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 |
[문화칼럼] 나를 진화시키는 위대한 신세계
관리자(2012-10-08 14:26:50)
나를 진화시키는 위대한 신세계
최성범 우석대학교 교수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오랜만에 주말 저녁 가족끼리 외식을 나갔다. 음식점에 도착하여 테이블에 앉자마자 침묵이 흘렀다. 마치 서로 싸우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버지, 어머니, 고교생 딸, 중학생 아들 모두가 마치 묵상하듯 아무 말이 없는 게 아닌가.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페이스북, 어머니는 카페의 글을 읽고 있고, 딸과 아들은 카톡 채팅에 정신이 팔려 있다. 요즘 음식점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하철에서도 이 같은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20대 여성들의 손에는 시집이 있었다. 독서인구는 적어도 시 독자가 기이하게 많은 나라가 한국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승객들이 페이스북 아니면 카톡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들어 본 적도 없던 인터넷과, 2-3년 전 시작된 스마트폰이 이처럼 세상의 모습, 사람 사이의 관계,그리고 삶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돌이켜보면 SNS로 인해 필자의 삶도 적잖이 바뀌었다. 불과 6년전인 2006년 여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직장 때문에, 학연 때문에 알고 지내던 인연이 만나는 사람의 전부였고 사는 곳은 오로지 자는 장소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사는 동네의 카페에 가입하게 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SNS의 세계에 들어섰고 필자의 사는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이른바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게 된 날은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마치 대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미팅에 나갈 때 괜스레 설레기도 하고 수줍기도 했던 그 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름이 아닌 닉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졌고 먼저 말 꺼내기도 주저되는 그런 느낌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다 한다는 카페를 뒤 늦게 시작했다.마침 직장일이 한가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글쓰기에 대한 갈증도 생기던 참인지라 금세 동네 카페에 빠지고 말았다. 15년 이상을 한 동네에 살면서도 바빠서, 기회가 없어서 좀처럼 연을 맺지 못했던 동네 사람들과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인연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바다 위의 외딴 섬에서다른 섬들로 연결된(connected) 셈.닉네임을 쓴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써보니 닉네임이야말로옛날 선조들이 쓰던 아호와 호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옛사람들이 아호를 쓰고 정식으로 호를 썼던 관행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멋을 부리려고 한 게 아니라 나이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의 하나이던 시대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교우하면서 나이 차이에 따른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친구처럼 지내보려는 시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 카페의 오프라인 모임에선 호칭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함이 없다. 그냥 닉네임 뒤에 무조건 님 자만 붙여주면 되니까. SNS가 아닌 일반 모임에서야 서열을 확인하기 위해선 식사를 하거나 술 한 잔 하면서 족보를 따져 보고나서야 그냥 ○○씨로 부를 건지, 반말을 틀 건지, 형이라고 할지, 무한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연장자에 대한 호칭도 그냥 ○○형과 형님과 성님으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친소 관계와 서로의 나이에 따라서 사용가능한 경우가 달라진다. 그러나 닉네임을 쓰는 모임에선 오프라인에서 만나도 일단 닉네임 뒤에 님 자만 붙여주면 되니까 눈치 보기가 줄어들어 거리낌이 없어진다. 술자리에서 반말 시비로 인한 폭행사건이 신문 사회면 한쪽 구석을 툭하면 차지하는 나라에선더욱 그러하다. 부르는 호칭이 평등해지니까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 정립이 가능해진다. 직책이나 직함이 꼭 따라다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관계가 생기지 않는 것과는 반대다.
SNS가 진화하듯 나의 SNS도 진화하고 있다. 뒤늦게 카페에 가입했지만 그중 맘 맞는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해 만든 카페가 이젠 동네 사람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부동산에 지나친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인 이슈에서 극단적인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번엔 아예 숨은 카페를 새로 차렸다. 일종의 계모임이나 마찬가지다. 목적은 모여서 즐겁게 놀고 술 마시는 것 말고는 없다. 얼마전에 휴대폰 전화번호에 저장된 즐겨찾기 명단을 봤더니 정작 친동생들은 없고 동네 카페 선후배들 전화번호만 잔뜩 있었다. 이웃 사촌이라는 옛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재작년엔 스마트폰을 사면서 드디어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세계에 들어섰다. 아직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는 편이긴 해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카페 들어가 보고, 페북과 카톡도 수시로 확인하다보니 공연스레 바빠지기도 한다. 트위터에는 정을 붙이기 못할 것 같다. 너무 주장이 강해서 은은함과 여유가 전혀 없다. 북적이는 시장에서 물건을 팔려고 외치는 듯한 느낌이다. 이 공간에선 뭔가 강렬함과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 태생적으로 미지근한 체질은 글쓰기조차쉽지 않다. 약간은 두려운 공간이다. 가장 자신을 쉽고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건만(140자 이내로)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제약 받는 느낌이다. 아마도 본인이 스타기질이 있는 유명 연예인이나 문인, 그리고 유명 기업인등 기본적으로 스타기질이 있는 사람들에겐 신나게 일장연설을 하거나 계몽할 수 있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나서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겐 영 아니다.페이스북은 그래도 내가 익숙한 카페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내 글을 볼 사람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페이스북 상의 친구는 내 이메일과 휴대폰 저장번호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사회생활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페북친구들이란 게 따져보면 대학동창, 사회친구가 대부분이다. 주커버그도 하버드 동창생들과의 연락망 차원에서 만든 게 페이스북의 시초라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아늑함과 익명성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닫힌 카페와 트위터의 중간 쯤인 것 같다. 대충 시덥지 않은 소리를 쓰기엔 약간의 부담이 되긴 해도 적당히 놀 수 있는 공간이다.SNS이론의 대가인 클레이서키는 그의 저서 <새로운 사회와대중의 탄생(Here Comes Everybody)>에서 이렇게 말했다.‘인간은 타고난 사회성을 갖고 있어 소통을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소통의 방식이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그렇다. 소통으로 사회가 만들어지니 소통방식이 바뀌면 세상도 바뀌기 마련이다.앞으로 SNS를 통해 세상과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부족한 점도 많다. 한 페친은 이렇게 느낌을 표혔했다.‘트윗과 페북 SNS를 몇 년 했다, 처음엔‘소통의 창구’라 생각했는데 생각이 점점 바뀐다, 소통이란 서로의 의견 차이을 좁혀가는 대화의 과정일 텐데SNS가 정말 그런 기능을 하는지,,, 오히려 자기 의견을 외친다음 듣고 싶은 메아리를 들으며, 자기 의견을 강화해가는광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하지만 SNS는 아직 진화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집단지성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기존의 미디어와 SNS의 장점만이 모인 새로운 소통방식의 출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