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 |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늑대아이
관리자(2012-10-08 14:28:36)
당신이 자라는 만큼 나도 자란다
송경원 영화평론가
최근 엄마 영화가 자주 눈에 띈다. 부모 자식 간의 드라마야 원래 거의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자 극의 단골 소재였지만 요즘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예전과는 다소 다른 양상임을 느낄 수 있다. 일단 시선이 다양하다. 림 랜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처럼 자식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영화도 있고, 화제가 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도 모성과 구원에 관한 영화도 있다. 기발한 상상력의 대명사 픽사가 신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전통적인 어머니와 딸의 갈등을 그리는가 하면 <레지던트 이블5>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서조차 모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는 등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모녀관계가 연일 쏟아진다.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든 아니면 써먹기 좋은 갈등의 원형에 대한 활용이든 모성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해석을 연달아 듣다보니 영화는 어떤 어머니의 모습을 갈망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상적인 부모자식의 관계에 대해 되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에서 촉발된 의문.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정답 없는 질문들. <늑대아이>를 만난 건 그 즈음이다. 마치 부모 자식 간의 만남처럼 원했건 아니건 상관없는 절대적인 이어짐. 혹은 (내가 바라온) 정답.
<늑대아이>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썸머 워즈>(2009)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신작이다.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한 13년의 시간을 2시간에 담아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는 지금 현재 일본에서 300만이 넘는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 중이다. 어찌 보면 응당 블록버스터가 차지해야 하는 그 자리를 이렇게 작고 착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차지해도 되는 건지 조금은 의아한 마음을 들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인생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늑대아이>에는 당장 오늘을 살아남느라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담겨 있다. 언젠가 장 뤽 고다르가 말했다. 시간이 영화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시간을 지켜주었다고. 이 애니메이션이 담아낸 13년간의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평범한 여대생 하나는 어느 날 운명의 그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는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하나는두 아이와 함께 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문제가 또 있다. 하나가 사랑했던 그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늑대인간이었던 것.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늑대인간인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한 하나는 그가 남기고 간두 아이, 첫째 유키와 동생 아메도 씩씩하게 키울 것을 다짐한다. 언젠가 올 선택의 순간, 늑대의 삶이건 인간의 삶이건아이들이 후회 없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마음으로육아를 시작하는 하나. 하지만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도시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고 흥분하면 수시로 늑대로 변하는 아이들을 계속 집에만 둘 수도 없어진 하나는 시골로 내려가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는 그렇게아이들이 자랄 때까지의 13년 간 매일매일 작고 사소한 기적들을 기록해 나간다.
늑대인간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만 빼면 그다지 특별한 사건은 없다. 그럼에도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는 이유는 일상의 기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이미 독자적인 작화 스타일과 세계관, 실사에 바탕을 둔 자연스런 연출을 선보였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최근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며 일약 일본 애니메이션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가조명하는 성장이란 억지로 자라기를 종용하지도 않고 원하는 모양으로 자라도록 틀에 끼워 맞추지도 않는 기다림이다.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도록 자리를 마련해주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양쪽 모두에 대한 기회를 주는 것, 달리 말하자면‘아무 것도 하지 않는’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켜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울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늑대아이>는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교감의 시간을 화면에 새긴다.
눈 오는 날 태어났다고 해서‘유키’라 이름 지어진 활달한 말괄량이 소녀 유키는 그녀는 시골에서의 삶에 금방 적응하고 넓은 산을 뛰어다니지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인간으로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반면 비 오는 날 태어난 남동생 아메는 조용하고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난 후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늑대로써의 삶을 결심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과 선택의 순간에는 늘 엄마 하나가 함께 한다. 그녀가 아이들과 소통하며 함께 지나온 시간은 단지 그녀만의 또는 아이들만의 추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부모님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부모님 역시 나와 같은 시절을 보냈고 나도 언젠간 부모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같은 시간을 겪는 다는 것, 내가 변하는 만큼 상대도 변하고 내가 성장한 만큼 상대도 성장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한쪽이 한쪽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며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것에 가깝다. 내가 자란만큼 부모님도 배우고 자란다는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결정을 기다려주는 여유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늑대아이>는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쌓아간 엄마 하나의 성장기이자 아이들의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나온 (혹은 앞을 지나야 할) 추억의 되새김질이다. 혹시 당신이 바쁘게 달려가느라 흘리고 갔을지도 모를추억의 부스러기를 담아, 현재 애니메이션이 구현할 수 있는최고의 기술력으로 그려낸 한 편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