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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 |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2005년 베를린 영화제의 임권택 회고전 1
관리자(2012-08-03 16:07:05)
한국영화의 거장, 유럽으로 향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과거에 한국영화를 유럽에 알리려고 꽤나 많은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어떻게 하면 유럽에 한국영화를 더 많이 더 널리 알릴 수 있을까? 어떤 영화제와 어떤방법으로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등의 호기심과 욕구가 나를 이따금씩 사로잡곤 했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은“한국영화 회고전”또는“한국감독 회고전”의 이름으로 유럽의 몇몇 영화제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그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행사는 1994년 스위스의 한국영화 회고전과 2000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 그리고 2005년 베를린 영화제의 임권택 회고전이었는데, 처음의 두 행사에대해서는 문화저널의 2011년 2월호와 2012년 4월호에 이미 실린 바 있어 이번 글에서는베를린 영화제의 임권택 회고전에 초점을 맞춰 쓰려한다. 한국영화, 벨리날레와 인연을 맺다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 프로젝트는 2002년 그의 98번째 영화<취화선>이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에 구상됐다. 임감독은 2000년에 <춘향뎐>이 경쟁부분에 선정되면서 칸과 인연을 맺은 다음 2002년에 <취화선>으로 미국감독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링크 러브>와 공동감독상을 받았던 것으로, 한국영화가 칸에서 감독상을 받은 건 <취화선>이 처음이었다. 따라서 한국영화계에서는“한국영화가 드디어 해냈다”며 임감독의 수상을 몹시 반겼는데 워낙 수상 문턱이 높았던 칸에서 받은 희귀의 상이었으니 영화계가 들뜰 만도 했다. 임감독 회고전은 과거 많은 곳에서 여러 번 열렸으나 모두 중소규모의 영화제에서였다.그래서 나는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부터 반드시 A급 영화제와 연결시키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임감독은 백 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든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세계 많은 곳에서 상영될 정도로 그는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었다. 그런 수준이라면 큰 영화제에서 적어도 한번쯤은 회고전이 열렸을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어찌 보면 대형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카를로비바리의 한국영화 회고전은 딱 한번의 예외였으며, 내가 임권택 회고전 프로젝트를 착상할 수 있었던 것도 카를로비바리영화제의 성공적인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임권택 프로젝트를 만들면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곳이 베를린 영화제 (보통“벨리날레”Berlinale 로 부름)였다. 임감독의 작품이유럽에서 맨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상영된 곳이 바로 베를린 영화제였기 때문이었는데, 1982년의 <만다라>를 비롯하여 <길소뜸,1985> <서편제, 1993>, <태백산맥, 1994>,<축제, 1998>등이 베를린 영화제의 경쟁부문과 국제포럼에서 유럽 초연을 가졌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한국영화와 베를린 영화제의 밀접한 관계는 한국영화가“황금기”에접어들던 60년대 초에 맺어졌다. 예를 들면,1961년에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베를린영화제서“특별상”(은곰상)을 탔는가 하면1962년에 신상옥 감독의 <최후의 날>이 다시경쟁부문에서“은곰상”을 받음으로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을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좋은계기가 됐었다. 그 뒤에도 한국영화는 심심찮게 벨리날레에 나타났었으나 수상에 이르지는 못했고, 벨리날레 뿐만 아니라 마를 국제포럼에서도 80년대부터 이장호, 장선우, 박광수 감독들의 군사정권에 비판적인 영화들이등장해 한국영화를 서구에 알리는데 앞장을섰었으며, 군정 이후에도 한국의 젊은 감독들의 영화, 특히 저예산 독립영화의 발굴에 끊임없이 힘써왔다. 베를린 영화제 그리고 코슬릭 집행위원장 21세기에 들면서 베를린 국제영화제는 새 집행위원장을 맞았다. 1979년부터 벨리날레를 끌어오던 모리즈 더 하델른이 2001년에 물러나고 그 자리에 디터 코슬릭이 새 집행위원장으로 들어왔다. 1948년생인 코슬릭은 90년대 노르드라인-웨스트팔렌 지역에서 영화기금조직체의 이사로 활약한 영화지원정책의 전문가였다. 그가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는 국제포럼과의 새로운 관계설립이었다. 더 하델른의 시절까지만도 베를린 영화제(1951년 설립)와 국제포럼(1971년 설립)은 한 영화제안에 두 조직체로 존재하면서 늘 경쟁관계에 놓여있어 갈등이 많았었으나 코슬릭이 부임되면서 30년의고질적인 앙숙관계는 드디어 풀어졌다.그리고 국제포럼(원명은“새로운 영화의 국제포럼”international forum of new cinema)에서도 세대교체가 있었다. 2001년에 국제포럼의창시자들인 울리히 그레고와 그의 부인 에리카는 30년간을 지켜오던 대표 자리를 크리스토프 테르헤흐테에게 물려줬다. 테르헤흐테(1961년생)는 영화기자 출신으로 90년대 초에 베를린 시의 주간지“팁”의 편집장이 되면서부터 국제포럼의 영화선정위에 가담했었다. 한편, 국제포럼은 2001년 벨리날레가 10개가 부문으로 새로 나눠지는 과정에서 독립체제에서 벗어나 한 부문 Section 으로 재조정되었으며 이름도 국제포럼에서“포럼”으로바뀌었다. 아무튼, 벨리날레와 포럼의 단일화는 임권택 회고전에 효과적인 결과를 낳았고특히 그레고 부부의 도움이 아주 컸다.벨리날레는 1990년부터 거의 해마다 다녔던지라 영화제 사람들을 상당히 알고 있었으나코슬릭 집행위원장과는 아직 낯이 설은 사이었다. 그러나 그와의 연락은 의외로 쉽게 이뤄졌다. 2000년 8월 중순쯤에 베를린 영화제의 한 친구로부터 코슬릭이 2002년 부산영화제에 참석한다는 걸 듣게 됐는데, 부산영화제라면 나도 어차피 가야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코슬릭에게 임감독 프로젝트에 관련된 안건을 이메일로 연락하고 부산영화제서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그로부터 답이 왔다.“당신이 제의한 임권택 회고전 프로젝트가 2004년에 실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내부적인 토론을 하겠다. 그러니 당신을 부산영화제서 만날 수 있도록 연락처를 국제담당자 카린 호핑어를 통해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나는그의 친절한 대답에 용기를 얻고는 임감독에게 처음으로 내 프로젝트를 전화로 알리면서부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그리고 2002년 11월에 부산영화제에서 코슬릭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부산영화제는 여차한 사정으로 그 해 11월 중순에 행사를 치렀었는데, 코슬릭의 일정에 맞춰 우리는 16일오후 4시 파라다이스 호텔의“부산사전제작프로그램”PPP 사무실에서 임감독이 참석한가운데 첫 모임을 가졌다. 코슬릭은 임감독의작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으나 내 프로젝트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회고전 장소로 베를린 영화제를 선택한 데 대해 아주 흐뭇해했다. 코슬릭은 나에게 먼저 그날의 회의절차(Protocol)를 기록하라고 부탁을 하고는 임감독 회고전에 관련된 세 가지 계획을 밝혔다.“첫째, 영화제 기간에 임권택 감독을 위한‘축제의 밤’이 열린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임감독이 뽑은 영화 한편이‘특별 시사’되며 그와 동시에 임감독에게‘황금카메라 명예상’이 수여된다.둘째, 회고전 프로그램은 모두 20편이 될 것이며, 그 가운데 3-4편은 베를린 영화제 기간에‘특별 시사 프로그램’으로 상영된다.그리고 베를린 영화제 위원회는 프로젝트를개발한 임안자에게 영화선정을 맡긴다.셋째, 앞에서 언급한 네다섯 편의 영화를 제외한 15-16편 영화는 영화제가 끝난 다음에아르세날 상영관에서 한 달 동안 상영을 계속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르세날 상영관의책임자인 국제포럼의 울리히 그레고 부부와모임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레고 부부는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전혀 없을 것으로 본다.”여기까지 코슬릭은 마치 준비된 문서를 읽어내리 듯 단숨에 말을 했는데 그의 계획은 내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알차고 멋있었다. 무엇보다“황금카메라 명예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화려한 전망이어서 너무 감동스러웠고 임감독 역시 만족스러운 듯 코슬릭의 계획에 기꺼이 동의를 함으로 그날 모임은 아주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그런 뒤 나는 코슬릭과의 만남을 공식화하기 위해서 회의절차의 내용을 영진위의 이건상 국제부장에게팩스로 전달했다.그리고 2003년 초에 나는 새해인사도 할 겸부산에서 이야기된 계획을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뜻에서 코슬릭에게 팩스를 보냈다. 그런데그는“부산에서 만나 반가웠다. 그러나 부산에서 이미 말했듯이 2004년에 임 감독 회고전이 열릴지에 대해서는 지금 확정할 수가 없다. 우선 2003년 오즈(일본감독 야스지로를뜻함)의 회고전 결과를 보고 3월에 다시 연락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대답을 보내왔다.한데, 이상했다. 그는 부산 모임에서뿐 아니라메일을 주고받을 때 2004년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기문제를 들먹이는 건 내부적으로 뭔가문제가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프로젝트 계획이 깨질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일단그의 통신내용을 임 감독과 영진위에 알린 다음에 코슬릭에게는 2003년 3월까지 임 감독의 회고전에 대한 결단을 내려줄 것을 서면으로 부탁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회고전을준비하려면 보통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3월로 한계를 지은 것이다.그런데 그는 4월 17일의 메일을 통해“임권택 회고전을 2004년에 열 예정이다. 그러니부산 회의절차의 기록을 보내달라”는 희망적인 소식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가 원하는 재료들을 보낸 뒤에 전주영화제에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며칠지나 코슬릭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임감독의 회고전을 2004년에 열 수 없으니 이해 해달라”는 정보를 보냈다. 일이 뒤틀어져가고있음이 분명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좌절감만 컸을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런 중에 5월 13일 코슬릭으로부터 새 소식을 받았다.“당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동료들과 토의했는데 동료들 모두가 임권택감독의 작품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임권택 회고전을 하는데 2004년이 아니라 2005년으로 결정을 했다. 임권택 감독과 영진위원장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바란다.”하지만 나는 다음에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기쁜 소식”을 그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어서 그저 사무적으로“새 소식에 감사하다. 임 감독과 영진위에 당신의‘기쁜 소식’과 친절한 안부를 전달하겠다”는 짧은 대답을 코슬릭에게 보냈다. 그러고 나서 2003년 9월초에 코슬릭의 비서 요한나 무쓰한테서“코슬릭이 베니스 영화제 동안에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연락을받았다. 해서 약속한 장소로 찾아갔으나 그는오지 않았고 대신에 무쓰가 나타나는 바람에싱겁게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코슬릭은 그뒤에도 영진위에“2003년 부산영화제 기간에 임권택 회고전 준비를 위한 모임을 갖자”고 연락을 해놓고 부산에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임에는 코슬릭을 대신한 포럼의 테르헤흐테 대표를 비롯하여 영진위의 이충직 위원장과 이건상 부장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그날의 토의는 회고전에 필요한 20편 영화의프린트 준비와 필름재료의 운송문제에 대해서였는데, 이충직 위원장은“20편 가운데 프린트 상태가 좋지 않는 영화는 새로 만들어베를린으로 보낼 것이며 그에 딸리는 모든 경비는 영진위에서 부담한다”고 발표했다.코슬릭은 영진위의 후한 지원에 감사하는 뜻에서 2004년의 벨리날레 기간 중에 이충직위원장과 해외담당자 김하원 그리고 나를“준비위원의 모임”에 초청했다. 모임은 2월 12일 오후 4시 하야트 호텔의“황금곰의라운지”에서 있었는데 코슬릭은 그 날도“바쁘다”는 이유로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무쓰 비서가 그를 대신하여 회고전 준비문제에 대해 대담을 주도 했다. 하지만 주요 사항은 부산의 모임에서 벌써 다 토의됐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단이 음료수를 마시면서 잡담으로 객쩍은 시간을 보냈다. 코슬릭에 대해한마디 덧붙이면, 그는 부산의 첫 모임을 빼놓고는 임감독 회고전에 대해“회고전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주춤대고 성의가 없었다. 그럼에도 2005년에 회고전이 실현될 수 있었던 데는 외부적인 영향이 컸다. 알려지다시피, 2005년은 독일정부에서 처음으로 계획한“한국문화의 해”였다. 한국예술제와 문화행사가 독일 전국에서동시적으로 진행될 시점에 임권택 회고전은비엔날레에 누가 봐도 적절한 시기의 더 없이좋은 선물이었던 것이다. 임권택 감독과 그의 두 작품세계 임권택 감독은 1989년 낭트 영화제서 처음 만났다. 낭트 영화제에는 스위스 트리곤 필름 배급사의 부루노 야끼 대표가 임감독과 <씨받이>에 관해 인터뷰를 하는데 도와달라고 해서갔던 것인데, 그런 뒤에도 뮌헨, 상트르 퐁피두, 스위스의 회고전 등으로 그와 같이 일할기회가 많았고 그러자니 사적으로 만날 때도가끔씩 있었다.그 중에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1999년 뮌헨영화제의 회고전을 끝내고 트리곤 필름의 초청으로 바젤을 방문하면서 우리집에서 며칠 머물 때였다. 임감독은 서구음식을 가리는 편이어서 우리 집에서는 되도록한식으로 상을 차리다가 하루는 날씨가 좋아서 마당에서 돼지갈비를 숯불에 구워먹었는데 그날따라 그는 유난스레“한국에서 먹어볼 수 없는 진미”라면서 갈비구이를 마음껏즐겼다. 그리고 남편하고는 이른 새벽까지 위스키와 스위스의 쉬낲스(45% 농도의 과실주)를 마시면서 삶과 영화작업에 대한 이야기를나눴다. 다행히 그날 저녁의 통역은 임감독과 동행하던 태흥 제작사의 이태영 대표가 맡아서 했는데, 술로 하얗게 밤을 새운 두 남자들은 다음 날 서로“술 실력이 대단하다”며칭찬(?)을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었다. 그 뒤로 우리들의 만남은 한국에서도 계속됐으며 만날 때마다 임감독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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