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 |
[서평] 『나프탈렌』현대문학(2012.9) - 백가흠 저
관리자(2012-10-08 14:35:13)
가슴이 살았던 자리도, 가슴이 사라진 자리도 기억하라고
한현희 작가
냄새만 남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나프탈렌’
냄새만 남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제목의 소설 <나프탈렌>은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다. 나프탈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화장실이나 옷장에 걸어두는 방충제다. 특유의 냄새 때문에 한번 그 냄새를 맡고 나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소설 어디에도 나프탈렌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그 강렬하고도 지독한 나프탈렌 냄새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 머리 속에 나프탈렌 한뭉치가 들어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읽는 내내 그 냄새를 느끼며 소설 <나프탈렌>이 이야기하는 늙음과 죽음에 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프탈렌의 냄새처럼 지독하고 괴팍하며 때론 혐오감을 주기도 하는 등장인물 백용현 교수의 행적을 뒤쫓았다. 뒤틀리고 비틀거리는 백용현 교수의 노년을 보면서 어떻게 늙어가야 할 것인지를, 암에 걸린 딸을 위해 남은 인생을 모두 희생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희생인 줄 모르는 김덕이 여사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아니, 죽음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아프지 않고 추하지 않게 살다가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는 추상적인 생각만을 할 뿐이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무게는 노년의 백용현 교수에게도 젊은 조교 공민지에게도 있었다. 김덕이여사와 딸 양자에게도 최영래와 수련원 사람들에게도. 인간은 누구나 불안한 오늘을 살며 흔들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기도한다. 그리고 저마다 그 대가를 지불한다. 분명한 것은 결여되고 결핍되어 있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소설 <나프탈렌>은 유한한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어떤 의미로 채워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한다.
EBS 라디오연재소설이 만난 소설가 백가흠
소설 <나프탈렌>은“현대문학”에서 책으로 출간되기 전 한달 동안 <EBS 라디오연재소설>(연출:방영찬)을 통해 낭독되었던 작품이다. 시민 낭독자 권아영의 목소리로 방송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백가흠 작가를 섭외하고 그를 처음 만나러 가는 날, 난 궁금했다. 이전 백가흠의 소설들은 읽는 이들을 내내 불편하게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중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는 중간에‘이건 뭐니?’하고 책을 던져버렸는데 다음 날이면 집어던진 소설책을 주섬주섬 챙겨들어 다시 읽고 있더라는 것이다. 책을 집어 던지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집어던진 책을 다시 찾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백가흠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소설은 분명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소설가 백가흠을 만났다. 소설가 백가흠의 실물을 처음 본 날, 그는 두가지 이미지를 내게 주었다. 하나는 시골 농부같은 느낌, 또 하나는 조금만 꾸미면 확연히 태가 날 듯한 바탕좋은 귀공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이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EBS 라디오연재소설>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소설가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점 중에 하나는 소설 작품을 읽을 때와 그 작품을 쓴 소설가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백가흠은 그 중 단연 으뜸이었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소설가 백가흠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소설의 느낌만을 생각하면 어쩐지 너무 진지하고 센 이야기만할 것 같지만 그는 분명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작가는 게으른 인종이요’라며 귀찮은 일은 딱 안할 것 같이 보이지만 강의가 없는 방학 때면, 글을 쓰기 위해 머무는 안도현 시인의 시골집 앞마당에 오이도 심어 키우는 부지런함도 지녔다. 넉넉하고도 삶에 진지한 사람. 소설가 백가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백가흠
<나프탈렌> 방송이 끝나고 낭독의 힘 공개방송에 출연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0명 가까이 자리했지만 모인 사람 대다수가 술을 즐겨하지 않는 탓에 그날 밤은 맥주 세병에 소주 한병이 전부였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멋지게 폭탄주를 제조해 사람들에게 돌렸다. 나와 백가흠 작가 외에는 모두 80년대생 들이었던 탓일까. 그날 그는 내게‘사람들이 술 없이도 참 이야기를 잘 하네요’라고 했고 나는 그에게‘우리하곤 세대가 다르잖아요.’라고 했다. 그리곤 웃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문화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냈다. 오는 11월 18일에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일명 최고은법) 공청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영세 예술인을 지원한다는예술인복지법이 너무나 허술하게 되어 있더라는 말끝에 나온이야기였다. 그는 문화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란 것이있으면 음악하는 사람, 글쓰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프리랜서 방송작가들 까지도 모두 하나가 되어 최소한의 보호를 받으며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프리랜서 방송작가인 나는 속으로‘과연 그게 가능할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합이라는 게 어울릴 만한 것일까?’라고 생각했지만 열심히 이야기하는 그 앞에서 내 생각을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으로 그런 생각을할 수 있고 그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소설가 백가흠을 또한번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문화계에 종사하는 문화노동자들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는 신작 장편소설 <나프탈렌>의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썼다.“소설가가 꿈이었던 시절, 소설가가 되면‘무엇을 쓸 것인가’고민하던 시절, 했었던 다짐.‘마음이 가난’하고‘낮은자’를 위하여! 허나 나는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아적도 모르고, 선뜻, 낮은 자의 편에 서는 것도 주저한다. 원대했던 꿈에 대해 반성 중,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그날의 만남은 그의 절실함이 그 진정성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문학과 상관없는 욕망에 함몰되어서 소설이라는 걸 문학이라는 걸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는작가는 되고 싶지 않다”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 그이기에 더욱 절실히 더욱 진실한 글을 쓰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날 이후 나는 비로소 소설가 백가흠의 진정한 팬이자 독자가 되었다. 백가흠은 그가 만난 105인의 문인들에 관한 산문집을 곧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친구 많기로소문난 소설가 백가흠이 쓰고, 편집자이자 사진작가인 그의 동생 백다흠이 찍은 사진들로 엮어낼 문인들의 이야기다. 첫 장편소설만큼이나 그의 또 다른 글들이 기대되는 것은 그의 세상과사람을 향한 속 깊고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