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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2005년 베를린 영화제의 임권택 회고전 2
관리자(2012-09-07 15:34:44)
오마쥬, 베를린의 찬사를 받다 심혈을 기울인 상영작 선정 임권택 감독은 자타가 인정하는 다작 감독이다. 그건 6~70년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 감독들 대부분이 그랬듯 일 년에 평균 대 여섯 편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당시의 제작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여서 62년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연출을 막 시작한 임감독에게도“여기저기서 연출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다작 감독으로 불리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작은 곧 저질영화라는 인식에서 오는 껄끄러움 때문인 듯 했는데, 그는 초기영화를“싸구려 액션물”또는“흥행영화”로 낮춰보면서 70년대 말 이후“내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과 뚜렷한 차이점을 뒀다. 그가“나도 진지한 작품을 해낼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1972년에 자신의 돈을 들여서까지 만든 영화가 <잡초>였다. 하지만 그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고 원판마저 없어져 해외에서는 임감독의“작가영화”제작시기를 <족보, 1978>와 연결시키곤 했다. 그리하여 과거 해외에 초청된 영화는 안타깝게도 <족보> 전후에 나온 15편 안팎이어서 임감독 필모그래피의 1/6에도 못 닿는 작은 숫자였다. 그러기에 나는 벨리날레의 프로그램에 <족보> 이전의 초기작품을 몇 편이라도 넣고 싶었다. 그러나 임감독은“그건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두서너 번 더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어서 하는 수 없이 임감독 작품의 전문가로 알려진 정성일 평론가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도“아마 안 될 거에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무리 저질 영화라고 해도 감독님의 영화인데 벨리날레의 기회에 몇 편이라도 국제초연을 하자고 계속 졸라 결국 5편을 허락 받았다. 그런데 <족보> 이전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임감독이 보내준 책“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2부”(정성일 저술)를 먼저 읽고 12편의 영화를 골랐다. 그리고 작가의 의견을 묻기 위해 정평론가에게 메일을 보내면서‘덧붙일 영화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친절하게 내가고른 12편에 6편을 덧붙여주고는 사견임을전제로“임감독의 후기 작품들을 설명할 수있는 많은 단서들이 있는 6편”이라는 해설까지 달아주었다. 2003년 9월말 부산영화제에 가는 길에 서울에 들러 임권택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를 만나 앞서 고른 18편의 초기영화에 대해 긴 토론을 한 다음 임감독 의견에 따라 편수를 12개로 줄였다. 부산영화제가 끝난 뒤 영상자료원에서 그 12편을 봤는데 그 중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 <몽녀, 1968>, <돌아온 왼손잡이, 1968>는 자료가 없거나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아 볼 수 없었고 나머지 9편도 문제가 심각해 그 중 6편은 아예 비디오로만볼 수 있었다.2003년 11월말 전주영화제의 일로 민병록위원장과 정수완 프로그래머와 함께 도쿄의필름엑스 영화제(FilmeX Festival, 집행위원장 하야시 카나코)에 참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12월 3일 서울에서 임감독과 정 평론가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임감독의 촬영시간때문에 아침 일찍 인사동의 찻집에서 만나 선정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을 했다. 내가 영상자료원에서 본 초기작품 9편 가운데 임감독과 합의를 본 영화는 5편이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부의 영화는 내가 뽑은 21편 중 15편이 선정되어 그날 아침에 프로그램에 들어갈 20편이 결정됐다. 초기작품 다섯편을 소개하면 <망부석, 1963>, <요화 장희빈, 1968>, <30년만의 대결, 1971>, <왜 그랬던가, 1975>, <왕십리, 1976>이었다.벨리날레의 임권택 회고전 관련 프로그램책임자는 그레고 부부였다. 이들은 앞서 말했듯 80년대부터 국제포럼을 통해 한국영화 발굴에 앞섰던 선구자들로 부산영화제로부터“한국영화 해외공로상”을 받을 만큼 한국영화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임감독 작품에 심취돼 있었다. 지면상 그레고 부부의 공적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공동 작업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62년의“독일 시네마테크 동호회”(Freunde derDeutschen Kinemathek) 설립과 1970년 아르세날 상영실 개관 그리고 1971년의 국제포럼 창설이었다.“독일 시네마테크 동호회”는 국제포럼 상영작의 프린트를 사들여 보전함과 동시에 설립시기부터 특정 테마에 대한 책자를 출간했는데 임감독의 회고전을 계기로“임권택”이라는 제목의 책자가 2005년 출간됐다. 그리고 아르세날 상영관은 벨리날레 동안 국제포럼의 주 상영관으로 쓰이며 영화제 이후 임감독 회고전의 일부분이 한 달 동안 상영됐던 곳이기도 하다.2000년에 포즈담 광장 근처의 필름하우스에 새로 자리를 잡은 아르세날 상영관(kinoArsenal)은 영화, 비디오 예술을 위한 전문기관으로 두 개의 상영관을 갖추고 있으며“독일 시네마트테크 동호회”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에게“황금 곰 명예상”을 2005년 55회를 맞는 벨리날레는 여느 때보다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즈담 광장과 주변은 여러 특별 행사들로 붐볐고 스타들의 행진이 그치질 않았다. 또한 1백여 나라에서 온 400편의 영화들이 10개 부문의 프로그램을 꽉 채웠고 필름마켓에서도 500개에 달하는 영화를 사고팔았다. 2005년에 출품된 한국영화로는 파노라마 스페셜 부문의 <녹색 의자>(박철수감독)와 파노라마 단편 부문의 <세라 진>(김성숙 감독)을 찾아볼 수 있었고 포럼에서는 <여자, 정해>(이윤기 감독)와 <신성일의 행방불명>(신재인 감독)이 상영됐다. 임권택 감독 회고전은 대체적으로 코슬릭이 부산의 첫 모임에서 발표한 세 개의 계획에따라 전개됐다. 프로그램의 20편 영화는 벨리날레와 포럼 그리고 아르세날 상영관의세 곳으로 나누어 상영됐다. 먼저,“벨리날레 작품전시 : 임권택”(BerlinaleWerkschau : Im Kwon Taek)의 주제로 진행된 국제포럼 프로그램은 <족보>, <길소뜸>, <축제> 세편을 소개했다. 그리고 임감독의초기영화 5편을 포함한 16편의 영화는 영화제가 끝난 뒤에 아르세날에서 한 달 동안 상영됐다. 아르세날에서 소개된 16편은 <만다라, 1977>, <짝코, 1979>, <불의 딸, 1983>,<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 <씨받이, 1985>, <티껫, 1986>, <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장군의 아들, 1990>, <서편제, 1993>, <취화선, 2001>, <하루 인생>이었다. 벨리날레와 국제포럼의 카탈로그에 들어있는 인터뷰 글은 내가 2000년 초에 임감독과 그의 집에서 두어 시간에 걸쳐 나눈 대담의 일부가 인용된 것이다. 임권택 감독 회고전의 절정은“벨리날레의 특별 축제”(Berlinale Special Gala)이었으며 2월 12일 저녁에 진행된 축제의 프로그램은“황금곰 명예수상”과 <춘형뎐>의“특별 시사”였다. 코슬릭과 그레고 부부는공식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임권택 감독 부부를 귀빈실에서 만나 축하한 다음 그에게 벨리날레의 상징인 빨간색 목도리와 회고전을 계기로 특별히 출간된 책자“임권택”(Im Kwon-Taek)을 선물했다. 앞의 책자는“독일 시네마테크 동호회”에서 특별테마를 중심으로 출간하는 전문책자(192장)의 98호에 속하며 그레고 부부 그리고 시네마테크 동호회의 안겔리카 호흐가 공동으로편집했다. 그리고 기고문은 서구에서 한국영화의 전문가로 알려진 영국의 토니 레인즈,이탈리아의 아드리아노 아푸라, 프랑스의장-미셀 프로동, 독일의 프리쯔 괴틀러, 랄프 움아르드와 한국의 정성일 평론가와 내가썼으며 편집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편집인들의 고문 겸 협조자로 작업에 참여했다.관심의 초점이었던“황금곰 명예수상”은저녁 9시30분 베를린의 중심지 쿠담에 자리잡은 필름팔라스트(아스토 필름 라운지 전신)에서 이뤄졌다. 영화관 라운지에서 열린조촐한 예식은 울리히 그레고의 축사로 시작됐고 그 다음에 코슬릭의 손에 들려있던 묵직한 황금곰이 임감독에게 주어졌다. 짙은청색 두루마기를 입은 임감독은 황금곰을 두손으로 받아 들고는“내가 감독이 된 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환하게 웃으며 감동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역시 연분홍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부인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황금곰을 들어 보이며 다정하게 웃었는데 둘 다 아주 행복해 보였다. 2005년의“황금곰 명예상”수상자는 임권택 감독과 페루 출신인 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즈 감독이었고 임감독은“평생 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을 받았다. 그는 과거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으나 A급 영화제에서 명예상을 받은 건 그게 처음이었다. 1982년에 시작된“황금곰명예상”은 아주 뛰어난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주어져왔는데 예를 들면 빌리 와일더, 로버트 알트만, 페르난도 솔라나스 등의 감독들과 소피아 로렌, 더스틴 호프만, 캐터린느 드뇌브 등의 배우들이었는데 동양에선 임감독이 처음이었다. 사실 코슬릭이 부산에서 임감독에게 제시한 상은“황금카메라”였으나 그건 말실수였음이 밝혀졌다. 원래“황금카메라”상은 벨리날레가 아니라독일의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잡지“회르주”(Horzu)에서 영화제 전야제에 주는최고급의 상이며 수상자는 벨리날레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인물들이었다.전통적으로 벨리날레는 황금곰 명예상의 수상자에게 경의의 표시로 수상자가 스스로 고른 영화 한편을“특별 시사”하는데 임권택이 고른 영화는 <춘향뎐>이었다. 임감독 회고전의 상징으로 떠오른 <춘향뎐>은 2005년벨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선정된 14편 영화의 하나로 그의 명예수상식이 끝난 뒤 같은장소에서 늦은 저녁에 상영됐다. 임감독은 <춘향뎐>을 뽑은 데 대해“내가 특별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한국의 문학적 고전과 판소리가 어울린 영화를 선택함으로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성에 더 무게를 뒀다”고 했는데관객과 평론가에게 인기가 높았다.다음은 임권택 회고전에 대한 벨리날레의 공식 프레스(2005년 2월 1일자)에 실렸던 글을 옮긴 것이다.“임권택은 1백 편의 영화를만든 감독으로 그 중 몇 편은 과거 벨리날레에서 소개됐었다. 그의 작품들은 다각적이고 영향력이 강하다. 임권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횡단면을 묘사하는데 있어 한국전쟁과 분단의 주제로 자주 되돌아간다. 그의영화들은 형식이 다양하면서도 명백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힘이 있으며 영상적으로 긴장감을 자아냄과 동시에 절제되어 있음으로 품위가 있고 음악적이다”. <춘향뎐> 은“절묘한 형식을 바탕으로 사랑의 가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한국의 전통적인 성악은 영상적으로 그려진 설화의 매력을 높여주고 있다”고 호평을 했다. 임감독의 기자회견은 <춘향뎐> 특별 시사가 있은 뒤 13일 아침 울리히 그레고의 주도로 시작됐다. 회견장에는 그를 만나러 모여든 기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한국의 문화방송과 한국방송 그리고 시네21기자 등이 참가했다. 여기에 기자들의 질문 가운데 몇 개만 인용한다. 질문: 아시아에서 최초로“황금곰 명예상”을 받은 기분은? 대답: 내가 수상자로 선택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 영화생애에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을 받고 난 지금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그건 사실 한국영화의 명성 덕분이었다. 국제영화계는 한국영화의 위광을 드디어 인정한 것이고 나는 단순히 한국영화의 대표자 하나로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질문: 상을 받으면서 생각한 사람은 누구? 대답: 나는 1962년부터 영화를 만들어왔다. 상을 받고는 나와 영화를 만들면서 도움을 준 동료들과 젊은 협조자들을 생각했다. 나 혼자 영화를 만들었다고 잘못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그리고 내 머리 속을 휘돌아가는 사람들을 중에 내 마누라도 들어있었다. 질문: 독일의 유명잡지 스피겔 (Spiegel)은 당신을 한국영화의 대부로 묘사했다 대답: 그건 사람들이 나를 추켜올린 것으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지로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때때로 한 적이 있었고 창작 면에서 그렇게 미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상을 타고나서야 내 창작력이 아직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기자회견 뒤 임감독은 부인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국의 기자들과 나를 점심에 초청했다. 우리는 벨리날레의 옛 건물 쪼 팔라스트 맞은편에 있는 중국식당 양자강에 모여 아기자기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기분이 좋아진 임감독은 곁에 앉은 부인에게“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했는데 오늘은 맛있게 먹으라”고 하고는 오래속으로 간직했음직한 말“당신 사랑해요”를 조용히 속삭였는데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는 뜻밖의 수줍은 사랑고백을 듣고는와! 하면서 손뼉을 쳤다.임감독은 귀국하기 전에 만프레드 듀니옥 묘지를 꼭 방문하고 싶어 했다. 그는 80년대<만다라>를 독일에 소개했던 배급자인데 다행히 에리카 그레고의 도움으로 듀니옥의묘지를 어렵사리 찾아갈 수 있었다. 임감독은 하얗게 눈에 덮인 듀니옥의 묘 앞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세 번 했다. 친한 친구도 아닌 옛적의 죽은 친지 앞에 깊게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는 임감독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봤다. 사실 임감독 회고전은 때때로 힘에 벅차고 마음고생이많았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았다. 그레고 부부의 커다란 도움과 영진위의 든든한 지원은회고전 성공의 밑받침이 돼줬다. 그러나 가장 귀중했던 것은 영화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임감독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이다. 이 글을 임권택 감독님께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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