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1
관리자(2012-10-08 14:28:48)
개척자의 마음으로 일궈낸 영화제
전주로부터의 초대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와의 첫 만남은 2002년에 이뤄졌다. 2002년 2월 초 베를린 영화제에서 만난 서동진 프로그래밍 어드바이저로부터“아시아 독립영화 포럼”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되면서 제3회 전주영화제에 참가했던 것인데, 그 무렵 전주영화제는 일 년 전의 이변으로부터 차츰 나아져가고 있었다. 알다시피, 2001년 김소영과 정성일 두 프로그래머는 제2회 전주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주시청 직원들과 의견충돌이 잦아지자 행사를 두어 달 앞두고 갑자기 영화제를 떠났다. 그리하여 전주영화제의 앞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한동안 높았었으나 다행히 행사 중단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프로그래밍 문제도 서동준씨(현재 계원디자인예술대교수)가 어드바이저로 들어오면서 탈 없이 잘 넘어갔다. 베를린에서 만난 서동준씨는 평소의 유연한 모습과는 달리 많은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느라 동분서주했다. 내가‘영화제 준비는 잘 돼 가느냐?’고 묻자 그는“프로그램은 그런대로 채워져 가고 있지만 심사위원을 아직 다 찾지 못했다”며 나를 초청하고 싶어 했다. 나는 전주영화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초청에 응했다. 그리고 또 그가“디지털 스펙트럼 부문에도 심사위원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전문가들을 몇몇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에 가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디지털영화의 전문가이며 스위스의“필름 비디오 뉴미디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코니 푀스터를 찾아내 심사위원으로추천할 수 있었다.전주영화제는 2002년까지 국제경쟁 부문을“아시아 독립영화 포럼”으로 불렀었다. 그리고 그 해의 심사위원은 나를 포함하여 일본의“키네마 준포”영화지의 편집장 세키구치 유코와 독일의“호프 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 하인츠 바데위츠였다.그때만 해도 영화제는 6박7일로 잡혀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에 3편 꼴로 심사에오른 영화 15편을 봐야 했는데 눈에 끌리는 영화들이 많았으나 끝에 가서는 홍콩출신의 여감독 얀얀막의 첫 작품<형>이 최우수영화로 뽑힘으로 우석상(1만 달러)을 받았다. 바데위츠 심사위원은 수상작을 발표하는 자리에서“최근 들어 작품성과 형식이 놀랍도록 뛰어난 아시아영화의 현재를지켜볼 수 있어 기쁘다. 심사에 들은 15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좋은 작품들이많아서 심사에 힘들었다.”며 프로그램 팀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그런가 하면“생소하고 어렵다”는 비평이 많던“디지털 스펙트럼”부분의 영화들도 3회에 들면서 대안영화로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심사는 스위스의 코니 푀스터 집행위원장을 비롯하여 송일곤감독 그리고 필리핀의 칸트라 크루즈 감독 등이 맡았었는데 이 부문의 대상인“디지털 모험상”은 체코 감독 불라디미르 미할렉의 <엔젤역 출구>에 주어졌다. 푀스터심사위원은 수상작품 발표의 기자회견장에서“전주영화제가 새로운 디지털 영화제작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이 같은 시상부문을 마련한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다”라고 평가하면서 디지털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인들의 높은 관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제3회 전주영화제 개막식은 2002년 4월26일 저녁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막을 올렸다. 그날 저녁 리베라 호텔에서 열린 개막식 파티에서 나는 최민 집행위원장과 마주쳤다. 그는 내가 1998년 한국종합예술대학의 영상원에서 초빙교수로 봄학기 강의를 했을 때 영상원 원장이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최 집행위원장은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심사위원으로 찾아줘 고맙다. 영화제를 두루 살펴보고 잘못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 부탁인지 아니면 그저 한 소리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틈틈이 영화제의 여러 곳을 살펴봤다. 그런데 5월3일 폐막식 날 오후에 전북일보에서 연락이 왔다.“2002년의 전주영화제에 대한인상을 다음 날까지 글로 써 달라”는 주문이었다. 다음 날은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최 집행위원장에게 넘겨주려고 짬짬이 써두었던 메모지를 참고하면서“전주국제영화제에 희망을 건다”는주제의 기사를 썼다. 다음은 그때의 글 일부를 인용한 것으로서, 10년 전에 쓴 글이다 보니 더러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기록을 남기는 뜻에서 여기에 덧붙인다.
전주영화제는 아직 작은 규모의 영화제다. 그럼에도 올해 선정된 영화가 2백60여 편이었다는 건 국제영화제의 현실에 비춰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선정작의 전반적인 질을 다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심사를 맡았던“아시아 독립영화 포럼”부문의 경쟁영화 가운데 수준미달의 작품은없었다. 그러나 듣자니 전주영화제도 작은영화제의 설움을 삼켜야 했던 것 같다. 프로그래머들이 선정한 영화 가운데 몇 편은전주에 오지 않았다.“다른 데로 빼앗겼다”고 했는데 전주영화제가 아직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문제점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칸,베를린 같은 막강한 영화제서도 얼마든지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건 장기적인 안목의 전략이며 그건 전주영화제의 정체성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전주영화제는 시작에서부터 대안의 영화제를 표방하고 젊은 감독들의 독립영화와 새로운 기술의 디지털 작품에 관심을 두었다. 전통문화의 상징인 전주에서 미래지향적인 디지털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삼은 점은신선한 착안이면서도 결코 쉬운 접목은 아닐 거라는 불안도 없지 않다. 올해 전주영화제에 참가한 외국 영화인들의 평은 대부분 긍정적이다.“볼만한 영화가 많았고전주의 훌륭한 음식 그리고 젊은 자봉들이 아주 친절하다”고 칭찬을 쏟았다. 나도 전주영화제에 처음 왔다. 약점이 없진않으나 그건 시간이 가면 풀려질 문제라고생각된다. 내 고향의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은 전주영화제가 자랑스럽다. (전북일보, 2002년 5월 7일자에서)
관찰자의 눈으로 본 2003년의 전주영화제
2002년 전주영화제에 참가한 다음 나는 9월말부터 다시 부산영화제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전주영화제의 정수완 프로그래머로부터“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아 영화제의 극장가 어느 카페에서 잠깐 만났는데 정 프로그래머가 하고팠던 말은“전주 영화제를 도와 달라”였다. 너무 뜻밖이라 좀 놀랐지만 그 즈음 부산영화제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귀담아 듣고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스위스에 돌아와 남편의 의견을 물어봤더니“내가 좋으면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서두르고 싶지가 않았다. 우선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전주영화제에‘영화제 가담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옵서버(관찰자) 자격으로 2003년 행사 때 참가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느냐?’는 좀 얄궂은 질문을 보냈다. 놀랍게도 영화제에서는 아무런 이의 없이 내 요구를 그대로 받아줬다. 그리하여 한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주영화제와의 인연은 2003년으로 이어지게 됐다.
2003년에 다시 찾아간 전주영화제는 일 년 사이에 큰 변화를 맞고 있었다. 설립 초에는 한국종합예술대학교 영상원의 최민 원장과 김소영 교수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를 중심으로 영화제가 움직였다면 3회부터는 동국대학 영화과의 민병록 교수가 집행위원장으로 들어오면서 그의 제자들인 정수완과 김은희가 프로그래밍을 주도하고 있었다. 다만 정수완(현재 동국대 영화과 교수)은 민 집행위원장과 상관없이 1회때부터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다가 3회에 프로그래머가 됐다. 한편 2003년에 관찰자로 참가하면서 나는 대충 두 종류의 일을 맡아 했다. 영화제 전에는 해외 심사위원의 선정에서 영화 초청에 이르기까지, 어느 기자가 말한 것처럼국제 차원의“견인차 역할”을 했다. 영화제 동안에는 관찰자 입장에서 국제 심사위원 관리와 귀빈들의 거취문제 등을 도와주면서 조직의 약점이나 문제점에 주의를 했는데, 일 년 전 심사위원으로 왔던 때 미처알아채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눈길을 끌었다. 먼저, 영화제 구성원들의 전문지식 결핍과 국제영화단체와의 원만치 못한 접촉등으로 국제적인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건 영화제의 역사가 짧아서 생기는 흠집에 가까웠다. 문제는 미숙한 조직이 빠른 속도로 여물려면 주요프로그래머나 스태프들에게 해외영화제의 참가 기회를 주는 것과 같은 국제교류가 원활히 진행되어야 하는데 경제적 뒷받침이 약한 전주영화제의 여건으로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너무 많은 영화를 불러들인 점도 문제였다. 2002년에260여 편을 가지고도 소화불량에 시달렸음에도 2003년에 다시 280편이 넘는 영화를 초대함으로써 프로그램과 경영 사이의 균형이 꼬였다. 그 당시 전주영화제에쏟아졌던 비난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일부선정영화의 난해함도 문제가 됐었지만 무리한 프로그래밍을 소화할 수 없었던 기술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았다. 보통 국제영화제에 초대된 영화는 세 번의 상영 기회를 갖게 마련인데 전주영화제에서의 상영횟수는 두 번에 그칠 때가 많아 관객의 불만이 많았다.
전주에는 국제영화제의 이름에 걸맞은 호텔이 부족했던 데다 있는 것들마저 대부분 허술했다. 시민의 참여도가 아주 낮은 것도 실망스러웠다. 그건 꼭 전주영화제만이아니라 부산영화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유야 어쨌든 중년과 노인층의 부재는 한국영화제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약점의 하나로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의 빠른 개발이 요구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을 말하자면, 한국영화제에는 외국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하나 있다. 영화제마다 넘쳐나는 젊은이들의 영화에 대한 끔찍한 열정이 그것이다. 영화제를 방문하는 외국손님들이 한결 같이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한국영화제 특유의 현상인데, 영화의 역사가 그만큼 짧다는 걸 상징하지만 젊은이들이 중년, 노년이 될 때를 생각하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탄탄할 게 틀림없다. 전주영화제의 초기에 나타난 어려움 가운데 대중매체와의 소통문제가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부산영화제나 부천영화제에 비하면 전주영화제는 피부로 느낄 만큼 중앙지역 매체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심지어 영화전문지인“시네21”도 초기에는 전주영화제에 대해 심드렁했었다. 그런데다가 신문에 실리는 기자들의 비평을 읽을라치면 국제영화제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생기는 엉뚱한 요구와 불만족이 의외로 많았다. 더욱이 전주영화제의 약점을 지적할 때 많은 기자들이 서슴없이“부산영화제를 따라가라”는 충고(?)를 달곤 했었는데 낮은 예산의 대안영화제에게 대규모의 부산영화제를 따라가라는 것은 두 영화제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억지소리밖에 다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주영화제에 대한 매체의태도가 조금씩 달라진 것은 정보의 공정성을 위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론을 말하면, 관찰자의 입장에서 2003년 행사를 지켜보면서 나는 전주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더 많아졌다. 조직의 약한 성장으로 당장훤한 전망을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두 번째의 방문을 통해 나는 대안영화제로서 전주영화제의 가치성을 터득했고 거기서 내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전주영화제와 함께한 모험과 발굴의 5년
내가 전주영화제로부터 부집행위원장으로 부름을 받은 건 2004년 초였다. 나는 1996년 설립시기부터 8년 동안 일해오던 부산영화제를 그만두고 전주영화제로 자리를 옮겼다. 직명대로라면 영화제의 전반적인 업무에 익숙해야 했겠지만 나는 솔직히 경영과 사무 쪽은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해외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집행위에서 나를 부른 진짜 이유가 뭔지를 짐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전주영화제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영화제를 하루빨리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느냐 였으며 그래서 국제영화제의 경험을 쌓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렇다면 2년의 경험을 통해 전주영화제의 구조를 어느 정도 꿰뚫어 봤기 때문에 그에 협조할 준비가 돼있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었다. 나는 내 프로그램을 혼자 만들고 싶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100%의 자율권이 필요했는데 영화제에서는 이번에도 나의 일방적인 요구를 받아줌으로 나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2004년부터 부집행위원장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제5회를 맞는 전주영화제는 또다시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일 년 사이에 주요 프로그램들과 부문들이 싹 바뀜과 동시에 새로운 부문들이 열리는 등 정말 숨 가쁘게 돌아갔다. 프로그래밍을 주도하는 정수완과 김은희 프로그래머는 2004년의 특징을“변화와 도전”으로 내세우고 아시아 영화의 발굴에 중점을 뒀던“아시아 독립영화 포럼”을 5대륙을 포괄하는“인디비전”으로 확장했는가 하면“다큐멘터리 비엔날레”는비디오 아트, 실험영화, 영상 콜라주 작품들에 초점을 둔“영화보다 낯선”부문으로 대치했다. 그뿐만 아니라“필름메이커스 포럼”과“지프 마인드”,“어린이 영화궁전”등의 부문을 새로 마련한데다가 일 년 전에 무리한 프로그래밍으로 문제가 많았음에도 289편의 영화를 초청하는 등 과감한 변화를 꾀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영화제의 이런저런 일을 도와줬다. 예를 들어, 체코의 영화평론가이며 1992년 카르로비 바리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테레사 브르드체코바를 2004년“인디비전”의 심사위원으로 부르고“디지털 스펙트럼”에 스위스감독 페터 리히티의 디지털 에세이 <잭, 금연하다>를 초청했다. 그리고 바젤의 뉴미디어 연구소 플러그인(plugin)과 협조하여스위스 미디어 예술가들의 여섯 개 작품을“지프 마인드 2004”의 프로그램에 초대했다. 플러그인의 대표자 안네트 쉬들러는 나의 추천으로 2003년에“디지털 스펙트럼”의 심사위원으로 일한 바 있었는데, 전주영화를 아주 좋게 본 그는 2004년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싶다고하여“지프 마인드 2004”의 조한상 프로그래머와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줬다.“버추얼리 스위스: 스위스 미디어 아트 투데이”(virtually Swiss:Swiss Media Art Today)의 주제로 짜인 쉰들러의 큼직한 프로그램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전북대삼성문화회관의 전시실과외부의 특별 전시장에서 영화제 동안에 소개됐으며 전시장에는 아홉 명의 스위스 작가들이 직접 참가하여“지프 마인드”의한국 미디어 예술가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었다. 예술가들의 전주영화제 방문은 스위스 정부의 후원재단 프로 헬베티아의 협조로 이뤄졌으며 쉰들러의 주선으로 스위스 전시와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노스탤지어 전주”의 한국작품 15편이 2004년가을 플러그인에 초청되어 조한상의 안내로 바젤에서 특별 시사회를 가졌다. 그 밖에도 나는 해마다 프로그래머들과 상당수영화제를 돌아다니면서 프로그래밍에 깊이 관여했는데 스위스 플러그인 프로그램 다음으로 획기적인 프로그램은 2007년의 아르타 바즈드 펠레시안 특별전이었다. 1968년에 모스코바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한 아르타바즈드 페르시앙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러시아 다큐멘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감독이다. 전위파 영화의 전통을 재생시킨 대가이며 60년대에고다르 감독이 그의 작품의 위대함을 발견한 뒤부터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2006년 스위스의“빈터투어 단편영화제”서 그의 작품이 소개될 때 그를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힘겨운 협상을 거쳐 그의 명작 7개 작품을 전주영화제에 가져올수 있었다. 이들은 <시작, 1967>, <우리,1969>, <서식 동물, 1970>, <사계, 1972>,<우리 세기, 1983>, <끝, 1992>, <생명,1993>이었다.
앞에서 나는“내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말을 했는데, 전주영화제에서 했던 여러 가지 작업 가운데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건 해마다 전주영화제에 제출된 내프로그램들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서구중심을 벗어난 세계의 변두리 지역 영화에관심이 많았다. 왜냐면 소위 제3세계(개발도상 국가들)로 불리던 지역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숱한 수작들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데가 쿠바, 마그렙 나라들, 옛 소련연합의 4개국, 터키, 중앙아시아의 5개국이었으며, 여러 곳에서 힘들게 찾아낸 희귀의 작품들은“발굴 영화”의 이름으로 전주영화제를 통해 한국의 관객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