아 시청에서는 매주 열기를 원했다”며 “하지만 수작업 생산량의 한계와 품질 저하를 우려한 공예가들은 격주 이상은 안 된다고 했고 결국 전주시에서는 외부 판매자를 동원했다”고 이야기했다. 인사동이 값싼 중국산 기념품의 퇴출에 노력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또 그는 “원주민도 대부분 떠나고 이미 상업적인 관광지로 변했는데, 지속가능성을 염원하는 당사자들의 의견까지 무시당하는 곳이 과연 성공사례냐”고 되물었다. 도시재생에 있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원하는 행정의 역할이 중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군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50년 역사를 지닌 <상봉여인숙>을 개조해 <창작문화 공간 여인숙>을 만든 이상훈 대표는 미디어 작가로 개복동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에 참여했지만 사업을 주관하던 행정기관과 지역 주민, 문화예술인 사이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갈등에 못 이겨 개복동을 떠났다. 그는 개복동의 실패를 생각하며 정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여인숙을 운영한다. 최근에는 정부의 지원금을 반납하고 예술인들과 지역주민이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주민들의 요구와 지역을 살리려고 하는 예술가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 관의 역할”이라며 “도시재생사업은 주민들과 얼마나 소통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도시재생에 있어 행정의 좋은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감응의 건축가, 건물이 아닌 삶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진 고(故) 정기용 건축가의 <무주 프로젝트>가 그것. 그의 가치를 인식하고 무주군은 그에게 10년 동안 관내의 수많은 건축물들을 맡겼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안성면사무소의 목욕탕, 등나무 체육관 등 30여개의 공공건물들이다. 그동안 행정기관 주도의 숱한 사업들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참여토록 해왔지만 형식적 절차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새로운 도시재생사업은 주민들의 실질적인 역할이 핵심임을 인지하고 주민을 중심에 둔 사업으로 변모했다. 이런 점에서 무주군은 비록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이었지만 이미 앞선 행정을 펼친 것이다. 전주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지역 주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역의 번영을 위해 누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느냐는 질문에 42.4%가 ‘주민의 역할’이라고 답했다. 지역에 바람직한 주거환경 개선방향에 대해서는 기존 주거환경을 유지하면서 도로·공원·주택을 개량하고 정비해야한다는 답이 40.9%였다. 원주민을 내쫓고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철거 위주의 재개발·재건축은 더 이상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도시재생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 답은 이미 그곳에 있다. 오랜 세월 있어온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