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2.9 |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두 개의 문
관리자(2012-09-07 15:34:18)
매혹의 다큐멘터리, 진실과 마주하다 김경태ㅣ영화평론가 2009년 1월 19일,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지어 마지막까지 생존권을 요구하며 저항했던 철거민 5명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상부의 맹목적인 진압 명령에 따라 현장에 대한 충분한 숙지를 하지도 못한 채 투입된 경찰특공대원 1명 또한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허무하게 죽어갔다. 이 사건은 용산참사로 불리며, 화염병을 던지며 불법폭력시위를 벌였던 철거민들이 참사를 촉발시켰다는 검찰 측의 주장과 공권력의 과잉진압이 참사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철거민들과 대책위원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법원은 검찰의 손을 들어졌고,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범법자가 되어 수감 중에 있다. 따라서 용산참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수감자들이 사면되고 정권이 심판을 받아야만 일단락 될 것이다. 참사가 벌어지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김일란·홍지유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2012)이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소환해냈고 또한 극장에서 정식 개봉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장기 상영에 돌입할 수 있었던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그 참사의 현재성을 반증하고 있다. <두 개의 문>이 지닌 정치적 함의의 의도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 다큐멘터리가 선택한 재현 전략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각종 자료들을 치밀하고 냉철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분노나 증오, 슬픔 등의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사건의 당사자들과 최대한 거리를 둔다. 철거민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게 보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철거민 가족들의 인터뷰도 없다. 대신 사건의 초점은 철거민들보다는 경찰특공대에 맞춰져 있다. 이는 보다 견고한 구조적 부조리를 포착하기 위해서이다. 차가운 이성만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말이다.사실 그동안 <송환>(2004), <디어 평양>(2006), <우리학교>(2007), <워낭소리>(2009) 등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다큐멘터리들이 가지고 있던 대중적 호소력은 감독과합일된 카메라의 시선이 대상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극적 호흡은‘감독과 대상의 친밀한관계’에 크게 빚지고 있다. 많은 관객들은 그 관계의 진정성에 설득을 당했다. 물론 <두 개의 문>을 만든 영상집단‘연분홍치마’의 전작들도 같은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일례로, 이혁상 감독의 <종로의 기적>(2011)은 게이인 주인공들과 감독이 몇 년간을 함께 활동하며 맺은 친분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였기에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다. 반면,<두 개의 문>은 이들과 괘를 달리한다. 전자의 영화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스펙터클을 찾기 위해 극적인 구성을 취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는 이미 그 자체로 이목을 끄는 긴박한 사건에 현란한 편집 테크닉을 가미해 그 스펙터클한 특성을 배가시키고자 했다.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들이 수백시간의일상을 기록한 테이프들을 돌려보며 감동을 증폭시킬 수 있는 드라마를 구성해냈다면, <두 개의 문>은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덧입혔다.이를 위해 <두 개의 문>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외부의 다양한 시선들을 취합한다. 용산참사를 기록한 산재하는 다양한관점의 카메라와 미디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인터넷방송에서부터, 경찰 측 기록영상, TV뉴스, 신문, 자술서, 재판기록, 인터뷰, 재현장면에 이르는 각종 날자료들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건 자체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보다 그 수많은 영상 / 매체자료들을 어떻게 취사선택해서 배열하고 배치하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감독은 그것들을 논리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재구성하며 거기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다.나아가 사운드와 공조하는 타이포그래피의 현란한 율동은곧‘미디어가 메시지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야말로 이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흡입력의 발로이다.독립다큐멘터리 진영의 일각에서 이러한 형식 때문에 그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과거 초창기 독립영화는 그 자체가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이었다. 즉 당시 영화제작자들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매혹에서 카메라를 든 것이나 아니라 영화가 사회의 불합리를 폭로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카메라를 들었다. 후자에게는 활동가로서의정체성이 더 중요하기에 화려한 영화적 기교나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더라도) 현장에서 함께투쟁한 보이지 않는 물리적 시간과 생생한 현장성이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러하니 철거민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도없을뿐더러‘방송다큐’같은 너무나 세련된(!) 편집을 선보인 <두 개의 문>은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연분홍치마의 정치적 신념과 영화적 감수성이 절충된 윤리적 결과이다. 물론 이러한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들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효율적인 선동도구가 되어 대중들을 각성시키고나아가 실천을 유도하는 것이다. 최소한 <두 개의 문>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7만 명에 가까운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으니, 일차적인 목표는 초과달성했다. 독립다큐멘터리의 정신이 발원하는 곳은 영화의 형식이 아니라 의도에 있는 것이다.만약 이 영화가 미화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철거민도 아니고 경찰특공대도 아닌, 다큐멘터리의 형식 그 자체이다. 그 정밀한 호흡 안에서 각종 자료들은 그들이 있어야만 할 본래의 자리를 하나둘씩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만이 사건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 길을 최대한 매끈하고 깔끔하게 포장한다. 관객들이보다 수월하게 설득되어 따라올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그동안의 많은 독립다큐멘터리들이 ‘따뜻한 공감’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두 개의 문>은‘차가운 매혹’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